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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E7xTwzdsJs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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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태복음 22:41-46) |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창조절 9주(종교개혁기념 주일), 2023년 10월 29일
2천 년 전 로마 형법에 따라 십자가에 처형당한 유대인 나사렛 예수는 누구일까요? 그는 실제로 그리스도, 즉 메시아이신가요? 하나님의 아들이신가요? 이에 대한 증거는 무엇인가요? 예수께서 공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는 누군가?’라는 질문이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 질문에 관한 논의를 신학에서는 ‘그리스도론’이라고 합니다. 우선 저는 신약성경에 나온 몇 가지 유형의 질문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예수는 누군가?
1)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험악할수록 메시아 대망은 더 뜨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는 이미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은 부패했으며, 바리새인을 비롯한 종교 엘리트층은 어려움에 내몰린 사람들을 나 몰라라 했습니다. 총체적으로 패배주의에 떨어진 겁니다. 광야에서 불을 토하듯 회개를 설교했기에 사람들이 메시아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세례 요한은 헤롯 왕의 부도덕한 행위를 비판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곧 죽게 될 것입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서 물은 겁니다. 당신이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인가?
2) 예수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도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고향을 들렀을 때 자기들끼리 호기심 섞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그들의 호칭이 공관복음서에 따라서 약간씩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이는 그 목수의 아들(τέκτονος υἱός)이 아니냐”(13:55)라 했고, 마가복음은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ὁ υἱός τῆς Μαρίας) 목수가 아니냐.”(6:3)라고 했으며, 누가복음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4:22)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3) 당신 자신에 대한 여러 소문을 들었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는가?’라고 묻자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묻자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Χριστὸς)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the son of God) 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이 그리스도교 정통 신앙고백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4) 예수께서 체포당한 뒤에 일차로 산헤드린 공회 법정에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피고 예수께 질문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 26:63) 예수께서는 직접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인자(예수)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당신들이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접적으로 메시아임을 알리신 겁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신성 모독이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5) 예수께서는 산헤드린 공회 심문이 끝난 뒤에 빌라도의 로마 법정으로 끌려갔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께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ὁ Βασιλεὺς)이냐?”(마 27:11) 예수께서는 빌라도의 질문에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6) 요한복음에는 유대인들과 예수 사이에 벌어지는 그리스도론 논쟁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당신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고(8:53) 물으면서 당신 정체를 밝히라고 예수께 요구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번에도 직접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대답해봐야 그들이 믿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런 궁극적인 문제는 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구원 개념에 대한 이해에 따라서 견해가 달라질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강력한 카리스마로 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유대민족을 세계에서 선도적 나라로 만드는 것을 그리스도의 일, 즉 메시아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인물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이 논쟁 끝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 했습니다.
본문 설명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이 누구냐, 즉 예수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에 관한 논쟁이 예수 생애 중에서 치열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도 그런 논쟁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마 22:42절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들의 대답은 유대의 전통에 따른 겁니다. 그들은 다윗 가문에서 메시아가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도 본래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마 1:1절이 이미 그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예수님이 질문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대답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고대 이스라엘을 통일시킨 왕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원주민인 여부스족을 굴복시키고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중심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왕궁도 세웠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치고 죽었습니다. 유대 역사가들이 다른 왕들을 평가할 때 다윗이 기준이 될 정도였습니다. 다윗 왕조를 제외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다윗의 역할에서 찾았던 그들의 눈에 예수는 결코 그리스도일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바리새인들의 논리를 무너뜨립니다. 다윗이 위대한 인물이기는 하나 그도 역시 구원받아야 할 인물입니다. 그도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할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아 대망의 근거로 보는 시편 110:1절이 본문 44절에서 인용되었습니다. 이 시편은 왕 즉위식 때 불린 노래입니다. 다윗이 쓴 시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주께서 내 주께’라는 표현에서 앞의 ‘주’는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키고 다음에 나온 ‘주’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게 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비록 다윗의 후손이지만 다윗이 ‘나의 주’(Κύριος μου)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메시아를 ‘나의 주’라고 고백했으니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혈통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이나 영적으로는 자손이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지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만 인정하는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보다 우월하고 아브라함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넘볼 수 없는 신적 권능을 지니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명으로 예수님의 그리스도 논쟁은 끝났을까요? 마 22:46절은 이 논쟁 이후에 아무도 예수께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논란이 많았습니다. 이런 논란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예수께서 인류 구원자인지 아닌지가 모든 사람이 인정할 정도로 완전하게 끝난 게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변증해야 합니다. 그럴 책임이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되지 변증은 무슨 변증이냐 하고 생각하면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지난 역사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개념과 생각으로 자신의 믿음을 변증했습니다. 그래서 철학과 대화하고 과학과 대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과 거기서 사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알아듣도록 설명하고 그 믿음으로 삶을 살아내는 것이 그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실존론적 그리스도론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 근거는 무엇인지, 이런 질문 앞에 우리 자신이 실존적으로 먼저 서야 합니다. 예수는 여러분의 그리스도, 구원자이신가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걸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아니 더 근본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나의 구원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죽은 다음에 천국 갈 수 있는 보증수표가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어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훌륭한 도덕 선생으로 받아들입니다. 교회에 나가면 착한 사람 되라는 말을 들으니까 좋은 거야, 하는 식으로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 믿어서 물질과 건강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심리적인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그들은 구원을 재물, 건강, 도덕성, 심리적 위로 등으로 여기는 겁니다. 이런 것 때문이라면 굳이 예수 믿을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어린이 교육 상담과 심리 치유에서 뛰어난 실력이 있는 오 아무개 씨를 멘토로 삼으면 충분하고, 먹을거리와 식당 운영에서 압도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백 아무개 씨를 선생으로 모시면 됩니다. 저는 그런 노력을 낮춰보려는 게 아닙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즉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그런 노력과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자칫하면 예수님을 오해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과 제사장들과 로마 총독과 가룟 유다처럼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 논쟁에서, 즉 구원론에서 중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결국은 그리스도론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요? 여러분에게 구원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는 그리스어 Χριστός의 번역어입니다. 크리스토스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번역입니다. 그 의미는 본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왕정 시대에는 왕들이, 왕정 이후 시대에는 제사장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왕정도 무너지고 성전 체제도 무너지면서 그들은 다윗 후손 중에서 유대민족을 구원할 메시아가 온다고 믿었습니다. 예수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에 아예 그리스도라는 이름까지 붙여서 호칭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그리스도, 즉 구원자를 말한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수렁에 빠진 사람이 건짐을 받아야 하듯이 말입니다. 여기서 수렁은 죄입니다. 죄를 교만이라고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혹은 자기 사랑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교만과 자기사랑은 우리를 수렁에 빠지게 하는 근본 세력입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교만과 자기애를 죄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여기서 빠져나오는 게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반복해서 자기를 자랑하고 교만스럽게 삽니다. 잠시 겉으로 겸손한 모양을 취하나 실제로는 교만합니다. 입으로는 ‘제가 참 부족합니다.’ 하면서 속으로는 ‘나는 자신이 있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오늘의 치료 심리학은 ‘자기 긍정’이라는 말로 적당한 교만과 적당한 자기애가 필요하다고까지 말합니다. 교만과 자기애로 무장한 현대인들이 행복한가요? 자유롭나요? 평화와 안식을 누리나요?
교만과 자기애에 묶여 있는 한, 즉 죄의 세력에 떨어져 있는 한 우리는 삶을 충만하게 누릴 수가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보석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가짜 보석이나 짝퉁에 솔깃하게 사는 겁니다. 속는 거지요. 갈증이 심한 사람이 설탕물이나 술만 마시는 겁니다. 불쌍한 인생입니다. 지나친 표현인가요? 아닙니다. 그 무엇으로도 우리의 영혼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걸 억지로 채우려고 애를 쓰니까 불쌍한 인생이 되는 겁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불쌍히 여겨주소서.’라는 기도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예수와 구원 경험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의 애환을 잘 몰라서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느니, 불쌍한 인생이라느니, 하면서 설교한다고 불편하게 여기는 분들도 있겠지요. 하나님 없이도 대충 남에게 나쁜 소리, 싫은 소리 하지 않고, 가능한 한 넉넉하게 살면서 인생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인생 말고 더 충만한 삶이 도대체 어디 있냐고 말입니다. 저는 평생 소위 ‘교회 밥’만 먹고 살았기에 일반 교인들이 세상살이에서 얼마나 고달프게 사는지를 다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저는 성경에서 배운 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경험한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전할 뿐입니다.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예수를 따른다는 말은 그를 그리스도로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경험은 곧 구원 경험입니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세상의 다른 세력에게 지배받지 않습니다. 다른 것들이 너무 작아 보이기에 그의 영혼이 자유로워집니다. 그래서 포기할 수 있습니다. 돈에도 묶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영혼의 자유를 가리켜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고 복음서 기자들이 말한 겁니다.
제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실제로 영혼이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립니다. 좌고우면합니다. 우쭐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영혼의 자유와 의로움과는 거리가 멉니다. 왜 그럴까요? 여전히 죄의 세력에게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교만하고 여전히 자기애에 몰입해서 사는 겁니다. 죽을 때까지 죄의 노예라는 실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영혼의 자유에 가까이 갈 뿐입니다. 이 땅에서 삶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만 보면 인생은 절망적입니다. 요즘 팔레스타인 전쟁을 보면서 저는 저를 포함하여 사람들과 세상에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기쁜 소식(good news)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복음(유앙겔리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소식이 그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소식입니다.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나요? 믿을 수 없나요? 저는 말이 된다고 믿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사건이, 유일무이한, 전무후무한 일이 예수께 일어났다고 말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구원의 능력과 의로움의 능력에 기대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 인류 역사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개인의 운명에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몇 년을 살았으며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아갈지 모르겠으나,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인생 연륜과 더불어서 더 깊어지고 분명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모모 님은 어떤데요?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에까지 늘 좌고우면합니다.
텃밭에 무엇을 심을지, 조금이라도 더 좋은 무얼지 고민합니다.
처가집에 가야할지 말아야할지도 망설일 때가 있고요.
철없이 행동할 때 딸들에게 충고를 해야할지, 모른척해야 할지도 쉽게 결정하기 힘들어요.
어느 단체에 기부금을 내야할지, 낸다면 얼마를 내야할지도 그렇고요.
하나에서 열까지 머리를 써야 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요즘 말로 '지르는 게' 좋은데, 그게 잘 안 되지요.
조금 더 심각한 문제들도 있어요.
저만 그런게 아니라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도 마찬가지랍니다.
오죽했으면 바울이 '오호라 나는 비참한 인간이구나, 죄인 중의 괴수다.'라고 했겠어요.
눈이 밝아지면 그만큼 더 자신의 한계를 더 세밀하게 보게 되는 거 아닐까요.
"여전히 죄의 세력에게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교만하고 여전히 자기애에 몰입해서 사는 겁니다. 죽을 때까지 죄의 노예라는 실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영혼의 자유에 가까이 갈 뿐입니다."
"지금 몇 년을 살았으며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아갈지 모르겠으나,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인생 연륜과 더불어서 더 깊어지고 분명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더 가까이, 더 깊이 간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조금씩 알 것 같습니다.
부활 생명의 실체를 이 세상의 생명형식으로 맛보려는 사람들 속에 살면서
그 질적인 다른 생명의 세계를 그들의 방식으로만 이해시키라는 요구 속에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과 거기서 사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알아듣도록 설명하고 그 믿음으로 삶을 살아내는 것이 그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소명"이라는 말이 조금씩 코끼리 털 한개 만큼(^^) 선명해 지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