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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창조절 조회 수 1122 추천 수 0 2023.11.12 18:55:24
설교보기 : https://youtu.be/fmLUPOQ2IoE 
성경본문 : 마태복음 25:1-13 

외면당한 사람들

25:1-13, 창조절 11, 20231112

 

 

마태복음 25

우리말 성경에 열 처녀 비유라는 소제목이 달린 마 25:1-13절 이야기는 천국에 대한 비유입니다. 천국(天國)은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ν ορανν의 한자 번역입니다. ‘하나님 나라’(ἡ βασιλεία τοΘεοῦ)처럼 우리말로 번역하려면 하늘나라라고 표현해야 자연스럽습니다. 하늘나라 비유는 잔칫집에서 등을 들고 신랑 일행을 기다리는 열 명의 젊은 처녀와 같다는 말로 비유가 시작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혼례를 밤에 올렸습니다. 혼례의 첫 순서는 신붓집에 도착하는 신랑 일행을 신부 친구들이 춤을 추면서 맞이하는 것입니다. 신랑집이 멀면 신랑 일행의 도착 시각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이번이 그랬나 봅니다. 기다리던 열 명의 춤꾼 여자들은 졸다 자다 했습니다. 잠결에 신랑 일행이 마을 근처에 이르렀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다섯 명은 등과 기름을 준비했기에 등불을 밝힐 수 있었으나 다른 다섯 명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서 등불을 밝힐 수 없었습니다. 본문은 준비한 다섯 명을 슬기롭다고 하고 준비하지 못한 다섯 명을 미련하다고 표현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가 슬기로운 다섯 처녀에게 기름을 나눠달라고 정중히 부탁했습니다. 기름을 나눠서 쓰다가는 양쪽 모두 부족할 테니까 기름을 사 오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다섯 명이 기름을 사러 나간 사이에 신랑 일행은 잔칫집에 도착했고, 문은 닫혔습니다. 문이 왜 닫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보통 잔칫집은 계속 문을 열어두는 게 자연스러운데 말입니다. 그럴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었겠지요. 기름을 사러 나갔다가 돌아온 다섯 명이 문을 열어달라.”라고 간절하게 외칩니다. 이미 들어간 다섯 명 친구들처럼 자신들도 잔칫집에서 신명 나게 춤을 춰야 하니까요. ‘그래, 빨리 들어오라.’라는 말을 들을 줄 알았으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듣습니다. 12절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이 춤꾼 여자들은 잔치 자리에서 외면당했습니다. 너무 심합니다. 기름을 미리 충분할 정도로 준비하지 못한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요? 기름은 주인이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늦게라도 기름을 준비했으면 그 정성을 인정해줘야 하지 않나요? 잔칫집 주인이 너무 매정합니다.

25장에는 열 처녀 비유외에 다른 두 가지 비유가 더 나옵니다. 25:14 이하에는 소위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과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주인이 돌아오기 전까지 장사해서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의 이윤을 남겼으나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땅에 묻어두었다가 한 달란트를 그대로 주인에게 가져왔습니다. 주인은 앞의 두 종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인정하고,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져온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25:30) 25:31 이하에는 양과 염소 비유가 나옵니다. 한쪽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고 했으며, 다른 한쪽은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저주받을 자들의 운명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25:41) 저주에 가까운 발언입니다.

25장에 나오는 이런 비유를 읽으면 어딘가 찜찜한 생각이 듭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첫 번째 비유에서 잔칫집 주인이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매정한 존재로 묘사되었을까요?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함이 풍성하신 분이 아니신가요? 예수께서는 형제가 죄를 행했을 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18:22) 말씀하신 적도 있지 않나요?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까지 그대로 받아주신 아버지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대목에서는 하나님을 인정머리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으신, 아주 야박한 존재처럼 설명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여기에 다른 뜻이 있는 걸까요?

 

하늘나라의 긴박성

대답을 찾으려면 이 비유의 키워드라 할 하늘나라개념의 긴박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출가 공생애 첫 음성으로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4:17)라는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마가복음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4:43) 예수께서는 하늘나라, 또는 하나님의 나라에 온통 영혼이 쏠린 채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치유 사건과 십자가 죽음까지 모든 그의 운명은 하늘나라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예수께는 하늘나라에 완전히 올인하신 겁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늘나라가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시는지요? 그런 경험이 분명한가요? 그게 아니라 하늘나라는 죽음 이후의 문제이니까 지금 우리의 실제 삶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우선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봅시다. 4:17절을 서로 비교해보시라고 그리스어와 영어 KJV으로 읽겠습니다.

 

Μετανοετε, ἤγγικεν γρ βασιλεία τν ορανν.

메타노에이테, 엥기켄 가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리논.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문장을 KJV 성경은 재미있게 표현했습니다. at hand라고 말입니다. 아직 in hand는 아닙니다. 손안에 들어온 게 아니라 손에 밀착해 있는 겁니다. 소유할 수는 없으나 그 능력을 경험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 일상에서 바람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바람을 소유하지는 못하나 바람이 불 때 그 능력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걸 느끼는 사람은 생명의 새로운 차원을 경험할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실제로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이 세상에는 하늘나라가 오지 않은 것 같은 증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비극적인 일이나 억울한 일도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나라도 소득이 엄청나게 늘었으나 사람들이 별로 행복해하지 않습니다. 청소년들과 노인들이 가장 불행하게 사는 나라가 OECD 중에서 우리나라라고 하는 통계가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오지 않은 것 같은 증거가 훨씬 더 많은 걸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하늘나라는 우리의 생각이나 예상과 다르기에 자기 생각에 고정된 사람은, 즉 자기를 고집하는 사람은 아무리 지성적이고 교양이 있어도 하늘나라를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통치(ἡ βασιλεία)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그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세상을 생명으로 통치하심으로써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요한계시록의 증언에 따르면 그분은 알파이고 오메가이십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1:4)이십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다는 사실을 선포하셨고, 그 사실에 온전히 의지해서 사람들을 만나시고 행동하시고 자기의 운명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 선포와 운명 이후로 하나님은 하늘에 고고하게 앉아서 인간을 관찰하는 분이 아니라 이 역사에 깊이 개입하는 분으로 나타나신 겁니다. 이걸 느끼는 사람도 있고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느끼는 사람은 그 사실에 영적 주파수를 맞추면서 살아가겠으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경험을 못 한 거니까 세상일에 정신없이 휘말리거나 교회에 다녀도 영혼이 풍요로워지지 못하겠지요.

지난 월요일에 서울신학대학 입학 동기 몇 명과 만나서 밥 먹고 테니스 하고 샤워를 함께했습니다. 가장 젊은 시절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던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오십 년 전 1973년 입학 동기들입니다. 스무 살에 만나서 지금 모두 일흔 살이 되었습니다. 스무 살 때는 오십 년 후의 일흔 살을 실감하기 어려웠습니다. 막연하게 나이를 먹으면 쉰 살, 예순 살, 일흔 살이 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일흔 살이 아주 가까이 왔다고, 앞에서 영어 성경에서 묘사된 at hand라고 실감할 수 있었다면 더 충실하게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았을 겁니다. 저는 앞으로 이십 년이 지나면 구십 살이 됩니다. 구십 살을 그냥 숫자 계산으로가 아니라 영혼의 깊이에서 실감한다면, 바로 코앞에 닥친 순간이라고 실감할 수 있다면 지금 저는 완전히 새롭게 살아갈 겁니다. 그런 새로운 삶이 어떤 건지를 여러분도 다 아실 겁니다. 한마디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살아가기에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이 아쉽고, 무엇에 미련이 있겠습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생명 충만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스무 살의 청년이 일흔 살을 reality로 받아들이듯이, 그리고 일흔 살의 노인이 죽기 직전의 구십 살을 reality로 받아들이듯이 삶을 절체절명의 사건으로 경험하라는 뜻입니다. 조금 더 그리스도교적 표현으로 바꾸면 인생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출가했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출가 제자들은 뒤를 보면 안 됩니다. 뒤를 볼 수도 없습니다. 스무 살이지만 이미 일흔 살이 된 거나 마찬가지인데, 지금 일흔 살이지만 이미 구십 살이 된 거나 마찬가지인데, 지금 살아있으나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중요하지 않은 일로 세월을 소비하겠습니까. 집에 불이 났는데 어떻게 세간살이를 챙기고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잔칫집 문이 닫히는 순간에 어떻게 한가하게 백화점과 미장원에 다니고, 산책하러 다니겠습니까. 가까이 온 하늘나라와 하나님 앞에서(corm Deo) 우리의 실존은 목마른 사슴처럼 갈급합니다.

인간의 이런 궁극적인 실존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알아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별로 진지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진지하게 대해봤자 해결 방법도 없고, 그런 문제를 붙들고 살기에는 일상이 너무 벅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런 궁극적인 실존에 관한 감수성이 둔감해졌다는 사실이겠지요. 젊은 시절에는 계절 변화에도 민감하나 나이를 먹으면서 둔감해지는 것처럼 그리스도교인들도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에 둔감해질 수 있습니다. 둔감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예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영혼 구원을 시큰둥하게 여깁니다. 세상에서 배운 상식과 세상에서 얻은 경험에 갇혀서 우리 생명 현상에서 가장 소중한 영혼의 감수성이 무뎌진 겁니다. 알코올이나 마약이나 소비에 중독이 되듯이요.

 

깨어있으라.

앞에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춤꾼 여자들을 향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는 주인의 말이 너무 야박하다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어긋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에 숨어있는 의미를 포착해야 합니다. 주인이 이 불쌍한 춤꾼 여자들을 외면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잔칫집 주인을 외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왜 포기하겠습니까. 오히려 사람이 하나님을 포기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춤꾼들은 외면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먼저 외면하니까 외면당한 겁니다. 사랑을 외면한 사람은 사랑에 외면당할 수밖에 없듯이 말입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하늘나라를 외면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은총을 거부하는데 어떻게 은총을 받겠어요. 귀를 막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른 아침 새소리와 깊은 가을의 벌레 소리가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춤꾼 여자들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이 여자들은 동네잔치를 빛내주려고 왔습니다. 마음이 착합니다. 동네일에 협조적이니까 인간성도 좋은 겁니다. 다만 신랑이 더디 올 수도 있으니까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깜빡했습니다. 의도적인 건 아닙니다. 어쩌다가 무심결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에게 빌려서 써도 될지 모른다고 안이하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문제는 신랑 일행이 예상외로 너무 늦게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그런 뜻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듯이 말입니다. 그런 순간에는 사소해 보이던 일들이 결정적으로 작용합니다. 잔칫집 문이 닫혀서 들어가지 못한 이 젊은 여성들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사소한 일들입니다. 사소한 일을 허투루 대하는 삶의 패턴이 고착하면 결정적인 일도 허투루 대하게 됩니다. 적은 일에 충성된 자만이 큰일을 맡을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사소해 보이는 일상에서 깨어있지 않으면, 즉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서 배척당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어떤 사본에는 사람의 아들이 올 그 날과 그 때를 모르니까 그대들은 깨어있으시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는 때는 생명 완성의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지금이 그 순간일 수도 있고, 내일이 그 순간일 수도 있으며, 죽음이 그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은 비밀입니다. 시간만 비밀이 아니라 방식도 비밀입니다. 은폐되어 있으나 언젠가 드러날 것입니다. 창을 배우는 사람이 어느 순간 득음 세계에 들어가듯이 말입니다. 그리스도교적으로 표현하면 성령 충만의 순간과 같습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 운명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외면당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사람 스스로 결정적인 순간을 외면함으로써 외면당하는 겁니다. 이런 설명이 실감 나지 않나요? 그래서 성경은 반복해서 깨어있으라.”라고 경고하는 겁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가까이 온 하늘나라를 향해서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잔치 날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메타노이아)하라고 말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방향을 바꾸면, 즉 잔칫집에서의 춤이 얼마나 황홀한지를 안다면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지가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세상의 염려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통치에, 그의 사랑과 그의 종말론적 약속과 그의 미래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겁니다. 이미 하늘나라가 은폐된 일상을, 그래서 신비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각자의 일상을 정말 보석처럼 대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먼저 하늘나라를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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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좋은나무

November 14, 2023
*.222.228.129

설교복기 시간에 잠깐 말씀하시고 지나가셨는데 마음에 두고두고 남네요.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통치는 하나님만이 하시는 배타적인 행위인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하나 있다면.... 그 나라를 받는 것일 뿐이다!" 받는다는 것~~ 내게 주어진 일상의 모든 것들을 은총으로 선물로 받아 누린다는 것, 생각해 보면 받기만 하면 되는 건데 그게 또 쉬운 것 만은 아니네요!! 사람은 받는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약해진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대로 이루려고 하고, 내가 해서 그 결과를 확인하려 하고 거기에서 성취에서 안심과 만족과 인정과 박수갈채를 얻으려고 하구요. 설교문을 곱씹고 다시 곱씹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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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4, 2023
*.137.91.148

좋은나무 목사님, 요즘 온,오프 라인에 결쳐서 자주 만나네요.

설교 복기의 '액기스'를 뽑아올리셨군요.

제가 한 말을 좋은나무 님을 통해서 들으니까 더 실감이 납니다.

앞으로 저도 '받는 연습'을 더 열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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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December 06, 2023
*.47.159.9

받아드림은

본질적으로 내 삶에서 그것을 녹여내고, 살아내야 하기 때문에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 교회 목사 님들 참 거시기 합니다.

위선에, 거짓에 양의 고기와 가죽이나 탐 내는 

천박한 목회 업자들이 판을 치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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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소유와존재

November 16, 2023
*.254.11.100

회개 메타노이아 즉 방향 전환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순간만이 아니라 매 순간 되지 않으면

자신이 외면하고 있는 줄도 모르도 외면 당하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언젠가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마지막 순간까지 더 알려고 하고, 더 생각하고, 더 살피고, 더 기도하는

바울이 말하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순례의 삶을 한걸음씩 걸어가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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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6, 2023
*.157.223.40

소유존재 님이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을 짚은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옳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잘못된 것일 수도 있고요.

자기 모습은 자기가 직접 못보니까 거울이 필요하듯이 

우리 신앙도 건강한지 아닌지를 비쳐볼 수 있는 영적 거울이 필요합니다.

성경이 그런 거울의 역할을 하는 건 맞는데,

성경도 자의적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아서 성경만으로 자기를 비쳐보기는 어렵지요.

어쨌든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답니다. 

그 정체성을 유지하는 건 더더욱 어렵고요. 

그런 긴장을 버텨내기 힘들어서 종종 율법주의자가 되곤 합니다. 

율법주의의 본질은 자기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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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124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1695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736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712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622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088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070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569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468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328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287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346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457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427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2972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2861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2601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3830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437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3837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849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459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20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08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26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004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146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672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351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36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350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251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796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433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361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580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494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474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100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769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339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10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06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366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651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825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427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781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541
951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665
950 부활절 예수를 '믿는 자' (요 20:19~31) [1] 2022-04-24 4528
949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598
948 사순절 유월절 마지막 식사 (눅 22:14~23) [2] 2022-04-10 3045
947 사순절 하나님의 새로운 일 (사 43:16~21) [4] 2022-04-03 4037
946 사순절 예수의 하나님 (눅 15:1~3, 11b~32) [5] 2022-03-27 2963
945 사순절 목마름의 실체 (사 55:1~9) [4] 2022-03-20 3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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