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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QF8VC6Wi7A4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18-25 

십자가의 길과 하나님의 능력

고전 1:18-25, 사순절 3, 202433

 

 

오늘 설교 본문인 고전 1:18-25절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18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라고 할 때 도는 그리스어 λόγος의 번역입니다. 이 로고스는 그리스 스토아 철학의 핵심 개념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 또는 노장사상의 도()나 하이데거의 존재(Sein)처럼 만물의 근원이자 원리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은 1:1절에서 로고스를 세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말 <개역개정> 성경은 이 로고스를 말씀으로 번역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와 달리 우리말 성경은 고전 1:18절에서 로고스를 로 번역했습니다. 오늘 저는 십자가의 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십자가의 λόγος

본문이 말하는 십자가의 길은 예수의 운명을 가리킵니다. 그 운명의 최종착지는 십자가 죽음입니다. 삼십 대 초반의 나이에 로마 형법에 따라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를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됩니다. 당시 예수 제자들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당시 종교 권력자들에 의해서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을 때 제자들은 만류했습니다. 바로 직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라고 고백했던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면서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16:22) 얼마 후 갈릴리에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을 때 제자들이 보인 반응을 마 17:23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제자들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은 십자가 죽음을 인생 실패로, 소명 실패로 여겼습니다. 그 사실을 바울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바울은 여기서 두 집단을 거론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믿는 구약의 백성들이고, 이방인은 인간 문명을 자랑하는 로마 제국의 백성들입니다. 이방인은 그렇다 치고, 유대인들마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거리꼈다는 건 조금 이상해 보입니다. ‘거리끼는 것이라는 표현은 그리스어 σκάνδαλον의 번역입니다. 보통 영어로 스캔들이라고 부르는 단어가 여기서 왔습니다. 사람이 걸려서 넘어지는 걸림돌이라는 뜻입니다. 21:23절에 나오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라는 말씀이 바로 유대인들의 생각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조롱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3:25에서는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관리들이 한 말이 나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참조, 23:39) 오죽했으면 예수께서도 스스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15:34)이라고 절규하셨겠습니까. 이처럼 모두가 절망할 수밖에 없었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으며, 비난받을 수밖에 없었고, 스캔들로 치부되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째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건가요? 요즘 쓰는 표현으로 정신 승리에 불과한 건가요?

우리가 배운 교리적인 대답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죄의 용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구원받았다는 겁니다. 죄인인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께서 대신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걸 대속론이라고 부릅니다. 중세기에는 아주 극단적인 주장인 배상만족설 개념도 나왔었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대속론이라는 교리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설득이 안 되는 겁니다. 우선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 자체가 없고, 예수의 죽음으로 해결된다는 말에 동의가 안 됩니다. 요즘 젊은 지성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멀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들이 경험하는 세상의 삶과 교회의 가르침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거리가 느껴지는 겁니다. 기성세대 그리스도인들 역시 겉으로는 대속론을 받아들이지만 왜 그래야만 하는지는 찜찜하게 여깁니다. 거칠게 말해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할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니까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게 하거나 짓더라도 즉시 회개하게 하면 모든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건데, 하고 말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실제 삶 사이에 이런 간격이 벌어지는 이유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한 오해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교리는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교회가 세워지고 신앙생활을 이어가면서 정립되었습니다. 교리가 먼저 생기고 교회 모임이 시작한 게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생긴 후에 교리가 만들어진 겁니다. 이는 사랑 경험과 사랑 이론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사랑에 관한 온갖 이론과 가르침을 배운 거와 사랑을 실제로 경험하는 거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교 믿음에서도 교리 이전에 하나님 경험이 우선입니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아 구원에 이르게 하려고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는 교리가 나오기 전에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아주 분명한 구원 경험이 제자들에게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걸 오늘 우리도 붙들고 살아갑니다. 한번 붙드는 게 아니라 평생 그 경험의 깊이로 들어가려고 애를 씁니다. 다시 묻습니다. 바울과 당시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운명에서 도대체 무엇을 경험했기에 종교적인 거리낌과 세속적인 헛소리의 대상인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능력이자 지혜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σοφί논쟁

먼저 바울의 설명을 따라갑시다. 그는 지혜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조롱하고 비하하며 혐오하는 이들은 모두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만큼 선민의식이 강한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의 율법은 지혜 중의 지혜입니다. 로마 지식인들만큼 자부심이 큰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로마 제국은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을 융합하여 그 어떤 제국도 따라오지 못할 수준의 문명 세계를 꽃피웠습니다.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시작한 서양 철학은 로마를 거쳐서 서양 문명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말 철학으로 번역된 philosophy는 그리스어 필로스(사랑)와 소피아(지혜)의 합성어로서 본래 뜻은 지혜 사랑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 소피아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그는 19절에서 이사야 29:14절을 이렇게 인용합니다.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이어서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바울이 말하는 세상의 지혜는 가장 간단히 말해서 세상의 이치입니다. 이치를 알고 이치에 따라서 사는 건 좋은 겁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치를 잘 헤아릴 줄 아는 지혜를 얻으려고 애씁니다. 그런 지혜가 있어야만 세상에서 인정받습니다. 의술과 법도 세상의 이치입니다. 의술과 법 전문가가 되면 그 사회에서 특별 대우를 받습니다. 지혜가 많은 사람이 그 사회의 주류가 되고 기득권자가 됩니다. 대한민국에 22대 총선 시절이 다가왔습니다. 후보자들은 모두 지혜에서 일가견이 있다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국민을 위해서 자기가 국회의원이 되어야 하며, 자기들 당이 다수당이 되어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알다시피 지혜 있는 사람들끼리 충돌합니다. 법과 법이 충돌합니다. 의대 정원 문제로 정부와 의료계가 충돌합니다. 총선에 나선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은 거의 내전 수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지성을 폐기한다는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지혜가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지혜는 필수 불가결입니다. 원로들의 지혜는 많은 문제를 풀어낼 수 있습니다. 유대교의 율법과 로마 문명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지혜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게 이상한 겁니다. 아무리 좋은 지혜라고 하더라도 그걸 절대화하면 인간 삶과 세상을 왜곡하고 파괴합니다. 율법 전문가였던, 오늘날로 법 전문가였던 바울은 그 사태를 정확하게 뚫어보았습니다. 율법은 아무리 좋아도 죄를 깨닫게 할 뿐이지 생명을 얻게 하지는 못한다고 말입니다. ()법은 어느 순간에 이현령비현령식으로 해석됩니다. 남을 재단하는 기준이 되고, 더 나아가서 남을 헤치는 칼이 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첨단의 지혜로 인정받는 자연과학에도 그런 위험성이 없지 않습니다. 유전자 결정론이 지배적 담론이 된다면 인간의 삶에서 도덕성과 윤리와 책임감 등등, 인간이 인가다워지는 가장 소중한 가치는 무의미해집니다. 적자생존만이 최상의 가치로 자리를 잡습니다. 인간 행동의 모든 책임을 그의 인격이 아니라 유전자로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21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지혜(σοφίτοΘεοῦ)는 세상의 지혜와 차원이 다르고 방향이 다릅니다. 역설적입니다. 바울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게 바로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습니다. ‘전도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κηρύγματος입니다. 복음에 관한 설교나 선포를 가리킵니다. 루터 성경은 전도의 미련한 것어리석은 설교라고 번역했습니다. 세상의 지혜가 볼 때 어리석다는 뜻이지 실제로 설교가 어리석다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바울이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세상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유대인과 헬라인(이방인)입니다. 유대인은 초자연적 기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삶의 지혜를 찾으나(고전 1:22)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바울은 외칩니다.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δύναμις

이게 말이 되나요? 이게 말이 되려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가 죄를 용서받는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십자가로 인한 죄 용서 사건을 마술처럼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주문을 외우듯이 예수의 피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났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용서받은 줄로 믿는다고 진심으로 기도하고 열정적으로 찬송하다 보면 일종의 심리적인 힐링을 경험할 수는 있습니다. 심리적인 자기 암시로 인한 일시적인 치유입니다. 그런 심리적인 힐링도, 갑자가 열이 나면 해열제를 먹듯이, 때에 따라서 필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는 우리의 영혼이 건강해질 수 없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로는 더더욱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왜 하나님의 능력인가요?

예수의 십자가는 유대인에게 거리낌의 대상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함의 대상이라는 23절 말씀을 다시 상기하십시오. 세상은 십자가의 운명을 두려워하고 꺼리고 외면하며 배척하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그런 운명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여러분은 뭐라 답하시겠습니까. 몰트만(Ü. Moltmann)이라는 신학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십자가에 하나님 당신께서 못 박힌 거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그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사건에서 시작했고, 그 사건으로 돌아가며, 그 사건에서 궁극적인 희망을 발견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그리스도교 신앙에 코웃음을 칠 겁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겠습니다. 가난해지면 그 사람의 인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거꾸로 부자가 되면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돈이 많으면 해외여행도 가고 비싼 콘서트에도 가고 호텔 뷔페도 가니까 훨씬 고품격으로 살기는 하겠지요. 자식들이 고생하지 않도록 유산도 적당하게 물려줄 수 있겠고요. 요즘 젊은이들은 아이 돌보는 삶아이돌 보는 삶을 구분하더군요. 그런데요. 우리가 인간의 품위를 지키는 데에는 돈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시는 분들은 다 알 겁니다. 이름 없는 촌부로 살아도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온통 그분의 은총으로 가득하기에 소소한 일상에서 그것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가난하나 부자이거나 삶의 본질에서 정작 중요한 것을 누리는 데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역설적으로 권력과 명예와 돈이 없을 때, 외로울 때,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껍데기는 가버릴 때그 은총의 순간이 더 분명하게 들어옵니다.

당신은 현실이 얼마나 살벌한지를 몰라서 그런 설교를 하는 거야, 하고 속으로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지요. 늙어서 몸이 아픈 데도 폐지 주우러 다니는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고달픈지 아느냐고 말입니다. 사람이 최소한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서로 치열하게 노력하고 투쟁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가 왜 외면하겠습니까. 제가 지금 도사 연하면서 가난을 예찬하거나 복지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와 같은 삶에도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하나님의 은총이 깃든다는 사실만은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구원하는 거 아닙니까. 정말 귀하고 복된 것을 놓친 채 다른 사람의 인생을 부러워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면서 자기에게 매몰되는 걸 가리켜서 성경은 죄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합니다.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 해방합니다. 예수 십자가의 길(로고스)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우리 인생이 아무리 나락으로 떨어져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보다 더 밑으로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둘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바로 임마누엘’(하나님이 함께하심)입니다. 이 말은 죽음까지 무효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곧 부활 경험입니다. 죽음의 무효화에 근거해서 바울은 18절과 24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라고 서슴없이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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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소유와존재

March 05, 2024
*.254.11.100

삶의 나락경험을 직접 해 본 적이 있는가?

아니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삶의 나락경험이 허락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내게 주어진 제자로서의 길을 감당하려는 순간을

내가 외면하지만 않았다면

그 경험을 작게나마 맛보았을지도 모른다.


쉽게 그 길을 외면했던 지난 날들을 돌아본다.

그 순간 나는 그 경험을 거부했다.

너무 쉽게 말이다...


내게 주어질 그 길을 나는 모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그 길에 충실하는 것 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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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05, 2024
*.181.143.12

예, 소유존재 님의 고백을 잘 들었고, 거기에 동의합니다.

베드로도 '나는 예수를 모른다.'라고 세번이나 말했다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평생 술취한 사람의 발걸음이 흐트러지듯이

여러가지 이유로 기우뚱거리면서 삽니다.

그래도 영혼의 정신줄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겠지요.

우리에게 가장 크고 결정적인 나락은 곧 들이닥칠 죽음입니다.

반복하는 말이지만 '메멘토 모리'만 잘 기억해도

우리의 삶이 정말 새로워질 거 같습니다.

이를 그리스도교 종교 의식으로 바꾸면 '세례' 영성을 붙들기만 해도

일상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경험되는 겁니다.

어쨌든지 십자가와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힘든 운명에 떨어져도

하나님께서 고유한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만은 잊지 맙시다.

그리고 그 사실의 reality를 일상에서 잘 살피면서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봅시다.

즐겁고 복된 삶이 되지 않을까요!

오늘도 하루종일 봄비가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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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1888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1886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932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304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242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732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625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470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485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534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605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567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314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255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3268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469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4079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496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3014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632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585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273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680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155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95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814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608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297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509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438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936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628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92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751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634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659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247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82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484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734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460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539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826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4033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612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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