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4

사람 차별 마시오!

기타 조회 수 20424 추천 수 58 2006.09.24 15:01:01
성경본문 : 야고보서 2:1-13 
http://wms.kehc.org/d/dabia/06.09.24.MP32006.9.24. 약 2:1-13
사람 차별 마시오!

오늘 우리가 읽은 야고보서의 저자는 일반적으로 사도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베드로보다 훨씬 막강한 권위를 행사했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바울이 강조한 믿음보다는 실천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 바울의 가르침과 야고보의 가르침이 대립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과 실천은 구분되기는 하지만 완전히 구별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실천을 무시하지 않았으며, 야고보가 믿음을 배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강조점을 달리했을 뿐입니다. 바울은 여전히 율법주의적인 신앙이 기승을 부리던 상황에 놓여 있었으며, 야고보는 실천적인 요소가 매우 부족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람차별
야고보는 1-4절에서 “사람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말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를 들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장소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합시다. 이때 부자로 보이는 사람에게는 많은 관심을 보이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곧 사람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지금 막연하게 일반적인 윤리를 교훈하는 게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아보게 될 교회에서 사람차별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을 특별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어디서나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교회처럼 신자들이 너무 없을 경우에는 누구든지 오기만 하면 반기겠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갖추어진 교회라고 한다면 이런 차별은 어쩔 수 없습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차별하지는 않습니다.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부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차별하게 됩니다. 부자들은 아무래도 교회에 큰 도움이 되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물질적인 힘이 교회에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교회에서의 사람차별은 단순히 빈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식의 유무, 교양의 유무와도 상관이 됩니다. 교회가 교양을 함양하는 집단은 아니지만 그래도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 주목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지도력도 있고,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지식과 교양도 없는 사람들은 그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관심을 기울이겠습니까?
사람차별은 교회 공동체의 문제 이전에 인간 자체의 문제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부, 지식, 교양은 이 세상에서 인간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들입니다. 학교로부터 사회활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행위가 바로 이런 기준들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회 구조가 우리의 삶을 훼손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나름의 안정감 때문입니다. 부, 지식, 교양, 또한 그것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사회적 신분은 인간에게 성취감과 자기 만족감을 제공합니다. 반대로 이것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심한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현대의 사회가 인간을 얼마나 심각하게 차별하는지에 대해서 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문제는 저보다 여러분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지금 야고보는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그는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사도들과 예수님의 동생이 직접 가르치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 보면 인간차별은 인간본질에 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야고보서만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에서도 이런 차별은 흔했습니다. 심지어 애찬식을 나눌 때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따로 모였습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로 행동했습니다.(고전 11장 참조) 부자들의 마음이 비뚤어졌기 때문에 일부러 가난한 사람을 힘들게 했다기보다는 그들이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했을 뿐이겠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사회집단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부자들의 횡포
야고보는 5절 이하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을 대립적으로 비교합니다. 이런 구절은 흡사 해방신학자들의 주장과 비슷하게 들립니다. 그는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을 부요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신 그 나라를 차지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들의 믿음을 부요하게 하셨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가난한 사람은 무조건 믿음이 좋다는 뜻일까요? 약간 어려운 대목입니다. 실제의 삶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품성은 부자들보다 거칠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서기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미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믿음이 무조건 좋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은 가난한 사람들이 재물을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매일 돈, 돈 하면서 사는 이들이 있겠지만,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그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은 이미 그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재물에 대한 미련은 가지려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자가 되기는 불가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게 오히려 영적으로 부요하게 되는 길이었습니다.
야고보는 겉으로는 가난하지만 믿음이 부요한 이런 사람들을 왜 업신여기는가 하고 책망한 다음에, 그들이 숭배하는 부자들에게 대해서 이렇게 비판합니다. “여러분을 압박하는 자들은 바로 부자가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도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6,7절) 이런 말씀을 읽는 사람들 중에서는 야고보가 부자들에게 편견을 갖고 있다거나, 그 성격이 매우 과격하고 극단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현실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을 뿐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크게 봐서 두 가지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첫째, 부자들은 사람들을 법정으로 끌고 갑니다. 오늘도 그렇지만 고대사회에서도 법은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변호사를 살 수 없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법에 호소할 수 없습니다.
둘째, 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합니다. 이 문장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박해한 사람들이 주로 기득권층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 당시 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한 이유는, 혹은 무시한 이유는 그들의 눈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건이 어리석어보였기 때문입니다.
부자들을 향한 야고보의 비판을 읽은 여러분들은 한편으로는 통쾌하게 여길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 찜찜한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질문은 이렇습니다. 모든 부자는 이렇게 비판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조심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오늘 본문을 모든 부자는 나쁜 인간이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었다면 그건 큰 착각입니다. 야고보는 그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신앙적인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야고보와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야고보는 지금 사회과학을 논하는 게 아닙니다. 사회과학은 우리의 참고사항일 뿐이지 신앙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야고보는 어떤 한 계층의 사람들을 향해서 분노를 표출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부자들을 향한 비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자본숭배의 어리석음
야고보의 이런 진술은 자본에 내재해 있는 마성적인 힘을 가리킵니다. 자본은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횡포를 부리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모독한다고 말입니다. 부자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분의 힘에 완전히 예속되어 버린 그 상황이 문제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도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 실정이니, 야고보가 따끔하게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당신들은 부자를, 그 부자들의 부와 자본을 숭배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자본은 지금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자본은 세상을 기본적으로 재테크의 대상과 수단으로 간주합니다. 돈이 된다면 산을 깔아뭉개면서도 골프장을 건설하고, 대형주거 아파트를 건설합니다. 갯벌을 파괴합니다. 난자도 사고팝니다. 오늘의 자본은 야고보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물신숭배가 바로 오늘의 신흥종교입니다. 물신숭배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그리스도교도 역시 이런 경향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하고, 때로는 국가주의를 옹호하기도 하며, 심지어 제국주의적 행태를 보이기도 합니다. 야고보서의 책망은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야고보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물신숭배가 교회 안에서 사람차별로 나타납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좋은 자리에 앉고, 가난한 사람은 그냥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사람차별을 죄라고, 계명위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런 물신숭배로부터, 사람차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야고보가 교회 안에서 사람차별하지 말아라, 하고 가르쳤다고 해서 그게 가능할까요? 우리는 이런 문제를 단지 윤리적인 차원, 인권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훨씬 심층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야고보는 차별대우에 관한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1절)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영광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늘 사람을 차별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건 어떤 사람의 도덕성과 상관없이 주어진 사회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아무리 어떤 사람이 차별하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게 잘 안 됩니다. 개인의 정신적인 상태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컨대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 에이 학점을 주는 건 당연합니다. 그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습니다. 특별대우 하는 겁니다. 이 사회는 구조적으로 그걸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영적인 지평을 전혀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지평입니다. 여기서 영광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왕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처형당했지만 놀랍게도 부활을 통해서 참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영광은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이 땅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존재유비가 불가능한 하나님의 생명과 일치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 앞에서만 우리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광의 주님은 인간적인 차이를 근본적으로 해체하거나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태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여기 애벌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나비가 됩니다. 기어 다니던 상태에서 날아다니는 상태로 된다는 것은 기어 다니던 모든 차이를 넘어선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애벌레들이 나비가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희망할 수 있다면, 애벌레 상태에서의 작은 차이들, 즉 털이 몇 개 더 있는가, 뚱뚱한가 아닌가 하는 차이들을 넘어설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특징은 차별의 극단화입니다. 이 문제는 억지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흉내는 낼 수 있지만 억지로 사랑할 수 없듯이 억지로 차별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에 휩싸이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때 여러분에게 이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어른이 되면 구슬치기가 더 이상 재미가 없듯이 차별에 근거해서 세상을 보지 않을 겁니다. 거꾸로, 이 말은 곧 우리가 아직 차별에 기울어져 있다면 우리는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모를 뿐만 아니라 믿지도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을 예수에게 나타난 영광의 빛 안에서 바라보고 삽시다.
profile

profile

[레벨:1]박상열

September 24, 2006
*.37.111.204

"영광은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이 땅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존재유비가 불가능한 하나님의 생명과 일치했다는 뜻입니다"

이번 주일에도 깊이 있는 설교 감사합니다.
매일의 현실을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는군요.
그럼, 강건한 한 주 되시길 바라며...^^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73380
154 기타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 2월12일 [3] 2006-02-12 13311
153 기타 사도 바울의 자유 [2] 2006-02-05 13890
152 기타 예언 전통 앞에서, 1월19일 2006-01-29 11335
151 기타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1월22일 [2] 2006-01-22 15086
150 기타 믿음의 토대, 1월15일 [3] [1] 2006-01-15 10993
149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11805
148 기타 행복한 삶과 신앙, 1월1일 [1] 2006-01-01 13019
147 기타 오시는 구원의 하나님, 12월25일 [1] 2005-12-25 11608
146 기타 영혼의 노래, 12월18일 [1] 2005-12-18 11620
145 기타 역사의 영성을 향해!, 12월11일 [1] 2005-12-11 9595
144 기타 새 하늘과 새 땅 12월4일 [1] 2005-12-04 10731
143 기타 종말의 현재, 11월27일 [1] 2005-11-27 9911
142 기타 풍요로움의 근거, 11월20일 [4] 2005-11-20 12717
141 기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11월13일 2005-11-13 11815
140 기타 그 날과 그 시간, 11월6일 2005-11-06 14304
139 기타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 10월30일 [2] 2005-10-30 12825
138 기타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10월23일 [6] 2005-10-23 12043
137 기타 카이사르의 것과 하나님의 것, 10월16일 [1] 2005-10-16 17212
136 기타 금송아지와 야훼의 노, 10월9일 2005-10-09 11738
135 기타 높은 곳에서의 부르심, 10월2일 2005-10-02 11493
134 기타 경건주의의 함정, 9월25일 [1] 2005-09-25 11868
133 기타 만나의 영적 의미, 9월18일 [6] 2005-09-18 15062
132 기타 최후심판과 오늘, 9월11일 [3] [2] 2005-09-12 10042
131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10501
130 기타 모세의 하나님 경험, 8월29일 [8] [2] 2005-08-28 11186
129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10421
128 기타 희망의 눈, 2005. 8.15. [1] [1] 2005-08-14 10699
127 기타 요셉의 침묵, 8월7일 [1] 2005-08-07 10691
126 기타 바울의 역사인식, 7월31일 [3] 2005-07-31 9274
125 기타 하늘나라와 일상, 7월24일 [2] 2005-07-24 11680
124 기타 야곱의 두려움, 7월17일 [4] 2005-07-17 10623
123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10548
122 기타 삶과 행위, 7월3일 2005-07-04 10899
121 기타 평화의 은총, 6월26일 [1] 2005-06-26 11297
120 기타 죄로부터의 해방, 6월19일 [2] 2005-06-20 11428
119 기타 일꾼을 위한 기도, 6월12일 [3] [2] 2005-06-13 12168
118 기타 약속과 순종의 상호성, 6월5일 [1] [2] 2005-06-05 10966
117 기타 '법'을 넘어서, 5월29일 [2] 2005-05-29 9859
116 기타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2] [2] 2005-05-22 10390
115 기타 영에 속한 사람, 5월15일 [3] 2005-05-17 10941
114 기타 가족공동체를 넘어서, 5월8일 [2] 2005-05-08 10422
113 기타 생존과 번성의 토대, 5월1일 [4] 2005-05-01 10569
112 기타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신가? 4월24일 2005-04-24 10705
111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10166
110 부활절 희망은 기다림이다 (벧전 1:13-21) 2005-04-10 12784
109 기타 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1] 2005-04-04 10183
108 기타 부활을 증거하는 여인 [1] 2005-03-27 9118
107 기타 갈릴래아 나자렛 사람, 3월20일 [1] 2005-03-20 9152
106 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1] 2005-03-13 10299
105 기타 야훼가 말씀하시는 통로, 3월6일 [1] 2005-03-07 9540
104 기타 나는 야훼다, 2월27일 [1] 2005-02-27 9263
103 기타 영은 바람이다, 2월20일 [2] 2005-02-20 9256
102 기타 자유의 길, 분열의 길, 2월13일 2005-02-13 8743
101 기타 환상와 현실, 2월6일 [1] [2] 2005-02-07 9374
100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235
99 기타 말의 한계, 1월23일 [2] [2] 2005-01-23 9786
98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3186
97 기타 야훼 하나님의 종, 1월9일 [1] [1] 2005-01-10 9653
96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838
95 기타 절대 긍정, 12월26일 [1] [1] 2004-12-26 9793
94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708
93 기타 기쁨에서 평화까지, 12월12일 [1] 2004-12-13 9141
92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313
91 기타 새로운 세상, 11월28일 [1] [1] 2004-11-29 9606
90 기타 앎의 영적인 차원, 11월21일 [1] [2] 2004-11-21 9290
89 기타 만나 이후, 11월14일 [1] 2004-11-14 9551
88 기타 자유로워지는 길, 11월7일 [1] 2004-11-07 9487
87 기타 공간, 울림, 하나님, 10월31일 [1] 2004-10-31 9559
86 기타 기다림의 이중성, 10월24일 [1] 2004-10-24 9861
85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353
84 기타 밥, 10월10일 [2] [1] 2004-10-10 9540
83 기타 예레미야의 역사의식, (10월3일) [2] [1] 2004-10-04 9544
82 기타 초대교회의 송영, (9월26일) [3] [1] 2004-09-26 9483
81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10115
80 기타 왜 헛것을 보는가? 9월12일 [2] [2] 2004-09-13 9387
79 기타 시나이 산에서 시온 산으로! 9월5일 [3] [2] 2004-09-06 9616
78 기타 평화를 위한 분열, 8월29일 [5] 2004-08-30 8679
77 기타 생존의 길로서의 순종 2004-08-22 9572
76 기타 모세의 소명, 2004.8.15. 2004-08-16 9882
75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3005
74 기타 말씀 망각의 심판, (8월1일) 2004-08-05 8806
73 기타 믿음과 사랑의 뿌리, 7월25일 2004-07-25 9543
72 기타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 2004-07-18 9826
71 기타 엘리야의 하나님 야훼여! [1] 2004-07-11 9807
70 기타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1] 2004-07-05 9523
69 기타 사랑이란 무엇인가? [1] 2004-07-02 15661
68 기타 메시아적 행위와 교회 [1] 2004-07-02 9576
67 기타 돌무더기에 얽힌 사연 [1] 2004-07-02 9857
66 기타 수행으로서의 신앙생활 [1] [1] 2004-07-02 8814
65 기타 무엇이 진실한 예배인가? [1] 2004-07-02 9934
64 기타 노동하는 인간(2) [2] 2004-07-02 9209
63 기타 영광의 경험 [3] 2004-07-02 9563
62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10230
61 기타 노동하는 인간(1) 2004-07-02 9722
60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231
59 기타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힘 2004-07-02 12258
58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683
57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637
56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586
55 기타 세계의 토대 2004-07-02 12329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