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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의 길을 가자!

사순절 조회 수 13301 추천 수 98 2007.03.04 15:21:37
성경본문 : 누가복음 13:31-35 
2007.03.04. 눅 13:31-35
실패의 길을 가자!

십자가는 왜?
예수님의 일생은 아주 짧습니다. 겨우 33년입니다. 천수를 다 한 부처님이나 공자님에 비해서 형편없이 짧게 사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활동 영역도 아주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분이 자라신 곳은 가나안의 북서쪽에 있는 나사렛이라는 동네입니다. 그곳에서 북동쪽으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갈릴리 호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인접한 가버나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차츰 남쪽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사마리아를 거쳐서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까지 들어오셨습니다. 그곳에서 체포당하시고 재판을 받은 후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십자가에 처형당한 바로 그분을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당한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인간이 죄를 용서받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을까요? 스스로 택한 길인지, 아니면 타의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길인지요? 이런 질문을 왜 하느냐, 그냥 믿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예, 그냥 믿고 싶은 분들은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생각이 있는 분들이라면 질문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런 질문은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는 게 아니라 훨씬 깊은 곳으로 끌어들입니다.
다시 질문해봅시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반드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했을까요? 다른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할 수는 없었을까요? 예컨대 큰 능력으로 이 세상의 악을 싹쓸이했다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요?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무조건 따라간 것일까요? 십자가에 처형당하지 않고 오래 살면서 사람들을 도와주고 가르칠 생각을 없었을까요? 신약성서는 이런 질문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성서기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부활의 빛이라는 신앙의 차원에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아주 드믄 경우지만 이에 관한 약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오늘 본문이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1절 말씀에 따르면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복음서는 일반적으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예수님과 적대적인 사람들로 그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우호적인 것으로 나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라고 해서 우리가 도매금으로 매도할 수는 없겠지요. 그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실제로 보호하고 싶어 한 이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그들이 예수님과 헤로데의 관계를 나쁘게 만들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그들은 헤로데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었을지 모릅니다. 헤로데로서는 지역사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게 중요했습니다. 그가 바리사이파 몇 사람을 예수에게 보내서 “까불면 재미없어!” 하는 식으로 겁을 주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이 헤로데는 누가복음에 몇 번 등장합니다. 9:7-9절에서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매우 불안해했습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예언자 중의 하나가 아닌가하고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헤로데가 목 베어 죽인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니 그런 소문을 듣고 불안하지 않을 수 는 없었겠지요. 헤로데는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 번 더 등장합니다. 체포당하신 예수님이 유대 법정인 산헤드린을 거쳐, 로마 총독 빌라도의 심문을 받은 다음, 헤로데에게 넘겨집니다. 예수님이 헤로데의 관할 지역인 갈릴리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빌라도가 마침 그때 예루살렘에 와 있던 헤로데의 자문을 얻기 위해서 보낸 것입니다. 누가는 헤로데가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 했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끌어내지 못한 헤로데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화려한 옷을 입혀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23:6-12) 어떻게 보면 헤로데와 예수님은 악연이라면 악연입니다. 헤로데도 왕이고 예수님도 왕입니다. 헤로데는 정치적인 왕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왕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까 가능한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게 좋다는 몇몇 바라사이파 사람들의 충고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은 헤로데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그 사실을 전하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율법을 훼손하는 예수님이 짜증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지주일 뿐만 아니라 모든 정체, 경제, 사회의 핵심인 성전을 상대화하는 예수님을 더 두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빌라도도 역시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빌라도가 주변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수님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로마의 최고위급 정치인인 빌라도가 그런 압력에 의해서 정치적인 오점을 남길 사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 하나님 나라가 기본적으로 로마 제국의 평화에 지장을 받는다고 판단했겠지요.
이스라엘의 민중들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한때는 예수님을 구름떼처럼 따르던 민중들도 자신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는 없었습니다. 당장 세금을 내려주거나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성취해주는 일들이 아니라 하늘로부터의 생명을 말씀하는 예수님에게 그들이 계속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눅 9:58) 단순한 감정적인 호소가 아니라 그가 처한 구체적인 실존을 가리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현재와 같은 예루살렘의 종교, 정치 체제 안에서 버텨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위기 앞에서 예수님은 무언가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바로 그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예루살렘 체제와 ‘맞짱’을 뜨냐, 아니면 현실을 인정하고 은둔 하냐, 하는 선택의 강요입니다.

내 길을 가야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를 쫓아내며 병을 고쳐주고 사흘째 되는 날이면 내 일을 마친다.’ 하고 전하여라.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32,33절)
이 말씀은 조금 복잡합니다. 오늘과 내일, 사흘째라는 표현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32절과 33절 사이에 약간의 모순도 보입니다. 32절에 의하면 오늘과 내일 사람들을 고치고 사흘째 모든 일이 끝나게 되는데, 33절에 의하면 오늘과 내일,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계속해서 일이 진행됩니다. 전자는 예수님의 일이 완료되는 것으로, 후자는 지속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 두 문장은 대립이 아니라 상호보완이고 일치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감당해야 할 몫은 끝나지만 하나님의 개입으로 그 일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이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으로부터 인류 구원의 길을 내셨고, 그 일은 계속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감당한 몫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체제가 먹구름처럼 예수님의 삶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충고와 위협이 그 단적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축귀와 치병은 예수님의 메시아 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메시아의 나라는 악한 영이 쫓겨나고 인간을 억눌렀던 모든 체제가 제거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살해 위협 가운데서도 자신의 길을 그대로 가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성서가 표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만 본다면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니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마땅히 십자가를 지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세요. 지금 우리는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믿고 있지만 원래의 십자가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은 가장 부끄러운 죽음을 당한 사람입니다. 반로마, 반정부, 반사회적인 중범죄인들에게만 적용되는 사형법입니다. 예수님이 그걸 스스로 원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던 날 저녁에 기도하시면서 가능하면 이런 운명을 피하게 해달라고 했으며, 다음날 십자가에 달린 채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절규했습니다. 만약 십자가 처형이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다면 왜 예수님이 그런 기도를 드리고, 그런 소리를 외쳤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런 기도를 드린 것은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신앙이나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마당에 예수님이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기도를 드릴 리가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한 회의와 불안이 훨씬 근본적이었습니다. 민중들을 가르치고, 병을 고치고, 악한 영을 쫓아냈지만 그들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늘 그 모양 그대로입니다. 자신의 무능력만 확인될 뿐입니다. 더구나 자신을 없애버려야겠다는 소문이 강하게 들리는 걸 보면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자칫 이런 방식으로 무조건 앞으로 나가다가는 개죽음을 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왜 단 한순간만이라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니 한 순간이 아니라 그의 공생애 3년 동안 이런 생각을 계속하지 않았을까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걱정하던 대로 예수님은 결국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 모두가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예수님은 무기력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민중을 선동해서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었고, 그들을 계몽해서 내면의 변화를 일으킬 수도 없었고, 더구나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을 설득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나사렛 목수 출신 예수를 간단하게 처리한 예루살렘의 성전 지도자들이 완벽한 승리자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것은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총본산인 예루살렘과 성전이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반대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여기에 무슨 흑막이 숨어 있는 걸까요? 여러분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이상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가장 종교적인 도시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의 성지입니다. 그들은 가장 경건하고 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들을 계속했습니다. 34절에 의하면 예언자의 도시가 예언자들을 박해합니다. 이게 인류 역사이기도 합니다. 급기야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합니다.
예루살렘과 맞설 힘이 없었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한다.” 무슨 뜻입니까? 끊임없이 예언자들을 박해하던 예루살렘과의 싸움에서 실패할 것을 알았지만 예수님은 그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곧 그가 “실패를 향하여!” 길을 갔다는 뜻입니다. 메시아의 길은 곧 그렇습니다. 악한 영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뀐 것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것 때문에 십자가 처형이 현실로 다가왔지만 예수님은 그 길로 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완전한 신뢰이며, 순종이었습니다. 그런 신뢰와 순종의 결과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하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실패의 길을 가신 예수님은 이제 참된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메시아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를 믿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말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생명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미 앞서 그런 길을 가셨던 주님이 여러분을 돕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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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March 04, 2007
*.150.83.68

실패냐 과정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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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無名齋

March 04, 2007
*.6.213.211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상의 윤곽이 한층 더 입체적으로 도드라져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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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박상열

March 04, 2007
*.139.176.131

예수님이 도우신다니...
두렵지 않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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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솔나무

March 05, 2007
*.108.254.24

2월 23일 후배가 섬기는 교회에서 고등부의 모임이 있어서 대화식의 강의(모임)가 있었습니다.
후배는 그 교회 고등부 부감이였고...저 역시 저의 교회 교육부총무로 같은 방향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화내용 인즉,
1.예수님은 여인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순간 33년후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정해진 일인가?
2. 십자가에서 죽으실때 3일만에 부활하실것을 알고 죽으셨으까?
의 질문을 던지며 나누었던 대화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전도사님 이하 많은 교사들의 일관적이 대답은, 당연히 십자가에 죽으려고 오셨고, 부활을 알고 죽으셨다고
이야기 하며 저를 보는눈은 흡사 이단, 사이비 전도자로 보는 상황이였답니다.
어떤교사는 어떠한들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하더라고요. 바로 그 예수를 믿으면 되는것아니냐고...
고등부 학생들에게 그런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냐는 질문에 당연히 그렇게 가르킨다고 하네요.
과거의 역사이기에 꼭 그렇게 되어졌을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겠죠.
저희들이 그런 교육에 틀 속에서 배워왔기에
생각을 넘어 질문하는 것 조차 두려워하는 현실 교회의 상황에 엄청 암담함을 느끼는 순간이였습니다.
당연히 신학생도 아닌 평신도가 이끌어가는 대화에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니 참 감사하네요.
이런 이야기는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도 한동안 어려움 이야기였으나,
그래도 제 또래의 모임에서는 자주 이런 방향의 이야기를 나누며 틀 깨기 작업을 천천히 하고 있습니다.
이젠 제법 귀 기울여 듣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관련있는 책들을 보아가면서 점점 맥이 잡혀가니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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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균형

March 05, 2007
*.96.174.252

미처 채득하지 못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시는 설교였습니다.
그럼에도 비평적인 시각을 조금 더해 보려 합니다.
의문은, 이러한 견해를 입증하는 과정에 인용되고 나아가 이를 근거로 결론으로 유도하는 수순 입니다.

“오늘 우리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을까요? 스스로 택한 길인지, 아니면 타의에 의한 어쩔 수 없는 길인지요?” 신앙의 심화를 위해 필요한 질문이라 하시면서,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어쩔 수 없는 길이었고, 비록 타인의 강요 였지만 그 길을 용감히 가셨다. 그러니 비록 가시적으로 실페라고 보이는 길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결론 맺으시네요.

십자가의 길이 수동적이었음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보이셨던 갈등을 근거로 활용하시고요.
그럼요. 당시 십자가는 실패와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 오르셨다는 이유만으로 그분이 지신 십자가가 수동적인 필연이라고 판정할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통전적인 시각인지? 아니면 편리한 차용인지 분별해 보자는 의도입니다.

자발적인 순종과 불 가피 하기에 실은 내심 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끌려갔던 것이었다고 하신 다면, 그분의 탄생과 생전에 보여주셨던 말씀과 여러 표적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하겠지요. 일관성을 유지 한다는 축면에서요. 물론 인간이 정해서 말하는 그 일관성마저 초월하신다는 의미이시라면 동의 합니다. 그럼에도 혹시 그저 ‘인간 예수’라는 신학의 견해를 가지고 계신 것인지 이 기회를 통해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평소에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을 지적하시면서, 성경은 시적 언어이며 상징임을 주장하시다가 유독 겟세마네 동산에서 언급하신 주님의 심정을 굳이 문자적으로 해석하시는 이유역시 궁금합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스스로 원하셔서 지신 것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지신 것인가의 문제를 해명하기에는 아직 목 마름을 느낍니다.
그래서 보충 설명을 부탁 드리는 것이지요.
여러가지 일로 바쁘신줄 알면서 질문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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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06, 2007
*.150.14.64

균형 님,
여러 가지를 말씀해서 정리하기가 조금 힘들군요.
겟세마네의 기도와 가상칠언의 한 마디를 제가 인용했는데,
그것이 문하적 해석 운운과 어떻게 연결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연결이 될 수는 있지만 핵심은 아니고,
설명도 복잡하니까 접어두지요.
대신 결론적으로 주신 말씀만 짚지요.
십자가 사건의 자발성 문제이지요?
이런 거 설명하려면 계시론과 성서론, 언어와 역사 등등의 문제들을
모두 끌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도 접어두구요.
이렇게만 말해야겠군요.
성서는 기본적으로 해석사건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인류 구원의 길로 해석된 겁니다.
실체는 없고 해석만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체는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는 거지,
처음부터 일목요연하게 주어지는 건 아닙니다.
이런 쪽으로 말하면 길어지니니까,
다시 예수님의 십자가 자발성에만 초점을 맞추죠.
제 생각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식했습니다.
그 죽음이 하나님의 뜻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인류 구원의 길이라고 확신한 것은 아닙니다.
도대체가 그건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는 거니까요.
예수님은 일부러 십자가의 죽음을 목표로 한 건 아니지만
자기의 운명을 피하지도 않으셨지요.
예수님에게 중요한 건 십자가로 죽느냐가 아니라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의 통치에 일치한 분이셨던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지요.
이런 역사에 무슨 힘이 작용했을까요?
여기서 예수님의 의지는 얼마나 작용했을까요?
그의 메시야 인식은 얼마나 확고했을까요?
너무 많은 생각할 거리가 놓여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학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종말에 모든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기 전까지 우리는 이런 사유의 길을 가야합니다.
그런 과정이 바로 그분이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지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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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김민욱

March 06, 2007
*.180.151.122

감동. 용기를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profile

[레벨:0]임승한

March 08, 2007
*.248.182.185

제 인생에도 뭐 하나 딱 정해진 것은 없겠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길을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주어진 길을 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정말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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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March 18, 2007
*.247.199.210

교수님의 설교 본문에 대한 제의견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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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기본적으로 해석사건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인류 구원의 길로 해석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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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십자가 사건이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해 구원의 길로
해석된 것이다."라는 교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좀더 명확히
했으면 합니다.

교수님 말씀은 그것은 초기기독교인들의 해석일 뿐이지 "진리"
의 영역은 아니다 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 처럼 느껴
지기 때문 입니다.

하나만 여쭈어 봅니다.

"예수 십자가 사건이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다"라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해석이 진리라 생각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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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예수님의 십자가 자발성에만 초점을 맞추죠.
제 생각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식했습니다.
그 죽음이 하나님의 뜻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인류 구원의 길이라고 확신한 것은 아닙니다.
도대체가 그건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는 거니까요.
예수님은 일부러 십자가의 죽음을 목표로 한 건 아니지만
자기의 운명을 피하지도 않으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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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교수님의 위와 같은 주장이 객관적이며 신뢰성 있는 최소한의
근거를 가지고 하시는 말씀 이신가요? 아니면 교수님의 생각에 그렇다고
특별한 근거는 없지만 추론 하시는 것 인가요?

저는 교수님의 본 설교를 읽으며 예수님의 입장과 시대 상황을 고려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상 가장 중요한 예수의 사상과 삶을 내면을 평가 할때
는 정작 21세기를 살아가는 교수님의 철학과 삶의 잦대로 추론하고 있다고
느껴 집니다.

예수는 2000여년전의 사람이며 그 모든 지식과 철학과 사상의 근원과 뿌리가
"구약성서"에 있는 사람임을 간과하고 있다는 말씀 입니다.

지금 논제가 되고 있는 "십자가의 자발성"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또한 그러 합니다.

교수님의 교수님의 성정과 철학과 가치관을 가지고 예수의 죽음이 "자발성"이 있을리
없고 또한 "자신의 죽음이 인류를 구원의 길이라는 확신은 없다"라는 교수님의
주장은 합리성과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정신세계의 기초를 이루는 구약성서는 정용섭 교수님의
주장과는 상반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구약성서는 "메시아"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인류를 그 죄에서 구원할
분으로 창세기로 부터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음을 교수님께서 모르시지는
않으시리라 봅니다.

예수는 구약성서에서 죽음으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를 보았으며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삶대로 일점 일획도 어기지않고 살아가셧고
그 삶의 끝에 구약에 약속된 부활을 확신하고 지셨던 짐이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가 자발적인가?"

그 답은 저는 당연히 "그렇다"라고 생각하며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 생각 했는가?"

라는 질문의 답 또한 당연히 "그렇다" 입니다.

적어도 저는 예수라는 정년이 저 보다는 훨씬더 구약에 능통하였으며
저보다 구약을 잘 아시는 분이 메시아의 죽음에 관한 예언을 모를리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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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중에 누가 생각 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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