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없이 성경읽기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1)  / 요나서 3: 10- 4:11

먼저 정용섭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연인즉, 여호수아서에 등장하는 여리고성과 아이성의 거민을 진멸한 기사에 대하여 오래 전부터 의문을 품어왔습니다. 과연 그 기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호수아서를 아무리 읽어보아도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그런 일에 개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그 성의 거민들을 진멸하라 하셨다고 비난 받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누구도 그런 비난에 대하여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해보려고 하던 차에, 정목사님의 책 <설교란 무엇인가>를 읽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정목사님은 “본문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야훼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이런 명령을 내리셨다는 단서가 없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야훼 하나님은 단지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겠다는 약속만 하셨을 뿐이다.(여 6:2) 구체적인 전쟁 방법은 뛰어난 전략가인 여호수아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고 말씀하시어, 나의 오래된 의문에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그 글에 힘입어 이 글을 쓰게 되었으니, 정목사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성경은 왜 일관성이 없는가?

그런데 성경에 보면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진멸하는 잔인한 장면도 등장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요나서의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욘 4:10-11)

그러니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약 3:11)고 가르치는 성경에서 두가지 다른 모습의 하나님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짐승조차도 살리시는 하나님이시고 다른 데에서는 세상에, 어린 아이들까지도 죽이는 하나님이라니!!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하나님은 전쟁을 좋아하시는가?

여호수아의 여리고성 거민 진멸사건 때문에 하나님은 전쟁을 좋아하는 신이요, 믿지 않는 사람들을 진멸하신다는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신약의 하나님과 구약의 하나님은 다르다, 또 예수님은 믿고 싶은데, 하나님이 싫다고 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요나서와 여호수아서에 등장하는 하나님이 서로 다르게 보이는 난처한 상황이 발생했으니,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성경이 일관성이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게 여겨지니, 무언가 잘 못된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잘 못 알고 있거나 이해를 잘 못하고 있다거나, 말입니다. 이런 경우 두 가지 상황을 다 살펴보면서 무엇이 그리 만들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할 것입니다.

원수니까 사랑하지 못하는 요나.

먼저 요나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나는 참 특별난 사람입니다. 사람이 참으로 별납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하나님에게 순종할만도 한데 하나님의 말씀에 부득부득 우겨가면서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나서 1장부터 그런 일이 발생합니다. 요나서 1장 2절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요나를 보내려 하신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로 알려진 도시입니다. 유대인들은 북왕국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앗수르를 원수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곳인 니느웨로 가라고 부름을 받아서인지, 요나는 시종일관 하나님의 말씀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 반대의 길로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욘 1:3-4)

요나는 그렇게 도망을 가다가 풍랑을 만나게 되고, 결국 바다속으로 던져지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요나를 통한 계획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바다 가운데 큰 고기로 요나를 삼키게 해서 살려, 결국 하나님은 요나를 다시 니느웨로 보내십니다.

끈질긴 하나님 - 끈질긴 요나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요나를 다시 원래 계획하신 그 길로 보냅니다. 그런데 요나의 행동을 보십시오. 그만큼 했으면, 이제 하나님의 뜻을 알만도 한데, 요나 역시 끈질깁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욘 3:1-5)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도망을 치다가 잡혀와 다시 그 말씀을 전하러 가긴 갔는데, 이번에는 그 하는 행동이 묘합니다. 이번에는 차마 도망을 치지는 못하고 요나는 꾀를 냅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욘 3:3)

니느웨라는 도시가 어느 정도 크기인가? 다 다니려면 사흘 정도를 걸어야 되는 크기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 절에 보면 이상한 말이 나옵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한국어 성경에는 ‘하루 동안’ 이라고 해서 사흘 걸려야 돌아볼 만한 크기의 성읍을 불과 하루만 다닌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둘러싸고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 견해는 사흘 걸어 다녀야 되는 그 도시를 하루 만에 다 해치웠다. 그러니까 서울시로 바꿔 말하자면, 서울을 다 돌아보려면 사흘 걸린다고 가정을 하고, 하루 동안 다녔다는 것은 서울시 전체를 다녔는데, 강남과 강북 모두 다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흘 걸려 다닐 길을 하룻만에 다녔으니, 그저 설렁설렁하게 다녔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에 의하자면, 요나는 주마간산 (走馬看山)식으로 이것저것 자세히 살펴볼 틈도 없이 대강대강 훑어보고 지나친 것이 됩니다.

또 하루 동안만 다녔다는 말의 다른 해석은 하루에 다닐 정도의 길만 다녔다는 것이지요. 서울로 말하자면 강남과 강북 모두 다니려면 사흘 길인데, 거기를 모두 다니지 않고 그 중에서 강남만 그 중에서도 서초구, 강남구만 다녔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두가지 해석이 있는데, 생각하기에는 요나의 그때까지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사흘 되는 거리를 하루 동안에 다 다닌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얼마나 급하게 빨리 걸어다녀야 하겠습니까? 요나는 그런 수고조차 하지 않으려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흘 거리 되는 도시를 그저 ‘일부분만’, ‘하루 동안’, ‘쉬엄쉬엄’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hen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Jonah a second time: "Go to the great city of Nineveh and proclaim to it the message I give you."
Jonah obeyed the word of the LORD and went to Nineveh. Now Nineveh was a very important city--a visit required three days.
On the first day, Jonah started into the city. He proclaimed: "Forty more days and Nineveh will be overturned."

“첫 째날에 요나가 .......”
그런데 성경에는 첫 째날만 등장하지, 둘째 날(second day), 셋째 날(third day)가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첫 째날 말씀을 전했다는 구절 바로 다음에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말씀을 전하는데 둘째 날, 셋째 날이 필요 없었다는 말이지요. 다시 서울시 이야기로 돌려보면, 서울 시내로 들어와 첫날째 하나님 말씀을 전하자 마자, 그러니 둘째날, 셋째날은 고사하고 첫날에 말씀을 전하자마자, 백성들이 회개했다는 것이지요

요나는 끝까지 니느웨의 멸망을 원했다

그렇게 하루 동안만 말씀을 전했는데, 그렇다면 그 내용은 어떠했을까요? 요나가 니느웨 성에 전한 메시지는 아주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

요나서 1장에서 니느웨 성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가 니느웨 성의 회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앙을 선언하시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니느웨 성이 악에서 떠나기를 바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는 분명 니느웨 성의 회복인데, 요나는 이때 멸망만을 거론합니다. 만일 요나가 하나님의 마음을 맞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면, 멸망에 대한 선언과 함께 회개에 대한 요구를 같이 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요나가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사역을 했다는 것이 분명해 집니다. 그런데 욘 3:4에 등장하는 요나의 메시지에는 그런 부분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회개에 대한 요구가 없는 것입니다. 멸망 선언은 아주 분명하지만, 회개에 대한 촉구는 생략되어 있을뿐더러 그 내용도 냉정한 어투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렇게 요나의 행동이 시간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불성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들은 니느웨 백성들이 모두다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가급적이면 그 말씀이 백성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그 결과 회개하지 않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모두다 멸망하기를 바랐는데, 그래서 말씀 전한다고 하면서 한국어 번역에 의하면 설렁설렁 그저 적당히 말씀을 전했지만 - 영어 번역에 의하면 그 첫날 말씀을 전하자마자 - 그 말씀을 들은 백성들이 회개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런 구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전할지라도 결과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공을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한 것이 실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 요나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요나를 잡으러 다니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바다로, 고래 속으로, 등등. 그리고 또 다시 보냈더니, 그 하는 행동이라니!! 기가 막힐 정도이지요. 하여튼 요나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의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통하여 니느웨 백성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서 전체를 살펴볼 때에, 하나님과 요나 사이에는 다른 선지자의 경우처럼 우호적인 분위기가 보이지 않고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듣는 자 사이에 평온한 분위기가 아니라, 무언가 어긋나 있는 그래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조마조마하게 느껴지는 분위기가 엿보입니다.

그런 결과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불편한 대화가 오고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3장 10절과 4장 1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요나가 싫어하고 성을 내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지자만, 그게 바로 요나의 본심입니다. 싫다. 니느웨 백성들이 구원받아 살아나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리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러한 요나의 처지에는 아랑곳 하시지 않고 하나님은 니느웨에 있는 사람들을 어린이로부터 어른까지 다 살려 주십니다. 그러면서 요나에게 하나님의 심정을 말씀해 주시는데, 4장 10-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려고 애를 쓰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을 살리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들은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듣지 않거나 그런 말씀을 왜곡하거나 반절만 전해서 하나님이 안타까워 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요나서 전체의 요지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한 명이라도 살리려고 애를 쓰시고, 그래서 사람을 통하여 그 일을 하시는데 정작 하나님의 그런 뜻을 받들어야 할 사람은 어떤가? 하나님의 뜻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요나서에서는 자기 나라와 원수지간인 나라 사람들이니까 오히려 죽으면 좋겠다 해서 하나님의 뜻을 축소해서 그것도 지연시켜 전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게 하시는 분이신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그 악독이 상달되었다고 평가된 니느웨 백성들도 아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을 진멸하신다 여겨지게 만든 것은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오해하게 만들었습니다. 요나서에서 본 것처럼 요나가 끈질기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하나님 말씀을 들고 선 사람들의 잘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는 자들은 깊은 반성을 해야 할 것이지만, 그래도 감사한 것은 요나서에서 본 것처럼 사흘 걸어가면서 말씀을 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억지춘향격으로 하룻길 만을 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해 내십니다. 요나의 불성실한 하룻길, 그것만으로도 니느웨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을 회개시키고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구원해 내신 것처럼, 그러한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기에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서에는 요나서의 내용과는 영 다른 하나님이 등장하니, 어찌 된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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