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읽기

강청기도라니요? 이의 있습니다. / 눅 18: 1-8

이 본문에 관한 여러 해석을 들어보셨을 줄로 압니다. 그 중에서도 강청기도, 또는 간청기도의 틀로 해석하는 것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강청하는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은 들어주실 것이다.
왜? 본문 중의 재판장이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그렇게 간청하는 기도를 드리면 귀찮아서라도 들어주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이 귀찮아 하실 정도로 기도하자’는 식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름하여 ‘간청기도’, 또는 ‘강청기도’의 틀에서 이 본문을 이해합니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책들도 이미 한바탕 교계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강청기도의 능력> 등등.

하나님과 재판장을 단순 비교하는 것이 옳은가?

과연 이 본문이 강청기도를 가르치는 것이라 해도 될까요?
강청기도를 말하는 것이라 한다면, 과연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도를 ‘번거로워서’ 들어주시는 것일까요? 또 우리가 하나님을 번거롭게 해 드리도록 열심히 기도하면 그 기도는 ‘능력’이 있는 기도가 되는 것일까요? 과연 그러한지, 본문을 따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내용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재판장과 하나님을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재판장은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었고, 하나님도 재판장이 과부의 간청을 들어준 것처럼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간청에 응답을 하는 공통점이 있기에 하나님과 재판장을 여러 각도로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2절, 4절) 불의한 재판장이었습니다.

그럼 이 비유에서 재판장의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과부는 어떤 사람일까요?
고아와 과부는 의탁할 곳이 없고 무력한 자의 표본으로, 이러한 자들을 보호하라는 말씀이 반복되어 나타나는데(출22:22;신10:18) 바로 이러한 과부가 재판장에게 가서 자기의 사정을 하소연합니다. 그런데 과부가 찾아가서 하소연하는 재판장이 하필이면 불의한 사람인지라, 하나님을 경외치 않으며 또한 사람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러길래 그는 과부같이 힘없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그들의 권리에 대하여 무관심합니다.
따라서 그 과부가 재판장에게 가서 간청하고 강청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재판장이 불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재판장은 불의한 사람이며, 그런 사람이기에 과부의 사정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런 재판장이 과부가 끈질기게 찾아가 재판장을 귀찮게 하니까, 소원을 들어주지 않다가 마지 못해 결국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판장을 한 축으로 놓고 이제 하나님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비교해 볼 포인트는 억울한 사람들이 하소연하는 것을 어떻게 들어주는가 하는 점입니다.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그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는데, 그 과부의 간청을 합리적으로 따져보았다거나 정의를 세울 목적이 있었다거나 긍휼한 마음으로 그 사건을 살펴보았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람을 무시한다는 그 표현이 딱 맞는 사람입니다. 그가 자기에게 맡겨진 과부의 송사를 처리하는 것을 보니 그 여자의 소원을 들어줄 마음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다만 그 여자가 매일 찾아와서 귀찮게 하니까 마지 못해서, 어쩔 수 없으니 들어준 것입니다.

그런 재판장이니 굳이 하나님과 비교할 필요도, 가치도 없지만 간청을 들어준다는 차원에서 동일한 점이 있으니 그래도 하나님을 살펴보십시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묘사도 해 놓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그런 과부처럼 억울한 사람의 간청을 들으신다면 어떻게 처리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처리해 주신다는 말씀인가요?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 18:7-8)

밑줄을 그어야 할 부분은 “오래 참으시겠느냐”와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입니다.
따라서 재판장과 하나님은 이 경우에서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재판장은 그 과부의 소원을 애초에 들어주지 않았으며, 들어줄 의향도 없었습니다. 아마 과부가 끈질기게 찾아가서 “번거롭게’ 하지 않았으면 아마 그 소원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번거롭게 할 필요도 없거니와 하나님은 ‘속히” 그리고 “오래 참지 않으시고”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주안점

따라서 본문은 먼저 과부를 내세워서, 재판장이 불의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면서 불의한 재판장이니까 과부의 소원을 더디 들어주었고, 그리고 마지 못해 들어주는 모습을 보여준 다음에, 하나님과 재판장을 비교하여, 재판장은 그렇게 더디게 또한 마지 못해 들어주지만 하나님은 어디 그런 상황에서 그만 두고 보시기만 하시겠느냐, 그럴 리 없다. 하나님은 속히 처리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판장과 하나님을 비교해 본 이유는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히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주안점이 끈질기게 귀찮게 할 정도의 기도에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억울한 그 사정을 ‘속히’ 들어주시는 하나님에 중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떼를 써야만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다, 라는 것을 본문은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본 비유가 8절 후반부에 제시되는 것처럼 종말론적 주제와 관련되어 있음을 생각할 때 이 말씀은 악하고 음란한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끝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뜻으로 이해되는데, 그러자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올바르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길래, 이 본문의 성격을 더더욱 확실히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용주의적 접근이 화근

이제 본격적으로 본문의 성격을 생각해 볼 텐데, 과연 이 본문이 간청기도, 강청기도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재판장이 그 과부의 간청을 들어준 것은 분명 맞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본문을 강청기도, 즉 떼를 쓰듯이 기도하면 재판장이 들어주었듯이 하나님도 들어주신다는 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문을 사람측면에서 읽다 보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기도 응답받기를 원하니까, 간청해서 떼를 써서라도 하나님이 들어주시기만 한다면, 자기 마음이 흡족할 테니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싶은 것입니다. 기도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 있을까? 본문에 그 과부가 끈질기게 기도했다는데, 그래서 그 억울함을 풀었다는데, 그처럼 떼를 쓰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식의 실용적인 사고방식으로 이 본문을 해석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하물며’가 가져온 문제점

그런데 그렇게 오해하도록 만든 문제의 단어가 있는데, 바로 7절의 ‘하물며’라는 말입니다. ‘하물며’라는 말의 쓰임새에 주의할 점이 많습니다.
 
‘하물며’라는 말은 ‘더군다나’의 뜻을 가진 접속 부사로, 앞의 사실과 비교하여 뒤의 사실에 더 강한 긍정을 나타내는 문맥에서 쓰입니다. 또한 이 말은 ‘하물며~도’라는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뒤에 오는 말은 추가, 부가의 의미로 쓰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우리 말 중에서 참으로 어려운 말입니다. 잘못 쓰는 경우가 더 많은데, 먼저 문장을 만들어서 검토해봅시다

“그렇게 버릇이 없는 사람들도 어른을 만나면 인사를 하거늘, 하물며 나같이 버릇이 좋은 사람이 인사를 하지 않을까?”

문장의 분석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문장 구성성분을 구분하여 기호를 붙여봅니다.

“(A) 그렇게 버릇이 없는 사람들도 어른을 만나면 (B) 인사를 하거늘, 하물며 (a) 나같이 버릇이 좋은 사람이 (b) 인사를 하지 않을까?”

여기에서 A 와 a, 그리고 B 와 b는 상응합니다.
우리 말의 바른 용법에 의하면, ‘하물며’라는 말을 접속어로 사용할 때에 앞의 문장(A-B)은 긍정적이어야 하는데, 뒤의 문장에서 비교되는 행동(b)이 앞에서 긍정적(B)이면 됩니다.
즉 버릇이 없는 (A-부정적인) 사람도 (B-긍정적으로 취급되는) 인사를 했다. 그러니 나같이 버릇이 좋은 사람(a)이 인사를 하는 것(b)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물며’라는 말 앞의 문장에 들어있는 모든 내용을 모두 긍정적으로 이해를 하는 식으로 ‘하물며’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흔히 실수하는 것이, ‘하물며’라는 접속어로 연결된 두 개의 문장에서 앞 문장에서 뒷 문장에서 대비되는 행동(B)은 당연히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또한 뒤에 따르는 문장(a-b)의 내용도 앞의 말과 같은 정도의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흔히들 우리는 그런 개념없이, ‘하물며’라는 단어를 아무렇게나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7절, 8절의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요약하여 문장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A) 불의한 재판장이 (B) 과부의 소원을 번거롭게 하니까 할 수 없이 들어주었다, 하물며 (a) 하나님께서 (b)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

즉, 앞 문장에서 거론된 재판장의 행동(B)이 긍정적이라는 전제하에서 다음 말들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물며’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재판장이 과부의 소원을 들어준 행동을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를 해야만 합니다.

‘재판장이 과부의 소원을 들어준 것을 봐라, 그러면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재판장이 그 과부의 소원을 들어준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재판장의 속마음 - 계속해서 찾아와 번거롭게 하면 귀찮아서 – 도 ‘하물며’라는 말 때문에 긍정적인 색깔이 덧칠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말이 긍정적으로 판단이 되고 거기에 걸맞게 뒤의 문장, 하나님에게 떼를 쓰면서까지 간청하면, 강청하면 들어주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재판장의 행동과 하나님의 경우, 그 차이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재판장은 불의하니까, 불의한 사람이니까 그 과부가 찾아가고 또 찾아가 간청을 했지만 이런 상황을 똑 같이 하나님에게 적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한글 개정개역본 성경의 문제점입니다.
개역본에서 ‘하물며’라는 말을 사용했었는데, 그 개역본을 개정하면서 그 부분에 대한 심도 있는 검토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그대로 두는 바람에 결국 이런 문제가 생긴 것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 번역위원들이 이 본문을 강청기도의 사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꾸준히 떼를 쓰듯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재판장이 한 것처럼 들어주지 않겠느냐, 고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 ‘하물며’라는 말을 넣어 번역한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번역 예컨대 새번역에서는 ‘하물며’라는 단어를 빼고 번역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공동번역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물며’라는 말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이 고약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내버려두실 것 같으냐?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아까 본문을 검토하면서 재판장과 하나님을 비교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둘은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물며’라는 말로 인해서 하나님과 불의한 재판장이 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리해 보자면,본문 전반부에서 우리는 강력한 이미지 하나를 품게 됩니다.
불의한 재판장,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 과부가 자주 가서 간청하니까, 그런 사악한 재판장이 마지 못해서, 귀찮아서 들어준다는 아주 강력한 예를 들은 다음에 ‘하물며’라는 말이 나오니, 그런 사악한 사람도 그러는데 하물며 하나님도 우리가 떼를 쓰면 들어주시지 않겠는가? 바로 ‘떼를 쓴다”는 데에, 이 본문의 모든 강조점이 있는 것처럼 오해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혀 불의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재판장과 그 과부의 그런 관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재판장과 과부의 관계처럼 인식이 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아버지와 떼 쓰는 아들

그런데 본문을 읽으면서 별로 주의를 하지 않고 지나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1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예수님은 재판장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이미 그 비유의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라, 그리고 낙심하지 말아라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그 이유는 뭐냐? 바로 7절과 8절에 이미 나와 있지요.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요. 게다가 그 소원도 속히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여기 본문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떼를 쓰는 기도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도를 속히 들어주시는 분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강청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어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다 들어주었습니다. 물론 한 두 가지는 들어주지 못한 것도 있었지요.
그런데 아들이 어느 날 친구와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빠는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다 해주시지는 않아. 몇가지는 안들어주셔”
친구가 말합니다.
“우리 아빠는 내가 떼를 쓰면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신단다. 너도 한번 떼를 써봐라”

그 날 저녁에 그 아이의 아버지가 퇴근해 오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아들이 말합니다. “나 무엇 무엇 사줘”
그런 아들의 말에 아버지가 막 대답을 하려는 순간, 그 잠깐 동안의 그 찰나를 참지 않고 아들이 떼를 쓰기 시작합니다. 울면서 방안을 뒹굴면서, “무엇 무엇 사줘” 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갑자기 떼를 쓰는 것이 의아했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 그래, 알았으니 떼 쓰지 마라” 하고 아들이 원하는 것을 선선히 해주었습니다. 그 뒤로도 그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오셨습니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물었습니다.
“너의 아빠는 너를 아주 사랑하지? 사랑하니까 네가 말하는 것은 다 들어주지?”
그 손자가 대답합니다. “몰라요, 아버지가 날 사랑하시는 줄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늘 떼를 써야만 내 소원을 들어주니까요. 내가 무엇을 요구할 때 말 한번만 해서는 들어주지 않아요. 울고 불고, 방바닥을 뒹굴며 떼를 써야 들어주신다니까요.”

어떻습니까? 이 예화가 강청기도라는 그릇된 허상을 잘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본문을 강청기도의 틀로 해석하는 것은 그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이상하게 만들어버렸듯이, 하나님을 오해하도록 만드는 잘못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를 ‘속히’ 들어주시는 하나님

본문은 결코 기도를 응답받기 위해서 강청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재판장에 대비하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 중에 그렇게 이해되는 것도 있기는 합니다. “그 밤낮 부르짖는”이란 말이 그렇게 이해도 되지만, 그 말은 우리의 기도하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이 본문을 사람들의 실용적인 측면에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장에서 바꿔본다면 주안점이 다르게 보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성도들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분이다. 이 세상 재판장은 불의해서 웬만한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으며 그냥 지나칠지라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속히’ 들어주신다. 그래서 이 본문을 강청기도의 본문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본문으로 읽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억울함을, 어려움을 풀어달라고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에 모른 채 하시며, 우리가 간청하고 강청하면 그제서야 들은 척, 하시면서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이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들의 아픔과 괴로움을 미리부터 아시고 우리들의 작은 아픔까지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 재판장은 그냥 지나칠지라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로 들었던 아들과 아버지의 경우처럼, 하나님 아버지는 이미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시는데 그것이 떼를 써서 응답된 줄 알고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섭섭하시겠습니까? 성경을 바로 읽어 그런 하나님의 섭섭함을 풀어드리는 우리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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