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없이 성경읽기


일천번제, 그 신기루에서 벗어나라 / 왕상 3: 4-15


'일천번제 헌금'이라는 희한한 이름의 헌금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무려 일천 일 동안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솔로몬이 드렸다는 일천번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데, 솔로몬이 드렸다는 일천번제는 일천 번 번제를 드렸다는 말이 아니라 번제물로 드린 희생제물의 수가 일천 마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일천 번의 제사를 드린 것처럼 '일천 번제 헌금'을 하면 솔로몬이 받았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번역의 문제와 그것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일어난 오독의 문제가 겹쳐있는 문제의 구절입니다.


문제의 발단 - 잘못된 성경 번역의 문제


첫번째, 성경 번역의 문제입니다. 번역자들이 아무런 생각없이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같은 사건을 다룬 기사가 나오면, 앞 뒤를 살펴보아 같은 뜻이면 같은 말로 일관되게 번역을 해야 하는데, 다르게 번역되어 있으니, 아무래도 번역을 할 때에 별 깊은 생각없이 해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열왕기상 3장 6절과 역대하 1장 6절에서, a thousand burnt offering 을 다르게 번역한 데에서, 생각없이 번역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열왕기상 3장 6절)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 제단에 솔로몬이 이르러 그 위에 천 마리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 (역대하 1장 6절)


‘천 마리 희생’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을 ‘일천 번제’라고 해 놓아, 번역자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문제의 발단 - 잘못된 해석의 문제


그렇게 ‘일천번제’라고 번역된 것을, 누군가 “일천번 제”라고 읽었고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리에 솔로몬이 받았던 수와 부의 복이 떠오른게 화근이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고 복을 받았으니, 그렇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헌금과 복을 연결시키려고 작정을 했겠지요. 이 구절에 등장하는 ‘일천번제’라는 말을 솔로몬의 축복과 연결시킨 그 놀라운 지혜, 그가 받은 지혜는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일까요?

그렇게 시작된 일천번제라는 기상천외한 헌금이 지금도 유효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니 참 안타깝습니다.

‘일천번제’란 말은 몇겹의 의미를 가지고 해석이 됩니다. .


첫째는 번(番), 몇번째 할 경우의 번(番)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일천번제를 ‘일천번(一千番), 제’로 오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에 해도 될 헌금을 일천번에 나누어 드리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음에 '번'을 ‘구울’ 번(燔)으로 이해합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드리던 다섯가지 제사중 하나로써, 제물을 태워 드리는 것이 바로 번제입니다. 솔로몬은 천 마리의 제물을 태워 번제를 드렸는데, 이제는 그대신 봉투에 현금을 넣어 번제라 칭하면서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열왕기상 3장 6절에 등장하는 ‘일천번제’라는 말은 어떤 때에는 “일천번(番), 제”로, 어떤 때에는 “일천, 번제(燔祭)”로 읽혀지면서 ‘솔로몬의 일천번제’로 자리매김을 했습니다. 복받기 원하는 그 심리를 이용한 그 약은 꾀에 모두다 넘어가고 만 것이지요.


사람의 욕심이 화근


성경은 여러나라 언어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위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일천번제'라는 개념은 우리 말 성경에서만 볼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의 의미여야 할 성경말씀이 이상하게도 유독 우리에게만 다르게 이해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나라 민족을 사랑하셔서, 특별히 일천번제를 허락하시고 솔로몬에게 주셨던 축복을 주시려고 하는 것일까요?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는 속담이 있는데  '일천번제 헌금'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생각이 납니다. 욕심에 눈이 멀어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하나님을 잘 못 이해하고 있으니 그 결말은 복은커녕 하나님을 욕보이는 것이지요.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그렇게 말해 주어도 사람들은 듣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 (딤후 4:1-4)는 때가 되었기에 그렇습니다.

일천번제 헌금이 비성경적인 것이라 말하자, 혹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설령 그게 틀려도 무슨 대수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에게 ‘정성’을 다해 드린다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오히려 더 기뻐하지 않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그런 헛된 정성을 기뻐하실까요? 우리들의 중심을 보시는(삼상 16:7) 하나님께서 번제를 빙자하여 욕심을 내어 복받으려는 그 마음을 모르실까요?

성경에서 정성이란 이렇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또 내 아들 솔로몬에게 정성된 마음을 주사 주의 계명과 권면과 율례를 지켜 이 모든 일을 행하게 하시고 내가 위하여 준비한 것으로 성전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라>(역대상 29:19)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정성은 ' 매일 밤 장독대에다 정화수를 떠 놓고 치성을 드렸다'는 식으로 옛날 어르신들, 우리 조상들이 정안수 떠놓고 치성드리는 그런 행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치성드림과 '일천번제 헌금'은 맥을 같이 합니다.

그렇게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는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이 허탄한 데 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응답하실리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려 하기 보다는 재물에 있음을 이미 간파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결코 그런 '일천번제 헌금'을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경홀히 여기는 사람들


하나님은 인간과 소통하는 방법인 제사에 대하여 그저 사람이 좋은대로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방법을 일일이 규정하여 주셨습니다. 레위기에 제사에 관한 규정이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절차, 방법을 다 지켜가면서 제사를 드려야만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 절차와 방법을 무시하고 ‘정성만 있으면 되지’ 라고 하면서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일천번제에 연연하시는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면서 레위기를 한번이라도 머리에 떠올린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하여 제사를 헛되이 드리다가 그 앞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있다는 성경의 기록을 읽어본 적은 있는지?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레위기 10장 1-2)

그처럼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에 합당할 때에만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진노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부인하는 일천번제


그래도, 이런 말들을 듣고서도, '일천번제 헌금'이 전혀 성경말씀에 합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듣고도, 일천번제 헌금을 ‘번제’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받아주시겠지 생각하며 드리는 사람은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 더 큰 문제를 야기합니다. 하나님에게 제사의 제물로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겠는가,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히브리서 10장을 자세히 읽어볼 일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18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니, 제사드릴 것이 없다는데도, 그런 것을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데도, 우리의 사소한 욕심, 솔로몬의 복을 받아 누리려는 그 욕심이 부득부득 우겨가면서 번제를 드리겠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사역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니 그 욕심 때문에 고귀한 주님의 사역을 부인해버린 그 작태에 어찌 통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금도끼 은도끼’, 그 속내를 들켜버린 욕심쟁이


그래도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겠다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못된 것이라 누차 외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해 왔습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서도, ‘일천번제’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 그래서 '일천번제 헌금'을 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솔로몬의 일천마리 번제를 일천번제로 억지로 해석해서 드린 다음에, 그야말로 가정에 가정을 더하여 하나님이 꿈 속에 나타나셔서 솔로몬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 하신다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요?

우리 옛날이야기에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음씨 착한 나무꾼과 욕심쟁이 나무꾼이 각각 연못에 도끼를 빠뜨린 후에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신령님은 욕심없는 나무꾼에게 금도끼와 은도끼까지 선물로 주고 다시 연못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욕심쟁이가 자신의 도끼를 일부러 연못에 빠뜨리고 우는 척을 했습니다. 그러자, 신령님이 나왔고, 욕심쟁이에게 울고 있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도끼를 연못에 빠뜨렸다는 욕심쟁이의 말에 신령님은 연못 속에 들어가 찾아주기로 했고, 잠시 뒤, 신령님은 연못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습니다

"이 금도끼가 너의 도끼가 맞느냐?"

"예! 그 금도끼가 제 도끼 맞습니다!"

"예끼! 이놈 어디서 거짓말을 하느냐!"

욕심쟁이의 거짓말에 화가 난 신령님은 연못속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욕심쟁이는 울면서 괜히 욕심부리다 도끼마저 잃어버린 자기자신에게 한탄을 했습니다>

솔로몬은 꿈속에서 하나님께 나라를 잘 다스릴 지혜를 달라고 간청을 했고, 그것을 가상하게 여기신 하나님이 그에게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신 것인데, 그것이 그대로 반복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 '일천번제 헌금'을 열심히 드린 후에 혹시라도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면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위의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에서 배운 것처럼 처음부터 금도끼를 자기 것이라고 한다면 안되는 것이니, 지혜를 주시옵소서(속으로는 이런 것을 건너뛰어 복과 재물을 주시기를 바라면서도)라고 해야만 할 것입니다.  맨 처음부터 하나님에게 그때 솔로몬에게 더하여 주신 부와 재물과 영광도 달라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이 그 분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이 구절이 일천번의 번제가 아닌 것을 깨닫게 되며, 성경의 구절을 결코 개인적인 이익과 욕심을 위하여 잘 못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럴 때에 진정으로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다면, ('일천번제 헌금'을 드리는) 그런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지 못한 것이니, 더하여 다른 축복은 말할 필요 없을 것입니다.



집어등 불빛에 달려드는 오징어


번역의 문제 그리고 그 생각없이 번역한 구절을 잘 못 이해한 결과 예수님의 귀한 사역을 송두리째 부정한 결과가 되어 버렸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욕심입니다. 인간의 욕심이 성경을 잘 못 보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까지 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오징어는 집어등의 불빛을 보고 달려듭니다. 그 불빛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달려듭니다. '일천번제 헌금'을 드려서 솔로몬의 복을 받겠다고 달려드는 오징어처럼, 우리들 또한 머리를 들이밀여 축복을 간구합니다.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닌’(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데, 밝게 비춘다고 모두다가  진리의 등불은 아닌데. 그런 데 좇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아닌가 냉철하게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시인 유하의 시 ‘오징어’는 적절한 충고가 될 것입니다.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그래도 감사한 일은 '일천번제 헌금'을 드려서 얻을(?)  솔로몬의 지혜보다 훨씬 쉽고도 바른 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하나님께 우리의 부족한 지혜를 채워주십사 간구하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것이 바른 진리인지를 알게 되는 복된 지혜를 주시기를, 그래서 '일천번제 헌금'은 다만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야고보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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