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없이 성경읽기 -  문장 해독률 제고를 위한 성경 읽기 (1)


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크다 하셨을까? 

                                 
마 15: 21-28, 막 7: 24- 30


 문맹률 제로인 시대에 문장 해독은 오히려 못해


현재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제로라고 합니다. 모든 국민이 글씨를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문맹률은 단순히 글씨를 읽는데 한정이 됩니다. 글자를 가지고 만들어지는 문장에 가서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문장, 글자를 조합해서 뜻을 표현하는 문장에 가서는 단순하게 글자를 안다는 사실만으로는 감당이 안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요즈음 나라가 아주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자세히 살펴보니, 나랏 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뜻밖에도 한글 해독을 잘 못 해서 그런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문맹이 아니라서, 글자는 읽을 수 있으되,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벌어지는 일들, 얼마나 많은지 실감하게 됩니다.


어디 그런 나라일에만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우리의 관심사인 성경에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성경해석을 함에 있어 글자는 읽지만, 글자가 조합된 문장을 해독을 잘 못하는 경우 말입니다.  본문은 제가 생각하기에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문장을 잘 못 해석하는 바람에 예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들어 놓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읽으면서 어떻게 해석했는가? 이 여인을 모욕했다, 개라고 모욕했는데 이 여인이 그런 모욕을 참으면서 예수님께 매달리니까 그제서야 예수님이 이 여인의 소원을 이루어주었다는 해석이 여기저기 넘칩니다. 예수님께서 26절에 “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 라고 말씀하신 부분을 가지고 그렇게 해석하는데,과연 그럴까요?


그래서 본문을 가지고 한글 문장의 해독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첫째, 과연 예수님은 이 여인을 모욕하셨는가? 둘째, 이 여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개라는 말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인내심을 가지고 그 말에 대답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가?


먼저 사건의 개요를 살펴보겠습니다. 가나안 여인 의 딸이 귀신들려서 그것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온 장면입니다. 그렇게 그 여자가 예수님께 다가오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 하신대(24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 주여 저를 도우소서”(25절)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 (26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하니(27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아(28절), 그 여인은 결국 소원을 이루고 집에 돌아갔다는 기사입니다.

개는 어떤 개인가? - 개의 위치는 어디인가?


먼저 여기에 등장하는 개를 살펴봅시다. 여기 등장하는 개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개가 어떤 개인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에 그렇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개는 어떤 개일까요? 어떤 개인가를 알기 위하여 가장 기초적인 질문이 그 개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개가 위치하고 있는 곳을 파악하면 그 개가 어떤 개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개가 위치하고 있는 곳을 구체적으로 말하시요! 이런 문제에 객관식으로 답의 항목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1) 집 밖이다. 2) 집 마당이다. 3) 집안 거실이다. 4) 집안 식사하는 곳이다.

본문 안에 단서가 있는데, 몇 절일까요?

27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 문장을 살펴보면, 금방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개들이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 했으니, 개가 위치하고 있는 장소는? 상 밑입니다. ‘상에서 떨어지는’이라고 묘사해 놓았으니까, 음식들은 자유낙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수직낙하를 하니, 상위에서 바로 그 상 밑으로 장소 이동을 하게 됩니다.

음식은, 떨어진 부스러기 음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상 밑이니까 상이 위치하고 있는 곳, 곧 집안 어딘가에 상이 위치하는 곳, 그곳이 부엌이든 거실이든 상이 차려진 곳 그곳에 개도 있겠지요. 


그러면 상이 차려지고 음식을 먹는 곳은 집안이겠습니까? 집 밖이겠습니까? 물론 가든 파티를 하는 경우라면 집 밖에 상을 차려놓을 수 있겠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평상시를 말하는 것을 말하니까 당연히 집 안이겠지요. 그래서 본문의 27절을 살펴본 결과 상은 당연히 집안에 있고, 그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물 부스러기를 개가 먹는다 하니 개는 당연히 집 안, 그리고 식탁 근처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것은 .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물 부스러기를 누군가 던져줘서 개가 먹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는 부스러기, 그것을 확실히 해 놓자는 것입니다. 떨어지는 이라고 말하니까, 음식물은 저 혼자 장소이동을 할 수 없을 것이니까 따라서 개는 집안에 있고, 집안 거실 부엌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개는 어떤 종류의 개인가요? 애완용 개? 아니면 다른 종류의 개? 당연히 애완용 개입니다.

애완용 개는 그 당시 있었을까?


그러면 의문이 생깁니다. 당시에 애완용 개가 있었나, 하는 의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이스라엘에서 개는 부정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레 11:26).

<굽이 갈라진 모든 짐승 중에 쪽발이 아닌 것이나 새김질 아니하는 것의 주검은 다 네게 부정하니 만지는 자는 부정할 것이요>


그래서 성경에서 개를 귀하게 여기는 구절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몇가지 구절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눅 16장 19-2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자, 여기에서 개의 위치는 어디일까요? 대문 밖입니다. 부자집 대문에 놓여진 거지, 그리고 그 거지의 헌데를 핥고 있는 개, 이 경우의 개는 들판을 돌아다니는 몰려다니는 들개를 의미합니다.

혹시 여기에서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라는 말이 있으니,본문 27절,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와 다를 바 없다 생각하시는 분은 계시지 않겠지요?


욥기 30:1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비웃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내가 보기에 내 양 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들이니라>

그러니 이스라엘에서 개는 그런 모습 – 집 밖에서 다니는 –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그 여인은 집안에 개가 있다고 그럽니다. 개를 그런 식으로 언급한 것을 보니 그 여인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어느 나라 사람일까요?


그런 종류의 개를 키우는 경험을 말하고 있는 이 여인의 정체가 궁금해집니다.

그 여인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웬일인지 그 여인은 유대사람들이 웬만해서는 언급하지 못할, 아니 생각하지 못할 장소에 있는 개를 언급합니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방에 개가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방에 그것도 먹고 마시는 식사공간에 개를 등장시킵니다. 그러한 발언을 하는 그 여인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가나안 지방에 사는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이면 당연히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상합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그래서 다른 성경, 본문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다른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어떤 단서를 찾아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가복음 7장입니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바로 여기 답이 있습니다. 그 여인은 가나안 지방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헬라인이라는 것입니다. 헬라인 즉 그리스 사람이지요. 그렇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 헬라에서는 이스라엘과 달리 애완용 개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애완용 개를 키워본 경험, 애완용 개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길래 예수님의 말에 그렇게 응답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하는 것에는 응당 자기가 경험을 해 본 일들이 녹아 들어가 있게 됩니다. 그러니 이런 본문을 해석할 때에 적어도 그런 풍습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제대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숙소의 뒤채에 들어서니 바로 집주인의 턱 아래에서 개 짖는 소리가 몇 번 났다. 깜짝 놀라 주춤서니 집주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자리를 권한다. 집주인은 긴 수염을 늘이고 머리는 반백인데 구들간 위 앉은뱅이 책상 앞에 우뚝 앉았다. 구들간 아래 놓인 의자에는 웬 노파가 앉았는데 머리에는 붉고 흰 접시꽃을 꽂고 도화 수를 놓은 야청빛 치마를 입었다. 노파의 가슴팍에도 개 짖는 소리가 나는데 아까 주인 영감치보다 더 사납게 짖었다. 집주인은 슬그머니 품 속에서 삽살개 한 마리를 끄집어 내는데, 크기는 토끼만 하고 털은 길이가 한 치나 되고 털오리는 눈 빛같이 희고 등골은 푸르스름하고 눈은 노랗고 주둥이는 빨갛다. 노파도 역시 품속에서 삽살개를 끄집어 내어 주 양주가 나에게 번갈아 보인다. 털빛은 마찬가지였다.>
<박지원 열하일기,(상) 134쪽>


 강 하나를 건너 있는 청나라에서는 그 당시 조선에서 보지 못하던 애완견을 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신기해서 연암을 자세하게 그 사실을 기록하여 놓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서는 개를 천하게 여겼던 반면에 바다 건너 그리스에서는 애완견을 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조금 가닥이 잡혀갑니다. 예수님과 그 여인의 대화가 왜 그렇게 진행이 되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개’라는 말을 자기의 관습을 나름대로 녹여 해석해서 응답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과 대화를 시작하면서 그 여인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꺼내신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듣자, 그 여인은 그 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개라는 말을 한 것은 내가 헬라인이라 개에 대한 인식이 다른 것을 알고 계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한 그 여인은 자기 나름대로 그 대화에 센스있게 응답한 것입니다. 무릇 대화는 이렇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동문서답이 아니라 서로 알고 있는, 서로 기초하고 있는 내용이 맞아 떨어질 때에 그 대화는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개' 라고 한 것은 애완용 개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에는 애완용 개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개라고 하면 모두 집안 마당이나 집밖에 두고 기르는 개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헬라-그리스 - 에서는 그러한 애완용 개를 기르고 있어 그러한 개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가나안여인이면서 헬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둘러싼 모든 유대사람들이 그 말을 그냥 개라고 알아들은 반면에 그 여자는 예수님이 말하는 속 뜻을 정확히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애완용 개라는 말을. 오직 한군데, 공동번역에서는 그런 의미를 속에 감추어 놓았습니다.

< 그 여자가 예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러나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며 거절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개' 대신에 '강아지' 라고 풀어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강아지라고 하니까 조금 분위기가 달라지지요?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


그래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 두사람의 대화를 해석하여 이러쿵 저러쿵 하기에 앞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냐 하는 것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가슴에 말로도 상처를 주시는 분은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석이 되는 말씀을 했다면 표면적인 언어의 뜻보다는 더 깊은 다른 뜻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하는가가 선행이 되고 그 다음에 거기에 기초를 두고 그 말씀을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우리에 주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여인을 개라고 하신게 아니라 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 여인의 믿음을 크다 하셨는가?



그 부분은 그 정도면 이해가 되었으리라 생각이 되니 다시 앞으로 되 돌아가서 28절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왜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크다 하셨는가? 간단히 이야기하면 예수님과 통했다는 것입니다. 말이 서로 통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6절)라는 말씀을 하시고 그 여자의 반응을 보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잔뜩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한 말을 주변에 서 있는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할 지라도 저여자만은 이말을 이해 할 것이다, 그렇게 기대하시며 그 여자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이윽고 그 여자가 대답을 합니다.

27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 의도한 바대로 애완용 개를 완벽히 이해하고 거기에 기초하여 '우리 헬라에서는 집안에 있는 애완용개들은 집안에서 주인과 함께 기거하면서 밥도 같이 먹습니다. 그러니 주인의 밥상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는 실제로 부스러기가 아니라 주인과 같이 먹는 밥입니다.'라고 답한 것입니다.

이렇게 그여인이 화답을 했으니 한마디로 얼마나 센스있고 부드러운 대답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바라던 대답인 것입니다. 그런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거기에 화답하십니다.

28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것을 마가복음 7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7장 2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딸에게서 나갔느니라.”하시매 30절,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이 말을 하였으니" 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 바로 그 말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인의 절묘한 대답이 예수님께서 그 소원을 들어주시는 열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 들었던 해석, 그여인이 자기 딸의 병을 고침받게 된 이유는 그여인이 예수님이 개라고 부르는모욕을 참고 끝까지 견디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대답을 하여 자기소원이 이루어지는 응답을 얻어내었다는 것입니다. 해석이 다르면 교훈도 달라집니다.


해석이 다르면 거기에 따라 얻어지는 교훈도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그여인을 개라고 모욕했다고 해석해서는 성경을 백번을 읽어도 거기에서 바른 교훈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제대로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 이야기를 통해서 얻는 교훈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이해해야만 제대로 응답할 수 있고 반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바로 읽지 못하고 모든 본문을 그저 그저 축복….내 자식 성공!! 집안 평안!!! 을 추구하는 구절로 읽어내는 신도들을 자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리 한국교회입니다. 바른 문장 해독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누가 복을 받았다더라, 십일조를 꾸어다가 가불로 미리 했더니 하나님이 내 정성에 감동했는지 복을 주시더라, 목사님이 팥으로 메주 쑨다고 설교해도 무조건 아멘 아멘 순종했더니 복을 받았다더라, 는 아전인수격의 해석이 난무하는 곳이 한국교회이고 한국사회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말씀을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글자도 잘 읽어야 할뿐만 아니라, 문장도 잘 해석해야 합니다. 문맥도 철저하게 파악해서 행간에 숨겨있는 의미까지도 잘 챙겨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름에 제대로 반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제대로 반응할 때에, 예수님의 뜻을 이 땅에 바르게 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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