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제자가 되려면 부모를 미워해야 하나
 
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눅 14:25~27, 마 10:34~38)


문장 해독률 제고를 위한 성경 읽기(3)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5~27)."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4~38)."


연애편지 VS. 신문 기사 – 같은 내용 다른 해석


"사랑하는 순이 씨에게

당신을 보지 못하는 이 마음 심장을 도려내는 듯합니다.
이렇게 당신을 보지 못하고 지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당신을 보지 못하니 밥도 물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숨도 쉴 수 없습니다.
하루 빨리 보고 싶습니다. 김갑돌 올림."


이러한 편지 쓰거나 받아 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갑돌 씨가 그리워하는 순이 씨에게 보낸 연애편지입니다.
이 편지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해 보았습니다. 순이 씨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남자의 건강 상태는 어떨까요?

첫째, 심장에 문제가 있지요? 심장을 도려내는 듯하다고 하니까, 분명 심장에 문제가 있습니다.

둘째, 죽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하니까 심리적으로도 문제가 있습니다. 염세주의자로서 곧 죽을 방법을 찾아 무언가 일을 저지를 것 같지 않습니까?

셋째, 위에도 역시 문제가 있지요? 밥도 물도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또 기관지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숨을 쉴 수 없다니 말입니다. 대체 연애를 어떻게 하기에 이런 병에 걸렸단 말입니까? 이런 연애편지를 읽고 나서, 연애는 만병의 근원이다, 따라서 연애를 하지 말라고 결론은 내린다면?

제가 순이 씨에게 보낸 갑돌이의 편지를 읽고 나서 그런 결론을 내렸다면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실 것 같습니까? 그렇게 해석하는 저를 온전한 사람이라고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뭔가 모자라도 한참을 모자란 사람이라고 판단하시겠습니까?

당연합니다. 연애편지는 어디까지나 연애편지로 읽어야 합니다. 연애편지에서 과학을 찾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신문 기자가 사고를 당한 갑돌 씨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면 어떨까요?


"이번 사고를 당해서 중상을 입은 환자 김갑돌 씨의 상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사람은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습니다. 밥도 물도 넘길 수 없습니다.
심장에 도려내는 듯한 심한 통증이 있으며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암담한 상황입니다."


이런 경우 김갑돌 씨의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이런 경우 제가 아까 김갑돌 씨가 쓴 연애편지를 바탕으로, "아, 그 사람 그전에 순이라는 애인에게 쓴 편지를 읽어 보았는데, 지금의 경우와 증상이 똑 같네, 그런 것으로 보아 별 일 아닌 것 같아. 지난번에는 더 증상이 심하다고 했는데 멀쩡했거든"이라고 말한다면, 정말 사람이 아니지요?

아마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보 아니면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글은 상황에 맞게 읽어야 합니다.아주 단적인 예를 들었는데, 우리는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 그런 경우를 많이 접합니다. 그래서 그 연애편지를 받은 순이 씨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갑돌 씨의 건강을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염려를 하는 대신에 나를 많이 사랑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순이 씨가 이번에는 신문 기사에 난 갑돌 씨의 상태를 읽고서도 태평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상황에 맞게 글을 읽어야


연애편지에서 갑돌 씨가 쓴 내용은 과장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반면 신문 기사에 난 기사는 과장법을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같은 글, 그래서 과장법으로 보이는 글인데 어떤 곳에서는 과장으로 읽혀서 그 내용을 문자 그대로, 글자 그대로 이해하지 않는 반면에 어떤 곳에서는 그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만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 사실은 우리가 일상생활을 살아가면서 흔히들 그런 과장법을 자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러운"
(이건 노래 가사입니다)

'일각이 여삼추', '백발삼천장', '내 코가 석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그래서 그런 과장법을 경우에 맞게, 때에 맞게 사용하면 우리의 생활에 윤활유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말이 더 잘 통하고 분위기를 훨씬 더 부드럽게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그런 과장법을 사용해서 내용을 표현하는 글들이 많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 23:24)."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어떻습니까? 성경에도 그렇고 또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이 접하는 것이 바로 과장법을 사용한 글 그리고 말들입니다.


성경 기록의 이해 - 과장법의 이해

 
그렇게 과장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단순하게 사실을 전달하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느낌과 정서까지도 전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컨대 연인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자신의 사랑을 상대방에게 표현할 때에 정확한 과학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방을 향한 자기의 마음을 과장법을 사용하여 더 적극적으로 더 강조하면서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억을 잘 하도록 하는 장치 그리고 중요하다는 의미


그런데 그런 이유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 글을 읽고 듣고 하는 사람들이 그 말을 기억하도록 만든 장치라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언급했던 노래 가사,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러워"라는 가사, 그 노래 전체는 모르지만 그 가사만은 기억이 납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웠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러울까, 하며 떠올리는 모습, 정말 사랑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수많은 정보를 듣고, 그 들은 정보들은 흘려보내고 잊고 하지만 그렇게 과장법을 이용하여 전하는 글과 말들은 나름대로 기억에 남습니다.

또 그 말들은 기억에 남아 있는 만큼 중요하다는 말도 됩니다. 말도 안 되는 말 같지만, 그렇게 기억에 남도록 언어를 구사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그 말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중요하니까 잊지 말라는 것이지요.


표피적인 성경 이해

 
그래서 사람들은 실제에서는 그런 과장법을 많이 쓰고, 또 그런 과장의 경우에 아무런 의심 없이 쓰는데 유독 성경에서 그런 구절들을 만나면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버트란트 러셀이란 분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그분이 쓴 책 가운에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것이 있는데 그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는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교리를 위하여 생물학적 가족 관계를 끊으라는 의미이다. 이는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세상에 생겨나게 된 불관용과 지대한 관계를 가진 태도이다(56~57쪽)."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버트란트 러셀은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자기 식으로 이해한 다음에 생물학적 가족 관계를 끊으라는 의미라고 결론을 내려 버린 것입니다.

러셀은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문장의 수사법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특히 성경에서 그런 수사법이 사용되는 것에 대하여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과장을 부정확한 표현으로 생각한다거나, 정밀하지 못하다, 또는 거짓을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과장법을 사용한 문장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째, 문자적으로 불가능한 경우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7)."


아무리 많다 한들 자손이 번창하다 할지라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별처럼 많게 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불가능하니까,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과장법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들 흔히 실생활에서 쓰고 듣는 것으로는 어떤 예를 들 수 있을까요? "바닷가에 가서 휴가를 보내고 오니 온몸이 새까맣게 탔다"고 말하지만 온 몸이 새까맣게 탔다면 그 사람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요? 따라서 문자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경우이니, 과장법을 사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밥을 어찌 많이 먹었는지, 배가 남산만 하다." 이 문장 역시 과장법이지요.


둘째, 성경의 다른 곳과 상충하는 경우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막 7:9~13)."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막 10:17~19)."


서로 다른 내용이지요. 한쪽에서는 너의 부모를 공경하라, 분명하게 말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고 하니 분명 어떤 그 무엇이 그 속에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과장법이란 수사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것입니다.


셋째, 다른 성경 기자가 그 구절을 재해석해 놓은 경우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5~27)."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서로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미워한다는 말을 사용했는데, 같은 내용의 글을 마태복음에서는 다르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뭐라고 바꿨는가? 더 사랑하면 안 된다고 바꿨습니다. 그렇게 바꾸니까, 완전히 다른 말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미워해라"는 말과 "어머니를 나보다는 덜 사랑해라", 미워하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덜 사랑해라'는 것은 아주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아니 부정적이라기보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의미로 해석이 된다는 것은 그 말이 과장법을 사용한 문장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미움의 구조



그런데 이런 해석 말고 히브리어 특유의 말 사용법이 있습니다.
사랑과 미움을 대조하여 사용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언 13:24)."


여기 미움과 사랑이 등장합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매를 가지고 징계하면서 키워야 한다는 게 성경 속에 보이는 자녀 양육 방법인데, 여기에서는 더 심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매를 아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자식을 미워하는 사람이고 그 반대로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식을 징계하는데, 매를 아끼지 않고 사용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과연 매를 아끼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자식을 미워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미워한다는 말보다는 자식을 덜 사랑한다는 표현이 맞지 않을까요?

그렇게 성경에서는 사랑의 반대말로 미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비교급으로 미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 반대말이 미움이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한다, 덜 사랑한다는 말을 미워한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미움'을 '사랑'의 열등 비교급으로 사용한 구절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 1:2~3)."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창 29:30~31)."


And he went in also unto Rachel, and he loved also Rachel more than Leah, and served with him yet seven other years.

And when the LORD saw that Leah was hated, he opened her womb: but Rachel was barren.(kjv)


결론 - 구주를 더욱 사랑



서두에 과장법을 사용하는 이유 몇 가지 말씀드렸는데, 과장법을 사용한 말들은 기억에 잘 남아 있게 되며, 또한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말 같지만, 나(예수)를 사랑하는 자는 부모를 미워해야 한다는 말 기억에 남습니다. 물론 그것이 부정적인 의미로 기억되어 기독교를 폄하하는 계기로 쓰이기도 하지만 원래의 의미는 그게 아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평생 글로 살아왔던 버트란트 러셀이 문장의 수사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그 구절을 기독교인을 공격하는 구절로 사용했다는 것은 유감이지만, 그런 만큼 우리는 그 구절이 가진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 예수님을 더욱 더 사랑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은 이렇게 다시 읽어야 하고 우리 마음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보다도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말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사랑의 크기가 얼마일까?

내가 가진 사랑이 100이라면, 아니 할 수 있는, 다시 말해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랑이 100이라면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얼마이고 나 자신과 나 자신의 부모를 향한 사랑은 얼마일까? 나 자신과 우리 부모님을 향한 사랑이 50이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50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예수님을 60 우리를 40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거기 사랑 100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그것을 더욱 키워 1000으로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700으로 자신과 부모를 향한 사랑을 300으로 한다면 어떻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기독교를 오해하는 많은 사람이 우리가 예수 때문에 부모를 미워하는 줄 아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 100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랑을 가지고 부모와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