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힘이 크다는 의인은 누구인가? 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혹시'라는 말이 착각을 일으킨다
본문의 15, 16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바로 '혹시'라는 말로 시작되는 문장입니다. 15절부터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리고 절을 바꾸어 말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16절)."
그리고 같은 절 안에 또 다음 말이 이어지지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장, 절의 구분은 읽기의 편의를 위한 방법이므로, 이 구절들을 절에 구애받지 말고 그냥 이어서 읽어 봅시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자, 이 중에서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는 부분만 살펴봅시다. 이 부분만 본다면 죄를 범한 사람이 병들어 고난을 당할 때에, 그 죄를 고백하고 병이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면 그 병이 낫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말 앞에 '혹시'라는 말이 있으니까, 어떻게 이해됩니까? 죄를 범한 사람이 고난 받는다는 것은 '혹시'라는 말이 붙어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기는 하지만, 100% 모두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 본문을 이해하는가 하면, '혹시'라는 말이 없는 것처럼, - '혹시'가 있는지 없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 이해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병에 걸렸다면, 그렇다면 죄를 범하였구나. 그러면 죄를 고백하고 그 죄를 사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병에서 낫게 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혹시'라는 말에 주목을 한다면, 이 구절은 어떻게 이해가 됩니까? '혹시'라는 말 뒤에 나오는 문장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병이 난 것이 꼭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석도 같은 식으로 해야 하는데, 성경에 오면 그게 안 됩니다. 사람들은 극단적인 것을 좋아하니까, 15절 혹시 이하의 문장을 '만의 하나라도'라는 식으로 이해하려고 하질 않고, 아주 단정적인 구절로 이해를 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식의 말이, 병문안을 온 성도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옵니다. "집사님, 아무래도 하나님이 집사님이 죄를 고백하시기 바라셔서, 이런 사고를 허락하셨나 봐요, 이런 병이 낫나 봐요, 죄 지은 것 있으면 빨리 회개하세요."
그러니 '혹시'라는 말 뒤에 오는 말은 100% 사실은 아니라는 것, 이것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원어를 살펴보면,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칸 하마르티아스'는 조건문으로 모든 병의 원인이 죄에 있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일부는 죄가 병의 원인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지(신 28:22, 27, 막 2:5, 요 5:14, 9:2) 결코 병에 걸린 것이 모두 다 죄를 지은 결과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혹시'라는 말을 빼 버린 채 이해하는 경향이 더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혹시라도 그럴지 모른다, 그러니 그렇게 기도해라'고 말했는데 그것을 읽는 우리들이 '혹시'라는 말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해석하는 가운데 '아, 죄를 지었으니 그렇게 병이 났구나, 그러니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해라'고 단정해 버리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 의인의 간구는 누구의 기도인가
그러면 이제 이 구절을 그런 식 - 100이면 100 모두 다 그렇다- 으로 이해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이번에는 '혹시'라는 말이 어디까지 적용이 되는가 살펴봅시다.
왜 이런 작업이 필요한가? 16절 후반부의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는 말 때문입니다. '혹시'라는 말이 앞에서 끌어 주면 뒤에 오는 문장이 의미하는바 현실 가능성이 없을 수도 있는데,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는 말에까지 '혹시'라는 말이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혹시'라는 말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문장을 나누어서 각 부분마다 그 앞에 '혹시'라는 말을 붙여 보면 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혹시)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 다음에 그러므로 이하는 앞에 나온 말의 결론으로 이어지는 말이니 '혹시'라는 말을 붙여 생각할 필요가 없지요.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그 다음 말이 문제입니다.
16절에 계속 이어집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이 말도 '혹시'에 연결이 되는 말일까요? 혹시라는 말을 붙여 생각한다면, '혹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어떻습니까? 말이 되는 말일까요? 말이 되지 않지요. 따라서 이 '의인의 간구는 힘이 세다'는 말은 앞의 말들과는 별개 문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15절과 16절을 다음과 같이 분해해서 읽어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혹시' 앞에서 괄호를 치고,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까지 괄호를 치고 읽어야 합니다.
의인은 누구인가?
성경은 15절과 16절을 기록하면서, 맨 마지막 말을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로 장식을 합니다. 그래서 그 말이 마치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는 말의 이유를 말해 주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병든 자가 있을 때, 그 사람이 죄를 범한 사람일 경우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사람이 의인이면, 역사하는 힘이 크니까, 의인이 기도하면 병든 사람이 죄를 사함 받고 병이 나을 수 있다고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석을 한다면 앞에 문장에 나오는 말 -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 과 배치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이 구절을 살펴보면, 기도를 해 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뒤에 있는 말이 앞의 말에 대한 이유가 되려면 기도를 해 주는 사람은 당연히 의인이 되어야 할 텐데 16절 전반부의 말은 그게 아닙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라고 했으니, 결코 누구도 – 우리가 알고 있는바, 의인의 개념에 해당하는 - 의인이 아니지요. 그리고 '서로 기도하라'고 했으니, '죄를 고백한 너'와 '죄를 고백한 내'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니 '죄인인 너'와 '죄인인 나'가 서로 위해 기도하라는 말이지요. 그러니 뒤에 나오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는 앞에 나오는 말과 전혀 관련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16절 '그러므로' 이하의 말과 그 말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는 말은 전혀 관계가 없다, 즉 '혹시'라는 말은 거기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 의인의 간구는…이라는 말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요? 저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 문장을 쓸 때에 두괄식이라는 방법이 있습니다. 머리 두(頭)자, 즉 앞에 앞머리에 결론을 말하는 방법이고 미괄식이라는 것은 꼬리 미(尾)자 해서 문장의 맨 마지막에 결론을 말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방법이 있는데 바로 쌍괄식(혹은 양괄식)입니다. 결론을 앞에 내린 다음 그것을 설명하고 다시 맨 마지막에 결론을 다시 언급하는 방식인데, 오늘 15절과 16절이 바로 그렇습니다. 앞에 미리 결론으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라고 말한 다음에 마지막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재차 강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기도를 언급하다가 중간에는 죄인이 등장하더니 왜 마지막에 의인이라는 말이 등장할까요? 거기에 보면 아무도 의인에 해당하는 사람이 없는데, 갑자기 의인이 등장하니 어리둥절할 수밖에요.
믿음의 기도는 곧 의인의 기도
그런데 앞에 15절 맨 앞에 말, '믿음의 기도'라는 말을 유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우리가 너무 자주, 또 많이 사용하여서 그러려니 생각하는 게 문제 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기도는 무슨 의미일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따라서 믿음이 바로 의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기도가 즉 의인이 하는 기도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앞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고 기록하고는 다시 끝에 가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강조하여 기도가 힘이 있다고 우리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즉 죄인 된 우리가 믿기만 하면 의인이 되므로,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의인의 기도가 되어서 병든 자를 일으킨다, 힘이 있다, 그러니 기도해라 강조를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여기서 의인은 결코 누구, 무슨 특별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의인으로 예시된 인물인가?
이러한 저의 말이 맞다는 증거가 바로 그 다음 절에 나타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17~18절)."
생각 없이 읽어 가면, 이 구절들은 16절의 마지막 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실례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힘이 세다더니, 바로 엘리야가 바로 그런 의인이니 그렇게 비가 삼년 6개월 동안 오지 않고 또 기도하니 왔구나, 맞아! 그런 의인의 기도는 힘이 세!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면 그 자체 구절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라는 말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었다, 라고 말하는 게 어찌 의인의 샘플을 말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인데, 기도하니 그런 큰 역사가 일어났다. 따라서 제가 아까 해석한 것, 우리 모두 믿을 때에 의인이 되었고 의인이 되었으니 당연히 의인의 기도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런 기도라 역사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엘리야를 거론한 것은 엘리야가 의인이어서가 아니라, 믿는 사람이면 모두 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 말한 것이지요.
'의인의 간구'라는 신기루에 빠지지 말자
그러니 여기서 오늘 본문이 말하는 기도의 큰 줄기를 요약해 보자면 15절, 서두에 나오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그리고 16절의 후반절,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는 말 역시 크게 잘못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할 때 너무 사람의 '의'를 앞장세웁니다. "하나님, 제가 요즈음 열심히 믿습니다. 봉사도 열심히 하구요,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하구요, 또 헌금도 열심히 하구요, 그러니 정성을 보아서라도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그렇게 사람의 의를 내세우는 기도를 들을 때에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 자기 의를 먼저 앞세우고, 하나님 앞에서조차 누구보다 잘했어요, 잘났어요를 내세우는 그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그런 기도는 예수님이 책망하신 바리새인의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는 우리는 납작 엎드려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한 일은 내어놓기도 부끄럽습니다, 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직 바랄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밖에 없습니다, 라는 기도가 우리 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따라서 본문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엘리야도 너희와 같은 보통 사람이었다, 그런 보통 사람이 기도하는데, 믿음을 가지고서 기도하니, 삼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오기도 하고 비가 내리기도 하였다. 따라서 엘리야와 같은 너희도 믿음을 가지고서 기도하면 된다.고난이 있느냐, 병에 걸렸느냐? 기도해라. 믿음을 가지고서 이미 의인이 된 너희 아니냐?
오 목사님,
답글 달라고 들어왔어요.^^
들어온 김에
다석선생님 시 원문으로 왕창 다 고쳐놨어요.^^
아무래도 제가 요즘 이 시 때문에 몸살 난 것 같어요.ㅎㅎ
야밤에도 일어나서 큰 소리로 읽어대고,
새벽에도 읽어대고,
낮에도 눈 못 떼고..
대체 돈오(頓悟), 悟道라는 건 뭘까요?
목사님,
제가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되서
고심끝에 산 성경이 한문섞인<관주성경전서>이었어요.
낱말뜻 알면 성경이 읽혀질 줄 알고요.
그런데 옥편 찾아가며 아무리 읽어도 오리무중이더라구요.
관주특성상 꼬리물기로 인용, 삽입, 대조.. 이런 건 도움 되었지만요.
그래서 목사님의 <각주 없이 성경 읽기>는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은가 싶어요.
우리 같은 평신도가 놓치기 쉬운 것 중의 하나가 성서의 맥을 자주 놓친다는 거예요.
그건 큐티식 성경공부 영향도 있을 것 같은데요.
성서 몇 구절을 전체문맥과 상관없이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목사님 글을 읽을 때마다
성서의 바른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가, 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성경-내 맘대로 해석하기, 이것만은 반드시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진짜루..^^
참, 목사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의인이다. 아멘.
라라님 건강 우선적으로 챙기시구요......
오늘 예스 이십사으로부터 다석의 책이 도착했습니다.
와.....첫장을 열어 본 순간, 이건 보통이 아니다...고로 큰일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
라라님의 경지가 어떤지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읽어봐야겠습니다. 라라님 뒤를 따라가려면!!!
관주 성경 ..게다가 한문 섞인 것이라면 .....정말 예전에 가지고 있던 것인데요
지금은 고이 모셔두고 있기만 하지요....추억의 성경책이 되어 버리고 만 책입니다.
요즈음 중국어 공부 하면서 한문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정말 한문을 모르면 성경의 용어부터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거라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청소년, 아니 성인들이 한문에 대해 기초적인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음 하는 바람도 해보구요....
관주 성경의 좋은 점은 말씀하신 대로 꼬리 잡고 따라가기인데
그것도 워낙 가지를 쳐놓은 바람에 따라가다 보면 - 요즈음 잘못된 내비게이션 같이 - 길을 잃어 버릴 수도 있지요..
다석 책을 읽고 이야기하도록 하지요....열심히 읽을게요...
댓글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감기 조심 하세요~~~~
ㅇ
오 목사님, 이런 때는..
저 쥐구멍으로 숨어야 합니다. 진짜루..^^
다석선생님 책이 보통 아니다, 고로 라라의 책읽기가?
와는 하등, 진짜 하등 관계가 없답니다.^^
왜냐면 라라는 다석책을 읽은 게 아니라 그냥 '눈동냥'을 했기 때문이어요.
오래전에 제 지인이 다석선생님을 열심히 소개해 주셨는데,
그 때는 하품만 하고 있었어요.
한참 우찌무라 간조에 신나 있을 때여서 왠만하면
솔깃할 만도 한데, 영 흥미가 안 나더라구요.^^
뭔가를 속시원히 말씀하지 않고 댑따 어렵게만 꽈 놓은 것만 같고..
그리고 극금욕주의자 같기도 하고,
종교다원주의자 같기도 하고.. 하옇든..
그런데 이 분을 지난 여름에 갑작스럽게 만나뵈었네요.
목사님,
(이건 극히 제 사적인 이야기인데,
그래도 말씀드릴께요)
앞으로 제가 목사님과 열심히 대화 할라믄
요런 컨텍스트가 있어야 하니깐두루요.^^)
지난 여름에 제 형부가 갑자기 소천하셨어요.
진짜 갑자기 교통사고로..
그날 밤 병원이 복잡해서 잠 자려고 언니네 집에 갔는데,
텅빈 집에 몇 시간전에 형부가 벗어놓은 추레닝, 장화가
어지럽혀 있더군요. 그 때 불현듯,
아, 살아있다는 건 뭐고, 죽었다는 건 뭔가, 그 경계는?
마치 장자의 호접몽이 제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어요.
그건 제게 어떤 것, 말로 표현 안 되는, 궁극적인 것의 '현현'이었어요.
경이라고 할까요? 환희라고 할까요?
밤새 그 물음, 그 맞딱뜨림은 다다음날 이른아침 화장터로 가는
길까지 이어졌어요.
아침안개 같은,
곧 홀연히 사라질 이 유한한 존재들은 대체 뭐꼬?
그리고 나는 대체 어디에 서 있는가,
마치 제가 죽음과 삶의 가장 극점에 서 있는 것 같았어요.
物로서요. 장자의 호접몽에서 말하는 그 '物化'의 그 物 말이어요.
그리고,
그 쯤에 도서관에서 다석 선생님의 오도송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나 시름없다. 이제부턴 시름없다.
님이 나를 차지하사
님이 나를 맡으셨네
님이 나를 가지셨네
죽기전에 뭘할까도
남의 말을 어쩔까도
다 없어진 셈이다.
아, 이게 진짜 자유구나!!
구원의 자유!
구속의 자유! (주님께 拘束된 救贖의 자유)
목사님,
제가 이건 아주 건방진 생각인지는 모르지만요,
에크하르트에서 막혔던 부분이
신기하게도 다석선생님의 이 시에서 풀리는 것 같았어요.
어거스틴의 '주님 안에서의 안위'도요.
목사님,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제 생각일뿐이어요.
다만, 저에게는 그 아팠던 지난 여름,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어라" 라고 담담하게
말 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 건 분명한 건 같아요.
목사님, 언젠가 제가 말씀 드렸듯이
저는 독서량이 현저히 부족합니다.
독해력은 더 딸리고요.
..그래서 늘 고민 많은 라라집사입니다.
병원사역하시는 목사님,
그래서 생사기로를 더 눈여겨 보실 목사님,
늘 평안히 지내세요.
I am all ears!! 귀를 쫑긋하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렇게 가까운 사이에서 힘든 일을 당하셨군요. 그런 일을 통해서 라라님의 도 통함이 새삼, 느껴집니다.
저는 우리 병원에서 감사하는 일이 바로 그러한 일을 만나지 않는 것이랍니다.
병원에 오시는 분들이, 생명과는 관계없는 일들로 오시기 때문에, 제가 그나마 감당하고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만약 그런 일을 자주 접하는 곳이라면 전,,,,아마 감당하지 못했을 듯 싶습니다.
그래도 요즈음 주변에 암으로 투병하는 분들을 만나게 되어서
생과 사의 거리가, 그 관계가 어떤지를 생각하게 되기는 합니다. 그래도 그때 뿐이니까,
라라님의 그런 생각과는 영 거리가 먼 것이지요.
그런 말씀 언제 자세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석에 대하여, 그 책(다석의 마지막 강의) 을 정독하려고 옆에 각종 참고서적을 펼쳐놓고 읽어가는데
예컨데 그 분의 맹자 읽기는 그야말로 " 영 낯설다"는 말이 적확한 표현입니다.
그분의 예수 이해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과연 내가 제대로 읽어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크게 착각을 하면서 읽어가는지
여간 난해한 일이 아닙니다.
요즈음 사서삼경 완전(?) 정복 하려고 정진하고 있는 과정이니까
맹자 주역 등등 다석의 강의를 왠만큼 이해하려니 생각했는데, 완전 오판!! 이었습니다.
그래도 일단 시작한 일이니, 더 해야겠지요.
더하여 오늘 또한 권의 책, <다석 유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가 도착했는데
이것 역시 그러니...아무래도 라라님의 한 수가 필요합니다!!!!!!
틈나는 대로, 한 수 부탁드립니다. 진정입니다. ( 다른 말도 물론 진정이지만, 이 말은 특히 그렇습니다.)
건강 ..요즘 말대로 완죤!!!! 건강하세요
참 꾸준하시군요.
각주없이 성경읽기의 역사가 오래 되었지요?
그동안 쌓인 글도 많잖아요.
언젠가 이런 장르의 글이
'오세용 유'라 이름 붙여질지 모르겠네요.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