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없이 성경읽기
 
나의 명령을 ‘지켜서’ vs. 나의 명령을 ‘지키면’  / 신명기 5장 29절
 
[다음의 글은 우리말의 어법과 말투에 기반을 두고 묵상한 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오밀조밀하고 미묘한 뜻이 있는 듯 하여, 짧은 생각 정리해 보았습니다.]
 
신명기 5장 28절, 29절입니다.
<당신들이 나에게 한 이 말을 주님께서 모두 들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너에게 말하는 것을 내가 들으니, 그들의 말이 모두 옳다.
그들이 언제나 이런 마음을 품고 나를 두려워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만이 아니라 그 자손도 길이길이 잘 살게 되기를 바란다.>
 
위의 구절을 읽다가 문득 그간 성경에서 보지 못하던 말이 눈에 뜨였습니다.
29절,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라는 부분입니다.
그 동안 읽어오던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래 조건부의 언약을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28:1-6)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말씀 가운데, 명령과 약속을 언급하시는 경우에는 대부분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가 네 하나님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라는 식으로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기술하던 성경말씀과는 다르게, 신명기 5장 29절의 말씀은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말 번역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 성경의 표현이 그렇다는 이야기이지요.
 
여타 표현은 대개 “지켜서” 라는 말 대신에 “지키면, 지킨다면” 이란 가정법으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본문의 경우 “지켜서”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무언가 다른 기분이 느껴집니다.
 
위의 기록은 우리말 개정개역본의 번역인데, 다른 번역본은 어떤지 살펴보았습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개역)
 
개역본에서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라고 번역한 것을 개정개역본에서도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개정개역)
 
또한 이밖에 새번역 성경도 같이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그들이 언제나 이런 마음을 품고 나를 두려워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만이 아니라 그 자손도 길이길이 잘 살게 되기를 바란다.> (새번역)
 
물론 다른 형태로 번역해 놓은 성경도 있습니다.
<그들이 항상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나를 두려워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지키면 그들과 그 후손들이 길이길이 복을 받을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
<그들이 항상 이런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준다면 오죽이나 좋으랴! 그렇다면 그들뿐 아니라 후손들도 길이 잘될 것이다.> (공동번역)
 
지켜서’와 ‘지키면’의 차이?
 
언뜻 읽으면 두 말에서 차이는 보이지 않습니다. 두가지 형태 똑같이 미래형이요, 조건부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말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미묘한 차이겠지만, 그래도 차이는 분명합니다.
무엇이 다른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먼저 우리가 보통 이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살펴봅시다.
 
우리들 이렇게 흔히들 말합니다.
“교통 질서를 잘 지키면 사고가 줄어들 것입니다.”
 
잘 지키면, 이란 말이 앞에 오게 되면, 뒤에 등장하게 되는 말은 일반적인 기대를 하는 문장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굳이 그것을 이루어내기 위하여  어떤 행동을 할 의무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지켜서’를 이용한 문장을 살펴봅시다.
“질서를 잘 지켜서 교통사고를 줄이도록 합시다.”
지켜서라는 말이 앞서면, 뒤의 말은 의무, 당위를 나타내는 말이 와야 합니다.
 
이렇게 두 문장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본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교통 질서를 잘 지키면 사고가 줄어들 것입니다.”
“질서를 잘 지켜서 교통사고를 줄이도록 합시다.”
 
“지키면”이란 말이 들어간 문장은 아주 일반적인 사실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인 ‘나’가 그 문장이 의미하는 바, 교통질서를 잘 지키는 것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와는 관련이 없는,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니 ‘내’가 ‘반드시 질서를 지키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교통 질서를 잘 지키면, 사고가 줄어들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이해가 됩니다.
 
반면 “지켜서”라는 말이 나오면, 그 말을 듣고 있는 ‘나’가 그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내’가 그 질서를 꼭 지켜야 할 필요성, 당위성이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니 그 말을 하는 사람, 듣는 사람 모두다, 질서를 지킬 각오를 더 단단히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는 경우에 이런 식으로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2인칭으로 당부하는 문장을 한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너희가 교통질서를 잘 지키면 교통사고가 줄어들 것이다.
너희가 교통 질서를 잘 지켜서, 교통사고를 줄여야 한다.
 
잘 지키면……’줄어들 것이다’, 라는 일반적이고 막연한 기대가 들어있는 발언이 되는데
지켜서, 라는 말이 나오면 그 뒤에는 의무, 당위의 말이 나오기 때문에 교통질서를 잘 지킬 필요가 의무적으로 부과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두 문장을 비교해 볼 때에, 두 번 째 문장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훨씬 더 더욱더 힘써야 한다, 각오를 새롭게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끔 하는 문장입니다.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vs 나의 모든 명령을 지키면
 
그렇게 우리말 용법에 따른 두 문장의 차이를 본문 말씀에 대입해 봅시다.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개정개역)
<나의 모든 명령을 지키면 그들과 그 후손들이 길이길이 복을 받을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
 
현대인의 성경의 번역의 ‘지키면’이란 말은 남의 일처럼 들립니다. ‘나’와 ‘명령을 지키는 일’이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듯 여겨집니다. 그러나 개정개역의 번역인 ‘지켜서’는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될 그러한 일처럼 들립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일’이  필수적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번역의 차이가 느껴지는데, 이런 차이를 성경번역자들은 알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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