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서프라이즈에서 퍼왔습니다.
읽어보니 정말 그 어느 하나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 글이 요즈음 문제되는 <가져다 찍어 붙이기>식의 설교에 딱 들어맞는 말들입니다.
그 정도로 말씀 왜곡은 강단 바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어지럽게 할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까지 교회를 이상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무서운 결과를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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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동의 패악질, 사실 교회에서 배웠다.

조중동은 초절정의 왜곡 보도로 유명합니다. 그들의 손을 거치면 말한 사람의 본의는 완전히 사라지고 그 말의 맥락과 전혀 상관없는 인상만을 받게 됩니다. 어쩌면 저렇게 말한 사람의 의도와 본의를 정반대로 전달하고 있는지....

신문으로 대표되는 매스컴의 역할의 일차적인 역할은 메신저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가운데서 자신이 커뮤니케이션의 도구 역할을 하기 위하여 논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문은 메신저이기 때문에 메시지 자체를 가공해서는 안 됩니다. 화자의 메시지 자체가 왜곡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만일 메신저가 메시지를 가공한다면 그것은 메신저가 아닙니다. 화자의 메시지를 온전히 지켜내면서 화자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고 조정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메시지 자체를 가공하여서 왜곡보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조중동은 나쁜 신문이며,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있는 사회악입니다. 그들은 메신저가 아니라 사기꾼입니다. 다시 한 번 그들의 논조 때문에 비난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화자의 메시지를 가공하는 일에 일말의 양심까지도 버렸고 그렇기에 메신저로서의 자격을 상실했으며, 이런 짓은 이간질꾼이나 사기꾼처럼 정상적인 거래와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는 자들이 하는 짓이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입니다.

기독교회의 목사도 메신저입니다. 신의 말씀(메시지)을 전달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는 신의 메시지를 어디서 받는가? 신과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서 받는가? 이렇게 주장한다면 그가 바로 이단입니다. 성경 이외에 다른 신의 메시지를 받는다고 하면 그는 무조건 이단입니다. 아무리 큰 교회의 목회자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신의 메시지를 받는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신의 메시지를 받습니다. 즉, 성경만이 신의 메시지라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목사는 성경 내용만을 전달해야 합니다.

물론 성경책은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손에 넣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는 신의 메시지를 가진 것입니다. 문제는 이 말씀을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큰 도를 담고 있기 때문에 어렵기도 하고, 약 2000년 이상 된 내용이기 때문에 그 때의 삶의 정황과 지금의 삶의 정황이 다르기 때문에 힘듭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는 전문적인 과정을 거친 사람이 해야 하기에 그것을 목사들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목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의사, 변호사, 회계사와 같은 전문 인력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성경을 해석하는 일 이외에는 다른 측면에서는 결코 우월하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가 자신은 일반적인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인 것처럼 한다면 그는 나쁜 목사입니다.

아무튼 목사는 성경에 기록된 신의 말씀을 그리스도인들과 세상 앞에 왜곡되지 않도록 바른 메시지로 전달하는 메신저입니다. 성경의 본의를 왜곡하지 않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실력이 모자라서 잘못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으며, 저도 그리 똑똑한 편이 못되어서 잘못된 해석을 내놓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도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문제는 도무지 모를 수 없는 내용, 너무도 분명해서 한번만 읽어도 알 수 있는 내용을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할 때가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것은 마태복음 11:28에 있는 참으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 예수님께서 대형트럭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으면 예수님께서 대신 짊어져 주실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현실적인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는 기쁜 마음과 가벼운 몸으로 즐거이 노래를 부르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교회와 목사들이 이 본문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서 설교를 하거나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설교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확정해서 말할 수 있느냐? 어렵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문맥을 보면 누구라도 다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8-30까지 보겠습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자, 이 세 구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쉬게 해 주겠다는 하시면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의 쉼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쉼을 주겠다고 하시고서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짊을 대신 짊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짐까지 우리 위에 더하시고서 짐을 지는 법을 배우게 해서 우리에게 쉼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짊이란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 짊을 우리에게도 짊어지라는 말씀이며, 그렇게 하면 우리가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임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많은 목사들이(물론 그렇지 않은 목사들도 많이 있음) 마치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어떤 문제들을 예수님께 내려놓으면 예수님께서 알아서 해결해 주실 것이고 우리는 즐겁게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설교를 합니다.

이 정도는 초등학생의 독해력이면 충분히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들은 왜 이 본문을 가지고 마치 예수님께서 대형트럭이 되시니 당신들의 모든 짊을 예수님께 내려놓으라는 식의 설교를 할까요? 몰라서일까요? 이걸 몰라서 그렇게 설교를 했다면 그는 목사를 할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알았을까요? 알았다면 왜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합니까? 제가 보기에는 물질숭배에 굴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크기를 자신의 성공의 척도로 놓고 오로지 많은 사람들을 모으려다보니 뭔가 세상에 내놓았을 때 달콤하고 꽂히는 말이 필요했고, 그래서 문맥과 관계없이 "수고하고 무거운 짊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는 구절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확인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하려는 말씀이 아닙니다. 목사가 메신저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메시지를 가공해서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만들어내서 그것이 마치 예수님의 메시지인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나쁜 메신저이며, 이간질 꾼이며 사기꾼입니다.

이런 예는 하나 둘이 아닙니다. 유명하게 쓰이는 거의 대부분의 구절들이 성경의 본의, 예수님의 본의와는 완전히 반대로 쓰이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많이 들으셨을 법한 구절 하나만 더 간단히 이야기하겠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구절을 읽으면 마치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어떤 것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모든"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대입시켜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빌립보서 4:13절입니다. 그런데 바로 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감옥으로 위로하러 온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사도바울 자신은 어려움에 처한 상황이라고 해서 좌절하여서 할 일을 못하지 않고 열심히 할 일을 다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복음 전도의 사명입니다.

일반적인 기대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 이것도 많은 목사들에 의하여 왜곡 되고 있습니다(그렇지 않은 목사님들도 많습니다). 초등학생의 독해실력이면 두 구절만 읽어도 본문의 내용이 일반적인 기대와는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왜곡하고 있을까요? 몰라서 그렇다고 하면 창피한 것입니다. 의도가 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이처럼 목사들이 많은 왜곡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순결해야 하는 목사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마저도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그리 잘못된 일이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이런 식의 해석과 설교가 만연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떤 기독교인들이라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정말 말이 안 통한다는 느낌을 받으실 것입니다. 저도 그런 사람들과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이것 있습니다.

이런 목사들의 황당한 해석들이 그냥 교회에만 영향을 미치고 말았을 것인가?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성경에 대한 이런 식의 접근을 당연시 하는 분위기가 결국 교인들의 억지주장을 일반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이런 것이 사회적인 분위기에 녹아져서 결국 조중동과 무수히 많은 언론들이 메시지를 가공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메신저는 화자의 메시지를 가공하면 안 됩니다. 그 화자의 본의를 최대한 살려서 올바르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화자가 보고 "그래 맞아 내가 한 말이 이 말이었어!"라고 인정할 수 있도록 전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신문들은 거기에 대해서 자신들의 논조, 평가를 덧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메시지 자체를 가공하는 것인 정말 심각한 악이며, 죄입니다.
너무 길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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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많았을 터인데 이글을 쓰신 분 - 아마 목회자인듯- 자제를 많이 하시는군요.
거기에다가 예의도 밝습니다. 길지도 않은 글을 너무 길어서 죄송하다고 하는 것을 보니..  

여기에 옮겨 올리면서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의 모습이 이렇게 되고 있다니 .......
이게 바로 말씀을 제대로 연구하지 못하고, 바로 전하지 못한 우리들 목회자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자신부터 대오 각성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하자면, 먼저 분위기 조성이 필요합니다.
이런 마당에 정목사님의 <속, 꽉> 이  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또한 이 다비아의 존재가치가 있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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