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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14) – 과부의 두 렙돈 기사는 헌금강조용인가?
눅 21: 1- 4
누가복음 21장 1- 4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과연 이 본문이 헌금에 관한 것일까, 헌금을 강조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래 들어온 설교들이 모두 그랬기에 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본문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이 과부처럼 정성껏 혹은 가진 것 전부를 헌금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연보궤에 연보 넣는 것을 보시고 다른 사람들이 많이 넣는 것 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크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공개적으로 칭찬하신 일이 이것이니 우리가 헌금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칭찬해도 되지 않는가?”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진 소유의 비율을 볼 때 과부가 바친 헌금은 전부입니다. 다른 부자들은 많이 바쳤습니다. 과부가 바친 돈에 비하면 엄청난 액수의 거액입니다. 그런데 부자들의 바친 많은 금액은 한마디도 칭찬하지 않고, 이 과부가 바친 적은 것은 왜 칭찬하셨을까요? 우리 인간들은 단순히 액수의 많고 적음만 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비율적으로 헌금액수로 보신 것입니다.”
그런 해석이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이 명쾌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하신 이 헌금 평가의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 말씀은 또한 오늘 우리의 헌금 생활을 반성하라는 뜻이 있지 않겠는가? 저 가난한 과부를 본받자. 하나님을 우리 영혼의 구주로 참으로 믿고 그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그에게, 그를 위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저 가난한 과부처럼 정성의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이 되자.”
이 본문이 과연 그러한 말씀인가 생각해보려고, 몇가지를 관찰하여 보았습니다.
본문 3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두렙돈 헌금하는 과부를 본 후에 그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신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본문이 마가복음(막 12: 41-44)에도 기록이 되어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 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막 12 :43)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 얘들아 내가 오늘은 너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마…. 내가 오늘 성전에 갔더니…’ 하면서 제자들에게 헌금은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들은 금과 은도 없거니와 두벌 옷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헌금을 할래야 헌금을 할 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앞으로 너희들이 성도들을 관리할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헌금을 하도록 가르치라고 하실 리도 없습니다.
또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로 돌아가 봅시다.
듣는 사람이 제자들이건, 아니면 다른 사람이든 유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여자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그런 말을 들었다면, 예수님 앞에서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먼저 했을까요?
‘아하, 저 여자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으니 나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니면
‘아니, 그렇게 생활비 전부를 헌금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얼 먹고 산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마 유대사람이라면 당연히 첫 번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고아와 과부는 특별 보호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과부를 돌보라고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그 과부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잘했다, 나도 그 여자를 본받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당시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가 ‘도대체, 그렇게 헌금을 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엇을 먹고 산단 말입니까? 그 여자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이런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서기관들은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 여자가 자기 생활비 전부를 헌금을 한단 말입니까? 서기관들과 부자들은 과부가 그렇게 헌금을 하는 것을 보고도 가만 있었습니까?’
따라서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헌금을 중요시 여겨 사람들에게 헌금을 가르친 말씀이라고 가르친 것이라 한다면
예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어버립니다.
이 본문은 결코 헌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그런 용도로 사용한다면, 한마디로 예수님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앞뒤 문맥을 한번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21장은 20장에 이어서 나오고 있으니 20장 마지막 구절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20장 45절-47절입니다.
47절, 그들(서기관)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원래 성경이 쓰여질 때에는 장, 절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장을 나누고 절로 구분하여, 성경을 찾고 읽는데 편리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장에 기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 경우 본문의 말씀은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참고로,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에서는 과부의 두 렙돈 기사가 12:41-44에 나오고, 그 다음 장인 13장 1- 3절까지는 성전이 무너진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0장 45절부터 예수님은 다가올 심판, 예루살렘의 멸망, 말세의 징조 등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맨 먼저 46절에서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바로 뒤(눅 21:5—6)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 개의 구절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20장 45- 47 서기관 …과부
21장 1- 4절 과부 …두 렙돈 헌금
21장 5절 성전 ..미석과 헌물
21잘 6절 성전 ….무너짐
그러니 이렇게 말을 이어가며 뜻을 해석해야 합니다.
20장 47절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21장 4절 (가산을 뺏긴) 과부들은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헌금을 하고….. ..
21장 5절 (그러한 과부들은 돌보지 않고) 성전은 과부가 헌금한 헌물로 호사스럽게 꾸며지고 ….
21장 6절 그러한 성전이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연결이 되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 율법학자들에게 경고하심으로 시작하여 성전이 무너질 것이다, 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중인데 중간에 본문을 뚝 떼어내어 헌금을 잘 하라는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면 이 얼마나 엉뚱한 해석입니까?
그러니 오늘 본문 과부의 두 렙돈 헌금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과부 즉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고, 또한 교회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제쳐두고 성전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등 하지 말아야 할 일에 골몰하여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는 교회를 향하여 경고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하여 딴 짓만 하면 교회를 허물어 버리겠다, 는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면,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특별히 본문 말씀이 교회 개혁을 위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교훈을 찾기는커녕 이 본문을 거두절미하고 뚝 떼어 내어 성도들에게 헌금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오용하고 있으니, 정말로 한국교회가 얼마나 매(?)를 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눅 21: 1- 4
누가복음 21장 1- 4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과연 이 본문이 헌금에 관한 것일까, 헌금을 강조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래 들어온 설교들이 모두 그랬기에 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본문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이 과부처럼 정성껏 혹은 가진 것 전부를 헌금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연보궤에 연보 넣는 것을 보시고 다른 사람들이 많이 넣는 것 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크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공개적으로 칭찬하신 일이 이것이니 우리가 헌금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칭찬해도 되지 않는가?”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진 소유의 비율을 볼 때 과부가 바친 헌금은 전부입니다. 다른 부자들은 많이 바쳤습니다. 과부가 바친 돈에 비하면 엄청난 액수의 거액입니다. 그런데 부자들의 바친 많은 금액은 한마디도 칭찬하지 않고, 이 과부가 바친 적은 것은 왜 칭찬하셨을까요? 우리 인간들은 단순히 액수의 많고 적음만 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비율적으로 헌금액수로 보신 것입니다.”
그런 해석이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이 명쾌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하신 이 헌금 평가의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 말씀은 또한 오늘 우리의 헌금 생활을 반성하라는 뜻이 있지 않겠는가? 저 가난한 과부를 본받자. 하나님을 우리 영혼의 구주로 참으로 믿고 그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그에게, 그를 위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저 가난한 과부처럼 정성의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이 되자.”
이 본문이 과연 그러한 말씀인가 생각해보려고, 몇가지를 관찰하여 보았습니다.
본문 3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두렙돈 헌금하는 과부를 본 후에 그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신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본문이 마가복음(막 12: 41-44)에도 기록이 되어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 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막 12 :43)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 얘들아 내가 오늘은 너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마…. 내가 오늘 성전에 갔더니…’ 하면서 제자들에게 헌금은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들은 금과 은도 없거니와 두벌 옷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헌금을 할래야 헌금을 할 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앞으로 너희들이 성도들을 관리할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헌금을 하도록 가르치라고 하실 리도 없습니다.
또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로 돌아가 봅시다.
듣는 사람이 제자들이건, 아니면 다른 사람이든 유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여자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그런 말을 들었다면, 예수님 앞에서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먼저 했을까요?
‘아하, 저 여자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으니 나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니면
‘아니, 그렇게 생활비 전부를 헌금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얼 먹고 산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마 유대사람이라면 당연히 첫 번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고아와 과부는 특별 보호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과부를 돌보라고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그 과부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잘했다, 나도 그 여자를 본받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당시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가 ‘도대체, 그렇게 헌금을 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엇을 먹고 산단 말입니까? 그 여자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이런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서기관들은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 여자가 자기 생활비 전부를 헌금을 한단 말입니까? 서기관들과 부자들은 과부가 그렇게 헌금을 하는 것을 보고도 가만 있었습니까?’
따라서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헌금을 중요시 여겨 사람들에게 헌금을 가르친 말씀이라고 가르친 것이라 한다면
예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어버립니다.
이 본문은 결코 헌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그런 용도로 사용한다면, 한마디로 예수님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앞뒤 문맥을 한번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21장은 20장에 이어서 나오고 있으니 20장 마지막 구절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20장 45절-47절입니다.
47절, 그들(서기관)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원래 성경이 쓰여질 때에는 장, 절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장을 나누고 절로 구분하여, 성경을 찾고 읽는데 편리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장에 기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 경우 본문의 말씀은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참고로,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에서는 과부의 두 렙돈 기사가 12:41-44에 나오고, 그 다음 장인 13장 1- 3절까지는 성전이 무너진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0장 45절부터 예수님은 다가올 심판, 예루살렘의 멸망, 말세의 징조 등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맨 먼저 46절에서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바로 뒤(눅 21:5—6)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 개의 구절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20장 45- 47 서기관 …과부
21장 1- 4절 과부 …두 렙돈 헌금
21장 5절 성전 ..미석과 헌물
21잘 6절 성전 ….무너짐
그러니 이렇게 말을 이어가며 뜻을 해석해야 합니다.
20장 47절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21장 4절 (가산을 뺏긴) 과부들은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헌금을 하고….. ..
21장 5절 (그러한 과부들은 돌보지 않고) 성전은 과부가 헌금한 헌물로 호사스럽게 꾸며지고 ….
21장 6절 그러한 성전이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연결이 되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 율법학자들에게 경고하심으로 시작하여 성전이 무너질 것이다, 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중인데 중간에 본문을 뚝 떼어내어 헌금을 잘 하라는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면 이 얼마나 엉뚱한 해석입니까?
그러니 오늘 본문 과부의 두 렙돈 헌금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과부 즉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고, 또한 교회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제쳐두고 성전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등 하지 말아야 할 일에 골몰하여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는 교회를 향하여 경고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하여 딴 짓만 하면 교회를 허물어 버리겠다, 는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면,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특별히 본문 말씀이 교회 개혁을 위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교훈을 찾기는커녕 이 본문을 거두절미하고 뚝 떼어 내어 성도들에게 헌금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오용하고 있으니, 정말로 한국교회가 얼마나 매(?)를 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007.08.17 23:20:28
두루박님, 바우로님, 댓글 감사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의외로 본문의 진실된 의미와는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알려진 것들이 많이 있더군요.
꿩잡는게 매라는 식으로 그저 눈앞에 보이는 그 어떤 것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자의적으로
읽어내는 어리석음을 얼마나 더 계속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위의 제 글도 아직 그런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의외로 본문의 진실된 의미와는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알려진 것들이 많이 있더군요.
꿩잡는게 매라는 식으로 그저 눈앞에 보이는 그 어떤 것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자의적으로
읽어내는 어리석음을 얼마나 더 계속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위의 제 글도 아직 그런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됩니다.
2007.08.21 17:42:40
목사님의 해석 너무나 감사합니다
과부의두렙돈 헌금때문에 전 늘 죄책감에 시달려 왔습니다
생활비가 없는 가운데서도 헌금을 해야한다는 부담감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과부의두렙돈 헌금때문에 전 늘 죄책감에 시달려 왔습니다
생활비가 없는 가운데서도 헌금을 해야한다는 부담감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2007.08.21 20:44:54
아침안개님, 그러고보면 저는 믿음(?)이 부족했나 봅니다.
위의 본문을 가지고 헌금을 강조하는 설교를 (목회자 되기 전에) 들으면서도 헌금을 해야지, 하는 부담감을 느낀 적은 없고 저 본문에서 저런 설교가 나올 수 있나 하고 안타까워했던 기억만 있습니다.
제 글을 읽고 마음이 가벼워졌다니 다행입니다.
위의 본문을 가지고 헌금을 강조하는 설교를 (목회자 되기 전에) 들으면서도 헌금을 해야지, 하는 부담감을 느낀 적은 없고 저 본문에서 저런 설교가 나올 수 있나 하고 안타까워했던 기억만 있습니다.
제 글을 읽고 마음이 가벼워졌다니 다행입니다.
2007.08.22 16:18:00
저도 한 때는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함을 얼마나 자책하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맘으로는 나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이오니 아버지가 필요로 하시면 언제든지 가져가시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필요없으시다네요.
구약성경에는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 된 자의 언급이 꽤 있습니다.
아마도 경제적 자립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복지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호되고 지켜져야할 과부가 두렙돈(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한 끼 식사비 정도)이 전 재산이었으니 그 사회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다 아니할 수가 없겠지요.
오늘날 내 주변, 우리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전 재산이 한 끼 식사비도 없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주님께서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무어라 하실지...
십일조 잘 한다고, 감사헌금 많이 한다고, 건축헌금 억수로 한다고, 절기 헌금 잘 한다고 칭찬하시겠습니까?
성전이 먼지하나 없이 다 사라졌는데, 오늘날의 대형교회는 그 자리가 보전되리라 여기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물론 대형교회만의 문제가 아니지요.)
지금도 맘으로는 나의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이오니 아버지가 필요로 하시면 언제든지 가져가시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필요없으시다네요.
구약성경에는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 된 자의 언급이 꽤 있습니다.
아마도 경제적 자립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복지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호되고 지켜져야할 과부가 두렙돈(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한 끼 식사비 정도)이 전 재산이었으니 그 사회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다 아니할 수가 없겠지요.
오늘날 내 주변, 우리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전 재산이 한 끼 식사비도 없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주님께서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무어라 하실지...
십일조 잘 한다고, 감사헌금 많이 한다고, 건축헌금 억수로 한다고, 절기 헌금 잘 한다고 칭찬하시겠습니까?
성전이 먼지하나 없이 다 사라졌는데, 오늘날의 대형교회는 그 자리가 보전되리라 여기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물론 대형교회만의 문제가 아니지요.)
2007.08.23 10:51:33
목사님의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말씀하시는 목사님들의 글을 대하다보면
우리가 처한 교회의 현실과 너무나 달라 매일매일 놀랍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해석을 하여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과
때론 15년이 지나도록 들어온 말씀이 이렇게 엉터리일수가 있을까 하는 분노와
누구의 해석이 옳은 해석일까
지금 심정은 당장이라도 이천년 당시로 돌아가 예수님께 여쭈어 보고싶은 심정입니다.
평소 그러려니하고 지나친 말씀이 하필 진부한 종교지도자들과 교회의 멸망에 대한 경고중에 끼어 있어
새삼 과부의 두렙돈에 대하여 묵상하였습니다.
묵상할수록 더워지네요(날씨도 덥고 열도 받고)
하여튼 감사합니다. 더운 일기에 건강하십시요
목사님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말씀하시는 목사님들의 글을 대하다보면
우리가 처한 교회의 현실과 너무나 달라 매일매일 놀랍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해석을 하여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과
때론 15년이 지나도록 들어온 말씀이 이렇게 엉터리일수가 있을까 하는 분노와
누구의 해석이 옳은 해석일까
지금 심정은 당장이라도 이천년 당시로 돌아가 예수님께 여쭈어 보고싶은 심정입니다.
평소 그러려니하고 지나친 말씀이 하필 진부한 종교지도자들과 교회의 멸망에 대한 경고중에 끼어 있어
새삼 과부의 두렙돈에 대하여 묵상하였습니다.
묵상할수록 더워지네요(날씨도 덥고 열도 받고)
하여튼 감사합니다. 더운 일기에 건강하십시요
2007.08.23 19:52:06
All-live 님, thinkbible 님, 댓글 감사합니다.
위의 글을 오랜 생각 끝에 쓰기는 했지만
읽으시고 여러 분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그냥 스쳐가는 생각으로 이해하시고, 덥도록(?) 묵상하지 마시기 부탁드립니다.
위의 글을 오랜 생각 끝에 쓰기는 했지만
읽으시고 여러 분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그냥 스쳐가는 생각으로 이해하시고, 덥도록(?) 묵상하지 마시기 부탁드립니다.
2007.08.23 21:12:56
목사님이 죄송하실 것이 무엇입니까?
틀린 말씀 하신 것도 아니고, 그렇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요.
혼란 일으키실 분(?) 별루 없을 겁니다.
물론 그리 오래 묵상할만큼 중요하진 않지만, 교회생활에서는 중요한 문제인 것도 사실이지요.
thinkbible 님, 뭐 이런 문제가지고 예수님까지 찾으실것 까지야 없겠지요?
성령님이 이미 깨닫는 은혜를 주셨으니 그 의미를 다 아셨을듯...
틀린 말씀 하신 것도 아니고, 그렇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요.
혼란 일으키실 분(?) 별루 없을 겁니다.
물론 그리 오래 묵상할만큼 중요하진 않지만, 교회생활에서는 중요한 문제인 것도 사실이지요.
thinkbible 님, 뭐 이런 문제가지고 예수님까지 찾으실것 까지야 없겠지요?
성령님이 이미 깨닫는 은혜를 주셨으니 그 의미를 다 아셨을듯...
2007.08.23 21:52:13
감사한 일은 성령님이 이미 깨닫는 은혜를 주셔서 그 의미를 다 아셨을듯...하시다는 것,
겸하여 혼란 일으키실 분 별루 없을 거라는 말에 위안을 받습니다. 감사!!!!
겸하여 혼란 일으키실 분 별루 없을 거라는 말에 위안을 받습니다. 감사!!!!
2007.08.26 18:17:04
성경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두렙돈은 한고드란트이며 거스름돈 수준의 작은 화폐로 우리나라의 50원짜리 또는 100원짜리 동전쯤 되는 화폐입니다
고드란트는 4분의 1이라는 의미이며 한 앗사리온의 4분의 1의 가치를 가지고있습니다
참새두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고 참새 다섯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걸 보면 참새 네마리를 사면 한마리는 덤으로 주었는가 봅니다
그래서 한고드란트는 참새 반마리를 살수 있는 정도의 돈입니다
결국 과부가 성전의 연보함에 넣은 두 렙돈은 참새 반마리를 살수있는 작은 돈이며 그것이 하루 생활비라면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짐작이 갑니다
당시에 과부의 재산은 성전에서 관리하였고 과부는 성전에서 봉사하면서 일당으로 생활비를 받았는데 그들이 얼마나 수탈당하며 착취당하였는지 알수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도 내일 생활비를 몽땅 연보하여야하는 분위기를 만든 지도층에 대한 분노의 표현인것 같습니다
고드란트는 4분의 1이라는 의미이며 한 앗사리온의 4분의 1의 가치를 가지고있습니다
참새두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고 참새 다섯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걸 보면 참새 네마리를 사면 한마리는 덤으로 주었는가 봅니다
그래서 한고드란트는 참새 반마리를 살수 있는 정도의 돈입니다
결국 과부가 성전의 연보함에 넣은 두 렙돈은 참새 반마리를 살수있는 작은 돈이며 그것이 하루 생활비라면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짐작이 갑니다
당시에 과부의 재산은 성전에서 관리하였고 과부는 성전에서 봉사하면서 일당으로 생활비를 받았는데 그들이 얼마나 수탈당하며 착취당하였는지 알수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도 내일 생활비를 몽땅 연보하여야하는 분위기를 만든 지도층에 대한 분노의 표현인것 같습니다
2007.08.26 20:18:58
德松 님,댓글 감사합니다.
그 당시 과부의 생활모습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렙돈은 적은 금액인데, 그것이 생활비 전부였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당시 과부의 생활모습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렙돈은 적은 금액인데, 그것이 생활비 전부였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2007.09.25 13:55:58
목사님 죄송하지만 저는 도리어 목사님 말씀을 듣고 혼란스럽습니다. 많은 교회가 목사님께서 예를 드셨듯이 위 구절을 이 과부처럼 전 재산을 드리라는 식으로 해석했었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이죠? 목사님께서 위와 같이 주장하시는 근거가 있으신가요? 따지려는 것이 아니고 목사님들께서 서로 다른 주장을 펴시니 누구의 말씀이 맞는지 무지한 저로서는 감이 안와서 그러니 좀 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2007.09.26 22:14:51
근거를 대라 하시니, 저로서는 한대 맞은(?) 기분입니다.
제가 다소 길게 쓴 위의 글 속에 말 그대로 근거를 여기 저기 많이 거론했는데
그것들을 근거라 생각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허나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지금껏 생각해 오던 것과 그 방향이 다르니 조금은 당황하셨으리라 압니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여러가지 해석 방법을 사용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문맥을 파악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위의 구절도 일단 앞 뒤 구절과의 연결상,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에
예수님이 그 구절을 언급하신 이유가 느닷없이(?) 헌금을 강조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기에 제가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다른 분들 - 헌금을 강조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 의 말씀과 글을 제법 많이 듣고 또 본 기억이 나는데
그분들은 '뚜렸한 근거'없이 그렇게 해석을 하시더군요. 글쎄요...설교를 통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헌금" 관련 말씀들이 과연 제대로 된 해석인지 그 근거를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또 하나, '아침안개'님도 댓글에 그런 내용을 쓰셨지만 제 글을 읽으신 어느 권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교회 목사님들께서 그 구절을 설교하실 때마다 헌금을 그렇게 못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그 구절이 그렇게 해석이 되느냐고 하시며
괴로운 마음이 조금은 놓인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제가 다소 길게 쓴 위의 글 속에 말 그대로 근거를 여기 저기 많이 거론했는데
그것들을 근거라 생각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허나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지금껏 생각해 오던 것과 그 방향이 다르니 조금은 당황하셨으리라 압니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여러가지 해석 방법을 사용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문맥을 파악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위의 구절도 일단 앞 뒤 구절과의 연결상,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에
예수님이 그 구절을 언급하신 이유가 느닷없이(?) 헌금을 강조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기에 제가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다른 분들 - 헌금을 강조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 의 말씀과 글을 제법 많이 듣고 또 본 기억이 나는데
그분들은 '뚜렸한 근거'없이 그렇게 해석을 하시더군요. 글쎄요...설교를 통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헌금" 관련 말씀들이 과연 제대로 된 해석인지 그 근거를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또 하나, '아침안개'님도 댓글에 그런 내용을 쓰셨지만 제 글을 읽으신 어느 권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교회 목사님들께서 그 구절을 설교하실 때마다 헌금을 그렇게 못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그 구절이 그렇게 해석이 되느냐고 하시며
괴로운 마음이 조금은 놓인다고 말씀하시더군요.
2007.09.26 13:55:27
문맥에 의하여 설명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전체적인 해석에는 동의를 하지만 ,
그러면서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한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쨌거나 분명 예수님도 과부의 연보하는 태도를
칭찬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꺼내 천천히 읽어 보았습니다.
마가복음의 같은 부분(12장)도 읽어 보았습니다.
다시 읽어 보니 연보하는 태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의 해석처럼
약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는 교회를 질타한 말씀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
선입관이라는 것이 참 무섭습니다.
아마도 위의 paul님도 그래서 질문하신 것 같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먼저 본글 잘 읽어 보시고 이해하신 다음 질문하시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됩니다.
솔직히 질문 자체가 좀 황당합니다.
목사님의 해석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오 세용 목사님께서는 이미 충분히 그렇게 해석할 수 밖에 없는
논리적인 근거과 이유를 문맥을 통해 제시하셨습니다.
.................................................................................
사족입니다만
이렇게 새롭게 알게 되는 깨달음의 기쁨이 클 때에는
(제가 믿기로는 바른 해석이기에)
제 주변에 돌봄과 섬김으로 한평생을 보내신
신실하신 권사님 혹은 믿음의 교우들에게
저도 모르게 그 분들을 가르치려 하곤합니다.
마치 "당신들이 그동안 알고 있던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아셔야 합니다."
라는 태도로 말이지요.
휴...이 유혹을 지헤롭게 승화시켜야 할 텐데 말입니다.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미리 예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목사님의 전체적인 해석에는 동의를 하지만 ,
그러면서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한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쨌거나 분명 예수님도 과부의 연보하는 태도를
칭찬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꺼내 천천히 읽어 보았습니다.
마가복음의 같은 부분(12장)도 읽어 보았습니다.
다시 읽어 보니 연보하는 태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의 해석처럼
약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는 교회를 질타한 말씀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
선입관이라는 것이 참 무섭습니다.
아마도 위의 paul님도 그래서 질문하신 것 같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먼저 본글 잘 읽어 보시고 이해하신 다음 질문하시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됩니다.
솔직히 질문 자체가 좀 황당합니다.
목사님의 해석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오 세용 목사님께서는 이미 충분히 그렇게 해석할 수 밖에 없는
논리적인 근거과 이유를 문맥을 통해 제시하셨습니다.
.................................................................................
사족입니다만
이렇게 새롭게 알게 되는 깨달음의 기쁨이 클 때에는
(제가 믿기로는 바른 해석이기에)
제 주변에 돌봄과 섬김으로 한평생을 보내신
신실하신 권사님 혹은 믿음의 교우들에게
저도 모르게 그 분들을 가르치려 하곤합니다.
마치 "당신들이 그동안 알고 있던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아셔야 합니다."
라는 태도로 말이지요.
휴...이 유혹을 지헤롭게 승화시켜야 할 텐데 말입니다.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미리 예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2007.09.26 16:31:01
이거 참~ 오세용 목사님의 이 글을 왜 이제서야 읽었을까요..
정말..성서 해석은 아무나 하면 안되는 것 같습니다.
지식과 사랑 통찰이 최소한 갖추어졌을 때 시도해야 할 일이 해석이군요.
이런 것들이 결여된 성서 해석은 얼마나 엉뚱한 결과를 낳는지요...
오세용 목사님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
정말..성서 해석은 아무나 하면 안되는 것 같습니다.
지식과 사랑 통찰이 최소한 갖추어졌을 때 시도해야 할 일이 해석이군요.
이런 것들이 결여된 성서 해석은 얼마나 엉뚱한 결과를 낳는지요...
오세용 목사님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부탁드립니다..^^
2007.09.26 21:21:58
프리실라님, 추석 연휴기간중에도 다비아에 출근하시니 ....게다가 댓글을 달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신실하신 권사님 혹은 믿음의 교우들에게 저도 모르게 그 분들을 가르치려 하곤합니다.
마치 "당신들이 그동안 알고 있던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아셔야 합니다." 라는 태도로 말이지요.>
그런 생각 ....제가 요즈음 그런 지경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분들, 너무 신실하고 진지하게 신앙생활 하시는데....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그래서 제가 몹시 괴로운 .... 그래도 다비아에는 제 생각을 이해해 주시는 분이 계시니 좋습니다.
<신실하신 권사님 혹은 믿음의 교우들에게 저도 모르게 그 분들을 가르치려 하곤합니다.
마치 "당신들이 그동안 알고 있던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아셔야 합니다." 라는 태도로 말이지요.>
그런 생각 ....제가 요즈음 그런 지경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분들, 너무 신실하고 진지하게 신앙생활 하시는데....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그래서 제가 몹시 괴로운 .... 그래도 다비아에는 제 생각을 이해해 주시는 분이 계시니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