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16) –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 19-23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참으로 불쌍한 모습으로 모여 있는 장면이 먼저 눈에 들어 옵니다. 그 모습을 19절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
제자들은 지금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기들의 선생님은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서 잡혀서 돌아가시고, 자기들도 한번씩 혼쭐이 났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딴에 무언가 해보겠다고 잡혀가시는 예수님을 따라 가다가 그만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하고 쫒겨온 바가 있고 (마 26: 77, 막 14: 72)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다 도망했다(막 14: 50) 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한 청년은 벗은 몸에 홋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잡혀서 베홋 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을 친 일 등, 하여튼 제자들은 지금 혼쭐이 나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몇몇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오더니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 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등의 이야기를 와서 해 주었지만 (요 20: 18) 아직까지도 전체적인 상황 판단이 되지 않는 총체적 난국의 시간입니다. 그러니 자연이 두려운 마음이 들어 문까지 닫고 들어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홀연히 나타나십니다. “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19절 하반절)
그렇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고 말씀하시고 자기 몸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보낸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라는 말씀으로 그 만남을 마무리 하십니다. 그게 오늘의 본문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몇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이 됩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첫번째 나타나실 때에 그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중에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제자들에게 “내 손가락으로 못자국을 만져보고 내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 (요20: 25)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두번째 나타나셔서 그렇게 말하는 도마를 꾸짖으시면서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은 복되도다” 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다른 제자들에게는 예수님 몸을 다 보여주시고는 도마가 보고 싶다고 이야길 하니 도마만을 왜 그렇게 꾸짖으시는지가 첫번째 의문점입니다.

또 다른 의문점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냥 평범한 인사말처럼 들리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는 말을 왜
두번이나 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첫번째는 나타나자 마자 바로 말씀하시고(19절), 두번째는 제자들에게 자기몸을 보여주고 난 다음에 또 같은 말씀을 되풀이 하십니다.(21절)

그 첫번째 - 왜 도마를 그렇게 꾸짖으시는가? - 의문에 대한 해답은 누가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19 절 "이날 곧 안식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시고, 바로 20절에]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는 식으로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신 다음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바로 제자들에게 자기몸을 보여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그게 아닙니다. ( 눅 24: 36- 41 )

<36. 이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며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것이 있느냐 하시니>

요약을 한다면,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본인임을 밝혀도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인줄 모르고 무서워하는지라 자기 몸을 보여주시면서 그들을 안심시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몸을 보여주신 이유는 보여줄래서가 아니라, 그들이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두번째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 보지 못하고 믿는자들은 복되도다.” 하고 꾸짖으실 때에 다른 제자들도 실상은 모두 다 마음이 또 한번 찔렸던 것입니다.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제자들 대표로 도마가 예수님에게 혼이 나지만 실제로는 거기 다른 제자들도 이미 한번 꾸지람을 들었던 터라, 도마가 혼이 나니 자기들도 이미 같은 사유로 혼난 전력이 있는지라 몸둘 바 몰라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두번째 -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을 왜 두번씩 했을까? - 의문도 저절로 풀립니다.
첫번째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는 말씀을 하실 때에는 제자들이 정신이 없어서 그말씀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는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고, 또한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그래서 자기 몸을 보여주고 이제 조금 정신을 차리니까 그때 또 한번 같은 말씀을 해주신 것입니다. 같은 말을 두번 반복하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는 말이 보통 평범한 인사말이라면 굳이 다시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새벽에 친구 집엘 찾아갑니다.
문을 두드리니 친구가 졸린 눈을 부비면서 나옵니다. 안녕하신가? 하고 인사를 했지만 친구가 아직 잠이 덜 깨어 인사한
것을 못알아 듣습니다. 그러면 조금 시간이 흘러 친구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에 다시 안녕하신가 하고 인사를 합니까?
그렇지 않죠 ? 대부분은 그냥 넘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제자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난 다음에 안녕하신가 하고 다시 인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다시 ‘평강이 있을지어다 ‘ 라고 말했다는 것은 그말씀이 무언가 의례적인 인사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냥 안부를 말할 때에 다른 말을 사용했던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마10: 12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let your peace rest on it.)  이떄의 '평안'은 원어로는 aspasaste (greeting)로 다른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먼저 평강이란 말이 무엇입니까? 평안하고 강건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과 우리 가정의 전체 상태가 안녕한 것을 말합니다. 첫째는 육체적인 강건이요, 그 다음 정신적인 강건이요, 또한 영적인 강건을 모두 포함한 것이 바로 평강의 문자적 의미입니다.
그럼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강의 뜻이 이정도의 뜻에서만 그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거기에는 무언가 다른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의 기록에 의하면 제자들과 고별의식을 가집니다. 최후의 만찬을 엽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너무 안타까워서 여러가지로 다둑거려 줍니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 (13: 1)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 모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내용들입니다. 그 부분을 읽어보면 제자들을 그가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중에 14 : 27 에 예수님은 '평강'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기서 평안이란 말이 평강과 같은 말입니다. 영어로도 같은 말이고 또한 원어로도 같은 말을 사용했습니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미리 자기가 주려는 평강에 대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닌 평강 곧 하늘로부터 오는 평안 –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평강- 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럼, 왜 이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평강, 평안일까요?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올 수가 없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죄인들이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악으로 건널수 없는 강이 있어 하나님이 평화가 너희에게로 올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십자가에 달려 구속의 역사가 일어난후에는 하나님과 인간을 가로막았던 죄악의 장벽이 무너지고
이제야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에게 임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평강을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이게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강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죄악이 사함을 받아 누리는 그러한 평강을 말합니다.

죄지은 사람이 발 뻗고 잘 수 없다는 우리의 속담대로 예전에는 우리가 죄때문에 발뻗지 못하고 자던 죄인이었으나
이제는 그 하나님의 은혜로 죄인 아닌 자 되어 두발 쭉 뻗고 잘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평강이 누구에게나, 아무에게나 오는 것일까요?
애초에 그 평강은 예수를 이땅에 보내실 때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평강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중에 평화로다.” (눅 2:14)
여기의 평화가 평강과 같은 말입니다. 영어, 원어 모두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성탄절 카드에 자주 인용되는 이 구절은 땅에서는 모든사람에게 평화라고 한 게 아니라 그 앞에 단서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이라는 단서입니다.
이 말은 그 앞에 단어를 하나 더 넣어 해석을 해야하는데, 바로 “하나님”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 말은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다른 성경(아가페)에서는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만 평강을 주겠다, 라는 것입니다.
그 평강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에 해당되는지를.
여기서 우리는 각자 자신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 자신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에 속할까? '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만,  잃어버린 한마리 양의 비유를 통해서 바로 해답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주인이 일어버린 한마리 양을 찾은 뒤 (눅 15: 5) 찾은 즉 즐거워 양을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들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셨으며 10절에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양'의 존재였습니다. 우리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 산골짝 험한 데에서 찾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우리의 주인은 친구를 불러 모아 우리를 찾았다고 기뻐하며 잔치를 벌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찾은 양이 주인에게 기쁨이 되는 존재가 되었듯이 우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는 그러한 평화, 평강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예언되어 기뻐하는 사람에게 주기로 한 평강의 약속은 언제 이루어 졌을까요?
그 시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 평강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 해도 때가 되어야만 그 자격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 그때가 안되었다면 우리는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하더라도 그날로 그 학교의 학생이 되는것이 아니라 등록을 해야만 그 학교의 학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그러한 평강의 약속이 언제 이루어졌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하신 말씀중에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맡기긴 구속사업을 십자가상에서 달려 돌아가시는것으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시점이 바로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평강을 가지고 오게 되는 시점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하시는 것은 '지금까지 너희가 가지고 있지 못하던, 하나님과의 평화가 포함된 그러한 평강, 그것을 내가 다 이루었다. 이제부터 너희는 하늘이 주는 평강을 누리게 되었다'라는 공식 선언인 것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 넣어 예수님의 사역이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것을 승리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는 ‘이제 다 이루었다 ‘(요19: 30) 라고 말씀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사탄마귀로부터의 승리를 공식 선언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사망의 종노릇하였지만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었다. 이제는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는 해방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로마서 5장 1절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었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이런 의미이니 예수님께서 한번 이야기했다가 제자들이 겁에 질려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다시 한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하신 그 말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는 이제 우리에게 향하신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평강을 누릴 자격도 있거니와, 예수님께서 그것을 이미 이루었기 때문에 완벽하게 이제 그것을 누릴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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