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19) - 깨진 항아리에 물 담기 / 엡 1 : 3- 6

성경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말해주고 있는데, 인간은 완전한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하나님께 범죄하여 불완전한 존재,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3:23)

철학자들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플라톤은 ‘인간은 깨진 그릇’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굳이 철학자가 아닌 보통사람이라도 그 정도의 말은 다 알고 있는데, 인간을 그릇으로 비유한 말이 여기저기 발견되는 것을 보면 그 정도 개념쯤은 모두다 알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과 격언에도 “안에서 새는 바가지 나가서도 샌다”, “대기만성”, “그릇이 크다. 작다”, 라고 표현하는 말들은 모두 인간을 그릇으로 비유하는 말들입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깁니다. 왜 그렇게 속담이든 금언이든 간에 사람을 ‘그릇’으로 표현하기를 즐겨 하는가? 그것은 그릇 자체가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있는 내용물이 더 중요하기에 그렇습니다. 예컨대 같은 그릇도 그 속에 담겨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이름을 다르게 부릅니다. 보석을 담은 그릇은 보석함이요, 밥을 담은 그릇은 밥그릇이고 국을 담은 그릇은 국그릇입니다. 쓰레기를 담은 그릇은 무엇입니까? 쓰레기통이지요. 이렇게 그릇은 그 속에 담긴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이름을 다르게 부르듯이, 사람도 모두 겉 껍질은 같지만 그 안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기에 사람을 그릇으로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릇들이 내용물을 언제나, 어디서나 잘 담고 있느냐?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사람이기에 사람을 ‘깨진 그릇’이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은 그릇이긴 하되 깨진 그릇, 다시 말하면 흠 있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깨진 그릇에 내용물을 채울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그릇은 장식용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 무언가 담는 것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릇이 제대로 그릇 노릇을 하려면, 그 속에 무언가를 담을 수 있어야 하고, 채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릇이 깨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무언가 담으려는 노력을 하게 되는데, 몇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참, 이야기 전개상 ‘그릇’이라면 너무 막연하니까,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항아리’로 대치해서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쓰는 첫 번째 방법은 이것입니다. 이런 이야기 들어 보셨지요? 물병에 물이 반절이 들어있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물이 겨우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물이 절반이나 남았다”라고 말한다는 것.  같은 일도 생각하기에 따라 좋게 보이기도 하고 나쁘게 여겨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해 낸 방법은, 있는 사실은 그대로 두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만, 생각만 바꿔보자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을 ‘적극적 사고방식’이라 하고, 요즘에는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인데 그 책에서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방법입니다. 이런 방법을 깨진 그릇, 즉 줄줄 새는 깨진 항아리에 대입한다면 어떻습니까?
“새기는 하지만 항아리네, 이세상에 안 새는 항아리가 있나?” 또는 “아직도 반절이나 물이 남아있네” 하고 스스로 위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방법은 애초부터 깨진 항아리에 무엇을 채울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깨진 그릇(항아리)을 채우는 방법은, 콩쥐팥쥐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방법입니다. 깨진 항아리 옆에서 울고 있는 소녀, 알고 계시지요? 어머니는 언니와 같이 사또의 잔치자리에 가면서 말하기를 밭을 다 갈아놓고, 또 부엌에 있는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놓고 오너라….그래서 살펴보니 항아리는 깨진 항아리라 아무리 물을 가져다 부어도 붇는 족족 물은 새버리고, 또 밭을 가는데 쓰라고 주고 간 연장은 부러진 호미 한 자루. 이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두꺼비 한 마리가 나타나 항아리 깨진 부분에 등을 대고 막아서, 겨우 물을 채워놓고 ..또 밭도 황소가…그래서 콩쥐는 사또의 잔치자리에 참여하게 된다는 이야기…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항아리 깨진 부분을 등으로 막아주던 두꺼비도 유한한 생명체이니 언제까지나 그러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면 깨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최선의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달마야 놀자' 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산중 사찰에 조폭들이 숨어들면서 스님들과 부대끼면서 생기는 이야기입니다.  스님들과 조폭들 사이에 절에서 머무는 것을 놓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자 주지 스님이 제안하기를 내기를 해서 지는 쪽이 물러 나기로 합니다. 내기를 하는데, 여러가지로 겨루어 보지만 판가름이 나지 않자 마지막으로 주지 스님은 깨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쪽을 우승자로 하자는 과제를 내었습니다.

그래서 깨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기 위해 양쪽 모두 야단법석을 떱니다. 양동이로 가져다 붓고 또 다른 방법을 사용하여 물을 항아리에 붓지만 한발자국 뒤돌아서면 또 다시 빈 항아리가 되어 버립니다. 물 붓기에 골몰하던 사람들이 깨진 항아리를 앞에 두고 낙담하고 있을 때 뭔가 심상치 않은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이제 때가 되었다는 신호지요. 드디어 섬광 같은 깨달음이 한사람을 움직입니다. 항아리를 번쩍 들고 그 주인공은 물을 길어 날르던 연못으로 걸어갑니다. 그리고는 항아리를 힘껏 들어 연못에 던집니다. 깨진 항아리는 서서히 물속으로 가라앉고, 결국 깨진 항아리에 물이 가득 차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깨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방법을 세가지로 말씀 드렸는데 어떤 방법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첫 번째 방법, 있는 현상을 그대로 둔 채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보자는 방법은 그저 자기 위안에 불과합니다.
물론 힘든 일도 그것을 힘들지 않다고 생각하며 밝은 마음으로 살아가자는 차원에서 어느 정도 마음의 위로는 얻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그저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의 차이뿐이지, 물은 여전히 반절입니다.
조삼모사는 아침에 세 개 먹으나 저녁에 세 개 먹으나 먹은 것은 실상 똑 같습니다. 엎어 치나 메치나 결론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항아리가 물이 샌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물을 길어다 부으면 언젠가 물이 가득 차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물은 차겠지만 또다시 물을 새버리고 텅텅 비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아가라는 것은 일시적인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식으로 자기 마음의 자세를 바꿔 마음의 위안을 삼는 그러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두번째 방법, 두꺼비가 와서 항아리의 깨진 부분을 등으로 메워주는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두꺼비가 막아 놓은 항아리는 영원히 물을 채워놓는 항아리가 되었습니까? 아니지요. 두꺼비가 사라지고 나면 물은 새버립니다. 두꺼비가 등이 아파서 잠시 쉬었다 하자, 하면 항아리는 또 다시 빈 항아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두꺼비가 참을성을 발휘하여 꼼짝하지 않고 평생을 그대로 있다 해도 두꺼비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니 그런 방법은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이게 바로 인간이 기댈 수 있는 인간적인 방법 – 주의 신조, 이즘 등 일시적인 유행에 따라 –으로 메워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 역시 예수 믿는 우리로서는 취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깨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방법은 바로 세번째 방법에서 보는 것처럼 연못에 던져 넣는 것이 최선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엡1: 3- 7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곧 우리네 인간은 깨진 그릇들, 즉 깨진 항아리인데 그 깨진 항아리가 제대로 항아리 역할을 하려면 “예수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깨진 항아리는 아무리 해도 그 자체로서는 물을 담을 수 없으니 반드시 외부로부터 어떤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외부의 힘이라는 것이 첫번째와 두번째 방법에서 보는 것처럼 심리적인 자기 위안에 불과하거나 제한적이고 한계가 있는 것들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깨진 인생을 채우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때에 우리의 부족함은 채워지고, 우리의 깨어진 모습은 흠 없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표현하기를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가진 항아리가 넘치기는커녕 아무리 애를 써도 채울 수 없었는데 하나님을 만나니,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어주시니 내 항아리가 넘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어떤 사람입니까? 겉으로는 한 국가의 임금이었지만 실상 그는 깨진 항아리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많은 실수를, 죄를 지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서 고백하기를 ‘내 잔이 넘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는 우리가 깨진 항아리였지만 그래서 아무 쓸모 없던 그릇이었지만 예수 안에 있을 때에 이제 잔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기독교의 기본 진리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한 실패해서 바닥을 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근본에 있어서 똑 같은 사람, 즉 깨진 항아리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깨진 항아리일망정 그 안에 무언가 담아 인간의 본분을 다하려면 엡1: 3- 7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존재 안에 우리를 던져 넣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그릇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다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입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