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22) - 예수께 나와 그의 옷을 만져라 / 막5:25-34  

본문 앞과 뒤에는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고치시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그 사이, 즉 예수님이 야이로의 이야기를 듣고 그 집에 가려는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혈루병 든 여인을 고친 기사입니다.
이 여인이 앓고 있는 병은 혈루병입니다. 혈루증'이라는 병은 혈관 조직이 약하여 혈관의 틈을 통해 피가 몸 밖으로 나오는 병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만성 출혈증으로서 여인의 자궁 벽에 종기(boil)가 생겨 규칙적 또는 불규칙적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병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병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라고 생각하여 부정한 것으로 여겨 이 병에 걸린 사람을 멸시 천대하였고 완치될 때까지 사회로부터 격리시켰습니다.
  
(I)
먼저 이 여인이 그 병을 어떻게 고치게 되었는지 봅시다. 이 여인이 병을 고치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만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오기까지 그 과정은 어떠했을까요? 마치 옆집 놀러가듯 쉬운 일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이 여인이 예수님께로 오는 길은 정말 어려운 걸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을 더듬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치료받기 전 이 여인의 상태는 어떤 상태였나요? 이 여인의 병이 혈루병이라고 했고, 지금 병세는 어떻습니까?
마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막 5:26)  

병원에 열심히 다녔는데도 오히려 병은 더 나빠졌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은 이 병으로 12년동안 앓고 있습니다. 10년 넘어 병을 앓고 있으니 지치기도 했을 것입니다. 돈도 다 허비하였다고 합니다. 허비했다는 말은, 돈은 돈대로 썼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헛돈을 썼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대개는 포기합니다. 그러나 그냥 포기하기는 섭섭하고 자연이 이런 저런 생각으로 궁리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들은 크게 나누어 두가지 갈래였을 것입니다.

첫번째 갈래의 마음은 아예 병 낫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병원에도 다녀보고, 치료도 받을 만큼 받았다. 그래도 고치지지 않으니 그만 포기하자.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마가는 "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 5:26) 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이 여인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노력해도 소용없으니 이제는 그저 이대로 살다 죽자는 마음입니다. 누가 무슨 좋은 약이 있다해도 거들떠 보지 않는 것입니다. 12년 세월 동안 치료받는다고 몸은 몸대로 축나고 돈은 돈대로 다 썼습니다. 그러니 이제 지쳤으니 포기하자는 마음입니다.

또 다른 마음은, 그래도 12년동안 애를 쓰면서 들인 정성과 돈이 아까우니 그래도 한번 더 기다려 보자. 더욱 찾아보자. 혹시라도 어디에선가 병을 낫게 해 줄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기다려 보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러나 역시 이 마음도 어떤 구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저 막연한 희망입니다. 그래서 어디선가 무슨 소식이 있으면 달려가 보기는 하지만 항상 실망뿐입니다. 그러니 이제 살아있기는 하지만 병에 대해서는 아무런 구체적인 희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희망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마가복음 5 장 27절에 보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바로 그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소문이겠습니까? 좋은 소식입니다. 사람들이 그분에게 나가기만 하면 병에서 고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고 기쁜 소식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소문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면 사람들의 입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나오게 되었고 그결과 많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로마의 백부장도 그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 종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간 사람 중 한명입니다.

그런 소문을 들은 이 여인의 마음속에 이제 희망이 솟아 오릅니다. 내가 예수님만 만나기만 하면 이 지긋지긋한 병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이 흘러 넘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니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떳떳하게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는 처지입니다. 혈루병 걸린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완전히 치료될 때까지 사회로부터 격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여자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설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혼자 계실 때 찾아가면 되지 하고 기회를 노렸지만 예수님은 항상 사람들에게 둘려 싸여 계시니 도저히 접근할 엄두가 나지를 않았습니다. 이러자니 이게 걸리고 저러자니 저게 걸리고, 하여지간 일이 안되는 것입니다. 다시 포기하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이 여인의 마음속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떳떳하게 나가서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처지이니 저렇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오히려 나에겐 좋은 일이 아닐까? 저렇게 사람들이 몰려 있을 때에는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고 내가 혈루병이 든 여자라는 것을 모를 것이니 그때 살짝 예수님을 만지면 어떨까? 괜찮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 여인은 무릎을 쳤습니다. 그렇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분을 만지기만 하면,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분명히 그 분의 능력이 나를 고칠 수 있을 거야.
마가복음 5장 28절에 이 여인의 생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

이런 생각 끝에 그녀는 드디어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그날도 역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그날에 회당장 야이로가 와서 자기의 열두살 난 딸이 죽어가고 있으니 고쳐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회당장은 그 지역의 유지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그사람에게 쏠리고 예수님이 이제 그 집으로 가시려는 도중이니 아무도 이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로 기회가 온 것입니다. 지역 유지의 딸이 아프다니까 사람들이 모두 다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되는지를 보려고, 예수님과 함께 그 집으로 가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이 장면을 마가복음 5장 24절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에워싸 밀더라"라는 표현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예수를 좇으며, 더욱 예수께 접근하기 위해 계속 몸을 부딪히는 혼잡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때는 이때다 하면서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 장면을 마가복음에는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여자가 일부러 사람들 가운데 끼어 들어 와 사람들에게 밀리는 척하면서 뒤로 다가가 예수님을 만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얼마나 실감나게 그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을 그대로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것처럼, 행동 하나 하나를 아주 실감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다시 이 여자의 행동을 정리해 봅시다.
맨 먼저 이 여자의 마음 속에는 희망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살고 있기는 하지만 숨이 붙어 있으니 사는 것이지 구체적인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소문을 들었고 그리고 예수님 만날 방법을 열심히 연구해서 찾았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그렇게 찾으니 드디어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드디어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찾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옷을 만졌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을 그만큼 믿었던 것입니다.

(II)
자, 그러면 그 믿음의 결과, 이 여자가 예수님의 옷을 만진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도록 하십시다.
누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눅 8:44)

마가는 이 여인이 병이 낫는 장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 (막 5:27-29)

그 여인이 예수님 옷을 만지는 즉시 나았다는 것입니다. 12년동안 고생하던 그 병에서 순식간에 나았습니다.
돈도 일전 한푼 들이지 않고 그냥 예수님의 능력만 믿고 예수님을 만졌더니 나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병이 나은 것을 자기가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니 몸에 확실히 차도가 생긴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예수님의 능력입니까? 우리의 주님 되시는 예수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이 여인은 그렇게 병에서 나았습니다. 이제 이 여인은 집에 돌아가면 됩니다.

자, 그런데 이야기가 다 끝난게 아닙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갑자기 예수님이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누군가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지금 야이로의 딸이 죽네 사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데 다른데는 신경쓰시지 말고 그냥 길을 계속 가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찾으시는지 주위를 두리번 거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사람들은 영문을 몰라도 당사자인 그 여인은 혹시라도 나를 찾는 것은 아닐까 하고 가슴을 졸이기 시작합니다. 그냥 지나가시면 좋을텐데, 하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누가 내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 소리에 그만 그 여인 간이 철렁 내려 앉았습니다. ‘아이쿠머니! 어쩜 그것을 알아채렸노?’
그래도 지금 나설 때가 아닙니다. 그냥 숨어 있으면 길이 바쁘니 그냥 가시겠지, 생각하고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나오시면 제자된 도리로서 무언지는 몰라도 같이 찾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인데 이렇게 말합니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막 5: 31)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밀리는데 누가 일부러 예수님 옷을 만졌겠습니까? 딴소리 마시고 빨리 갑시다, 라는 핀잔이 섞인 말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을 몰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언가 하시면 어떤 깊은 뜻이 있겠지 생각하고 동참해야 하는데 완전히 딴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핀잔을 들어가면서도 예수님은 누군가를 계속 찾고 계십니다.
마가복음 5장 3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시려고 둘러보시니”

‘둘러 보시니’ 라는 말은 일부러 찾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냥 건성으로 둘러 보시는게 아니라 숨어 있는 그림을 찾듯이 그여인을 애써 찾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니 이제 그 여인이 하는 수 없이 나설 수 밖에 없습니다.
마가복음 5장 33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님은 왜 그렇게 여인을 찾았을까요?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핀잔까지 들어가면서, 또 지금 한시라도 급하게 야이로의 집에 가야 하는데 왜 그여인을 찾았을까요?
이미 예수님은 자기 능력이 밖으로 나간 것을 아셨습니다(막 5: 30). 그리고 능력이 나갈 때에 바로 그 여인의 병이 나은 것도 아셨습니다. 또한 여인이 어떤 병으로 고생했는지도 아셨습니다.
그러면 그냥 가시던 길을 계속 가시면 되는데, 여인을 찾아서 공치사를 듣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아무리 길이 바쁘더라도 고맙다는 소리는 듣고 가야겠다, 는 생각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여인을 너무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찾으신 것입니다.
그병이 어떤 병인가를 알기 때문에 일부러 그 바쁜 중에서도 걸음을 멈추시고 여인을 찾으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 여인의 병이 바로 혈루병이라 했습니다. 그병에 걸린 사람은 완쾌될 때까지 사회로부터 격리를 당했기 때문에 그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게는 그 병에서 나았다고 공포해 주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그병에서 나은 사람이 그 뒤로 다른 사람과 어울릴 수 있고 자유롭게 사회생활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 여자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비록 몸은 나았으나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사회로부터 격리당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알리려면 또 다시 번거로운 절차를 밟아야 헙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찾아내, 이 여인이 병에서 나았다는 것을 공포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5:34)

예수님이 치유받은 여인에게 공개적으로 내린 구원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가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에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지닌 "믿음" 때문에 완전한 회복과 구원을 얻은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요?
이 여자는 예수님이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난관을 뚫고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 옷을 만진 것입니다. 그 믿음이 행위로 옮겨졌을 때 이 여인은 가장 절망적 문제였던 혈루증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이런 치유를 체험함으로서 질병으로 인한 모든 육체적 고통과 자신이 부정한 죄인이라는 정신적. 영적 굴레로부터 이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바쁘신 걸음을 멈추시고 여인을 찾아내신 이유입니다.

또한 이 여자는 예수의 요구로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부끄러운 병과 그 기적적 치유에 대한 모든 사연들을 사람들앞에서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신앙간증입니다.
이 신앙간증으로 이 여자는 자기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냈지만 결과적으로 예수의 크나큰 능력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찬양하는 일이 되었으며 또 자기가 완전한 정상인이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일이 되기도 했으니 그 신앙간증은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효과를 본 셈입니다.

이 사건과 예수님이 행하신 다른 기적사건을 비교해 보면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이 여자의 병이 나았다는 것을 공포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귀신이 들어 발작을 일으키던 아이를 고쳐준 사건을 마가복음 9장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막 9:25)

예수께서 어떤 귀신들인 소년을 치료해 주시려는데 그것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모이기 전에, 와서 보기 전에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귀신이 소년에게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 등 발작을 일으키게 하니 그소년이 깨어날 때마다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나이 어린 소년이 몸은 몸대로 아프고 발작할 때마다 그 것이 마음에 상처가 되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그 소년과 그 아버지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얼른 그 귀신을 쫒아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소년은 남들이 볼새라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얼른 고쳐주셨고, 본문 여인의 경우에는 본인은 감추려 했으나 다른 사람들이 다 알도록 불러 세우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들의 질병을 다 아시고 고쳐주시는데, 한꺼번에 싸잡아서 고치는게 아니라 각각의 상황에 맞게 해주십니다.
각각 병자의 상황을 고려해서 숨길 것은 숨기고 나타낼 것은 나타내 주시며 그래서 그병자가 완전히 사회에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렇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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