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00
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 (21)
- 목사가 CEO라 불려도 좋은가?
리더는 어떻게 사는가? 아니 리더는 어떻게 살아야 될까? 리더십 주장자들의 견해를 열심히 따라 해서 이제 리더가 되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궁금할 것이다. 과연 리더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리더의 매일 매일의 일과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그것을 알고 싶은 분은 빌 하이벨스 목사의 <리더십의 용기>라는 책을 읽어볼 것이다.
그 책에는 리더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세히 나와 있다.
그 책에서 빌 하이벨스 목사는 자기가 리더로서 살아 가는 모습을 의외로 많이 묘사하고 있다.
먼저 그가 교회 밖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살펴보자.
활발한 대외활동이다. 그 중에서도 정부 고위직, 유명인사와의 만남이다.
<1990년대, 나는 8년 동안 정부 고위관리들을 만나기 위해 매달 워싱턴 D.C를 방문했다. > (18)
<몇 해 전, 당시 부통령 앨 고어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국회에서 명예훈장을 수상하는 자리에 나를 초대했다.> (79)
<얼마 후 나는 노스 캘로라이나 몬트리트에 있는 그(빌리 그레이엄)의 집을 방문했다.> (79)
그는 또 다른 교회들을 방문하여 집회를 가지기도 하고 교회를 연구하기도 한다.
<1980년대 중반 나는 여기저기를 여행하면서 교회들의 차이를 살폈다.> (21)
그가 방문했던 도시들은 미국 국내의 도시들뿐만이 아니다. 북아일랜드, 남아프리카, 영국, 캐나다 등등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다.
<최근 캐나다에 있는 WCA의 한 목사에게 창립 10주년 설교를 부탁받고 그곳을 방문했다.> (32)
<몇 주가 지난 후, 나는 땅을 구입하고 싶어하는 한 교회로부터 설교 요청을 받았다.> (33)
<우리는 WCA를 통해 수백 번 회의를 한다.> (207)
그리고 다른 리더들과의 만남도 중요한 일이다.
<지난 몇 년동안 나는 여러 부류의 리더들을 만났다.> (23)
<나는 많은 교회를 방문한다. 그리고 많은 리더가 비전을 제시하는 흥분에 사로잡혀 있음을 본다.> (68)
<나는 다른 교회의 리더들과 리더십에 관해 토론하는 것을 즐긴다.> (129)
<여러 해 전에 WCA 연중 리더십 모임에서, 나는 처음으로 직원 고용에 대한 ‘3 C’를 소개하면서….>(193)
이제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살펴보자.
먼저 그는 수많은 회의를 주재하거나, 회의에 참석한다.
<몇 달이 지난 다음 교역자, 직원, 장로, 주요 평신도 리더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 ….> (56)
<여러 번의 회의와 철야기도 후에, 우리는 5개년 목표들을 교회의 성도들에게 알렸다.> (58)
<나는 교역자 회의에서 터프하고 빈틈없는, GE의 전회장 잭 웰치의 말을 인용해야만 했다.> (66)
<언젠가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직원회의에 참석했다.> (176)
<작년 장로회의에서 한 장로가 물었다.> (206)
리더들과의 회합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나는 리더십 팀 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우리 중 누가 …>(60)
<나는 행정 리더팀에게 말했다> (64)
수련회 역시 많다.
<최근 경영팀의 수련회에서, 나는 … ….>(93)
<다른 수련회에서 우리의 행정목사 그랙은 나와 팀원들에게 ….> (94)
그렇게 바쁜 시간을 쪼개 활동하려니 자연 스케줄은 비서가 관리하게 된다.
<나는 즉시 비서에게 스케줄을 조정하게 했다. 이틀 후에 우리 부부는 이제는 고인이 된 윌로크릭 초대 사역자인 톰의 부인 곁에 서있었다.> (77)
그가 교회안의 교역자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잠깐 엿보도록 하자.
<우리는 여러 해 동안 교역자들을 고용했고 그들에게 예산을 주며 말했다.> (65)
<내가 윌로크릭에서 직면하는 가장 복잡한 일 중 하나는, 성과가 저조한 부교역자들을 다루는 문제다.>(186)
<나는 최근 교회 복도에서 교역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 이와 비슷한 말을 들었음을 기억했다.> (63)
그럼 그는 휴가를 어떻게 보낼까?
<10년 전 여름, 학습을 위해 잠시 휴가를 얻은 나는 …> (24)
<윌로크릭 창립 20주년 행사 다음날 밤, 나는 내가 그들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한 친구의 도움으로 교회 창립자 부부중 네 쌍과 함께 카리브해의 섬으로 일주일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매일 수영하고 항해하고 해변을 산책했으며, 저녁에는 함께 앉아서 먹고 이야기하며 지난 세월을 추억했다.> (80)
자, 이 정도로 인용을 끝내기로 하자. 이 정도면 빌 하이벨스라는 리더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바로 그게 리더인 당신의 미래의 모습이다. 그 정도의 생활이라면 해볼만 하다, 는 어떤 뿌듯한 마음이 들지 않는가? 비록 분초를 쪼개어 뛰어다닐 정도로 바쁘게 살망정 그 정도는 리더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할 희생이리라.
그러나 그가 보내는 시간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자. 그가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은 대기업의 총수와 질적으로 같은 모습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빌 하이벨스, 그는 분명 목사이다. 그런데 목사로서 신도들과 대화하는 모습이라든가, 신도들의 고민을 위하여 같이 기도했다거나, 심지어 리더십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영향력을 신도들에게 끼치기 위하여 개별적인 접촉을 가지는 어떠한 일을 했다는 기록이 거의 없다. 물론 신도들과 접촉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설교후 잠간 동안의 만남이다.
<나는 교회에서 주말 설교를 마치고 영접실 앞에 서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신혼부부가 다가왔다.> (19)
설교를 끝마친 다음에 나가는 교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그 짧은 시간에 나누는 대화로는 그들과 깊은 관계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그런 모습으로 목회를 이끌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리더가 이러한 풍요로움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80) 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는 리더된 사람은 빌 하이벨스 자기처럼,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가? 그의 살아가는 모습이 당신이 생각하는 목회자의 모습인가?
당신은 그러한 빌 하이벨스가 부러운가? 그렇게 지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가? 그렇게 살기를 소원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분은 하루 속히 목사의 옷을 벗고 기업체를 운영하여 CEO가 되는게 좋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 교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사회로 나가는게 아니라 교회에서 여전히 리더의 위치에 있으며 이제는 교회를 경영조직처럼 운영하며 CEO의 모습으로 일하고 있다. 빌 하이벨스가 바로 그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상한 말을 하기도 한다. 그는 분명 목사인데도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는 것을 무슨 이유일까?
<나는 사업가의 가정에서 자랐고 사업문제로 중역들과 토론하는 시간을 즐겼다.>(182)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목회에 뛰어든 사람이다. 따라서 자기가 사업을 운영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게 단순한 번역상의 실수일까? 아니면 자기가 목사가 아니라 CEO라고 착각하는 것일까? 그래서 자기는 CEO 이고 장로들과 부교역자들이 중역으로 보이는 것일까?
그럼, 왜 그는 CEO 처럼 교회를 운영하고 있을까? 피터 와그너의 글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피터 와그너는 그의 책 <교회 성장을 위한 지도력>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
< 그러나 200명선을 넘어서 성장의 건전한 비율을 유지하려면 목회자는 높게 여겨지는 대가를 기꺼이 치러야 한다. 즉 목회자는 목자(shepherd) 의 형태에서 목장 경영자 (rancher) 의 형태로 기꺼이 바꿔야 한다. 나는 이 생생한 용어에 대하여 라일 E. 샬러에게 감사한다. 그는 텍사스주에 있는 한 장로교 목사가 즉석에서 한 말에서 그 용어를 찾아냈다. 목장경영자에 의해 인도되는 교회에서는 양은 여전히 돌보아지지만 목장경영자는 그것을 하지 않는다. 경영자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행하는 것을 본다.> ( 64쪽)
피터 와그너의 말은 CEO형 목사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말이다. CEO 목사란 목자가 아니라 목장 경영자이다. 빌 하이벨스가 한 말을 빌린다면 “여러 해 동안 교역자들을 고용”한 목사를 말하는 것이다. 목장 경영자는 양은 돌보지 않는다. 그대신 다른 사람이 양을 돌보는 것을 본다. 그래서 빌 하이벨스는 피터 와그너가 말한 ‘목장 경영주’로서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는 것이다.
비단 빌 하이벨스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CEO 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목사님들이 여럿 계시다.
이런 분들은 모두 다 피터 와그너의 목장 경영주 이론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터 와그너가 주장한 목장 경영주가 성경에서 말하는 목회자의 모습과 얼마만큼의 일치를 보이고 있을까?
성경에서는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하여 교인과 목회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다. 그러니 양과 목자에 관한 부분을 찾아 보도록 하자.
예수님은 친히 양을 치는 목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 10:1-5)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제자들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경고로 다가오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신다. 그것이 요한복음 10장 7절 이하의 말씀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10:14-15)
예수님은 또한 베드로를 불러 친히 ‘그의 양’을 맡기셨다.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21: 16)
성경의 어디에서도 양으로 비유된 하나님의 백성을 보살피는데, 양떼를 보살피는 목자를 고용해서, 그들이 양을 치는 것을 바라 보라고 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잠 27:23)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피터 와그너는 큰 실수를 했다. 성경말씀에 어긋나는 모습으로 목자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목자의 모습과 피터 와그너가 그려 낸 목사의 모습은 천지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심지어 예수님 자신도 목장 경영자란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기 위하여 고용한 다른 목자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친히 잃은 양을 찾으러 가시는 목자의 모습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목회자는 모름지기 예수님의 본을 받아 ‘직접’ 양을 치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
그럼 과연 나 자신이 지금 목자인가 아니면 목장 경영자인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천안대의 장동민 교수는 그의 글 <목회의 목적을 다시 점검한다>에서 목회의 중심이 사람 중심인가, 교회 중심인가에 관한 판단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하는데, 이 방법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지난 한 주간 동안 대화한 사람은 누구이며 그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부교역자와 성도 심방에 대해 보고받고, 관리 집사와 교회 정수기 점검에 대해 이야기하며, 장로 두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내년도 예산 편성에 들어가야 할 항목에 대해 부탁하고, 구역장 집사들과 둘러앉아 내년도 사회 봉사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전부라면 그 목회자는 사람 중심이 아닌 교회 중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심방하면서 어떤 대화를 나눴는가? 교회 생활하는 데 별 문제가 없는지를 점검하고, 교회에 더욱 충성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고 심방을 마쳤다면, 이 역시 성도들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정 심방을 사용했을 뿐이다. 물론 교회의 최고 책임자로서 목회자가 이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 수 없고, 교회의 관리에 대해 지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목회자라면, 성도가 규칙적으로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을 갖고 있는지, 자녀들의 공부와 신앙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 주고 있는지, 남편이 직장에서 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는지, 고난의 상황을 말씀으로 이겨나가고 있는지 성도의 실존적 삶과 관련된 문제를 중심으로 대화를 나눌 것이다. 물론 부교역자를 대할 때 다음 세대의 교회를 이끌어 갈 동역자이자 후배로서, 교회의 직원들에게도 피고용인이 아닌 사랑의 관심을 가질 것이다.”
위에 지적된 사항에 얼마나 해당되는지 점검해보라. 해당되는 사항이 많을수록 당신은 CEO 에 가까운 목회자이다.
리더십 주창자들이 그려내는 리더상은 빌 하이벨스가 그의 책에서 묘사한 그의 일상과 대동소이할 것이다. 교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노트북을 들고서 비행기를 타고 가는 장면, 정부 관리를 만나기 위해 교인과의 상담을 취소하고 바쁘게 출발하는 장면, 일정이 바쁘다 보니 모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선별해야 하고, 그 일정은 비서가 알아서 조정해주는 모습들, 수많이 모인 대중집회에서 연단에 올라 사자후를 토하는 당신의 모습, 혹시 당신도 그런 꿈을, 비전이라는 미명하에 가슴 한구석에 품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모습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목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영적 리더십을 주장하는 김광건 교수조차 이에 대한 경계의 말을 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다시 말하자면 여기에 지대한 위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즉 영적 리더의 C.E.O.화이며 이것은 결국 한국교회를 엄청난 영적 파탄으로 몰고 갈 수 있는 것이다.” ( CEO에서 선지자로 )
목사가 CEO 라고 불려도 좋을까? 글쎄, 당분간은 좋을지 모르겠지만 주님 앞에 가서도 그럴까?
주님께서 “내가 맡겨 놓았던 ‘내 양’을 어떻게 보살폈냐”고 물으신다면 뭐라 대답할까?
“저는 여러 해 동안 교역자들을 고용했고 그들에게 예산을 주며 양을 돌보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일중에 가장 복잡한 일 중 하나는, 바로 (양을 돌보는데) 성과가 저조한 부교역자들을 다루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른 일로 바빠 오래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 교회 복도에서 교역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 양들을 잘 돌보도록 당부했습니다.”
빌 하이벨스는 예수님에게 그렇게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당신도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가?
- 목사가 CEO라 불려도 좋은가?
리더는 어떻게 사는가? 아니 리더는 어떻게 살아야 될까? 리더십 주장자들의 견해를 열심히 따라 해서 이제 리더가 되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궁금할 것이다. 과연 리더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리더의 매일 매일의 일과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그것을 알고 싶은 분은 빌 하이벨스 목사의 <리더십의 용기>라는 책을 읽어볼 것이다.
그 책에는 리더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세히 나와 있다.
그 책에서 빌 하이벨스 목사는 자기가 리더로서 살아 가는 모습을 의외로 많이 묘사하고 있다.
먼저 그가 교회 밖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살펴보자.
활발한 대외활동이다. 그 중에서도 정부 고위직, 유명인사와의 만남이다.
<1990년대, 나는 8년 동안 정부 고위관리들을 만나기 위해 매달 워싱턴 D.C를 방문했다. > (18)
<몇 해 전, 당시 부통령 앨 고어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국회에서 명예훈장을 수상하는 자리에 나를 초대했다.> (79)
<얼마 후 나는 노스 캘로라이나 몬트리트에 있는 그(빌리 그레이엄)의 집을 방문했다.> (79)
그는 또 다른 교회들을 방문하여 집회를 가지기도 하고 교회를 연구하기도 한다.
<1980년대 중반 나는 여기저기를 여행하면서 교회들의 차이를 살폈다.> (21)
그가 방문했던 도시들은 미국 국내의 도시들뿐만이 아니다. 북아일랜드, 남아프리카, 영국, 캐나다 등등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다.
<최근 캐나다에 있는 WCA의 한 목사에게 창립 10주년 설교를 부탁받고 그곳을 방문했다.> (32)
<몇 주가 지난 후, 나는 땅을 구입하고 싶어하는 한 교회로부터 설교 요청을 받았다.> (33)
<우리는 WCA를 통해 수백 번 회의를 한다.> (207)
그리고 다른 리더들과의 만남도 중요한 일이다.
<지난 몇 년동안 나는 여러 부류의 리더들을 만났다.> (23)
<나는 많은 교회를 방문한다. 그리고 많은 리더가 비전을 제시하는 흥분에 사로잡혀 있음을 본다.> (68)
<나는 다른 교회의 리더들과 리더십에 관해 토론하는 것을 즐긴다.> (129)
<여러 해 전에 WCA 연중 리더십 모임에서, 나는 처음으로 직원 고용에 대한 ‘3 C’를 소개하면서….>(193)
이제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살펴보자.
먼저 그는 수많은 회의를 주재하거나, 회의에 참석한다.
<몇 달이 지난 다음 교역자, 직원, 장로, 주요 평신도 리더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 ….> (56)
<여러 번의 회의와 철야기도 후에, 우리는 5개년 목표들을 교회의 성도들에게 알렸다.> (58)
<나는 교역자 회의에서 터프하고 빈틈없는, GE의 전회장 잭 웰치의 말을 인용해야만 했다.> (66)
<언젠가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직원회의에 참석했다.> (176)
<작년 장로회의에서 한 장로가 물었다.> (206)
리더들과의 회합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나는 리더십 팀 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우리 중 누가 …>(60)
<나는 행정 리더팀에게 말했다> (64)
수련회 역시 많다.
<최근 경영팀의 수련회에서, 나는 … ….>(93)
<다른 수련회에서 우리의 행정목사 그랙은 나와 팀원들에게 ….> (94)
그렇게 바쁜 시간을 쪼개 활동하려니 자연 스케줄은 비서가 관리하게 된다.
<나는 즉시 비서에게 스케줄을 조정하게 했다. 이틀 후에 우리 부부는 이제는 고인이 된 윌로크릭 초대 사역자인 톰의 부인 곁에 서있었다.> (77)
그가 교회안의 교역자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잠깐 엿보도록 하자.
<우리는 여러 해 동안 교역자들을 고용했고 그들에게 예산을 주며 말했다.> (65)
<내가 윌로크릭에서 직면하는 가장 복잡한 일 중 하나는, 성과가 저조한 부교역자들을 다루는 문제다.>(186)
<나는 최근 교회 복도에서 교역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 이와 비슷한 말을 들었음을 기억했다.> (63)
그럼 그는 휴가를 어떻게 보낼까?
<10년 전 여름, 학습을 위해 잠시 휴가를 얻은 나는 …> (24)
<윌로크릭 창립 20주년 행사 다음날 밤, 나는 내가 그들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한 친구의 도움으로 교회 창립자 부부중 네 쌍과 함께 카리브해의 섬으로 일주일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매일 수영하고 항해하고 해변을 산책했으며, 저녁에는 함께 앉아서 먹고 이야기하며 지난 세월을 추억했다.> (80)
자, 이 정도로 인용을 끝내기로 하자. 이 정도면 빌 하이벨스라는 리더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바로 그게 리더인 당신의 미래의 모습이다. 그 정도의 생활이라면 해볼만 하다, 는 어떤 뿌듯한 마음이 들지 않는가? 비록 분초를 쪼개어 뛰어다닐 정도로 바쁘게 살망정 그 정도는 리더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할 희생이리라.
그러나 그가 보내는 시간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자. 그가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은 대기업의 총수와 질적으로 같은 모습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빌 하이벨스, 그는 분명 목사이다. 그런데 목사로서 신도들과 대화하는 모습이라든가, 신도들의 고민을 위하여 같이 기도했다거나, 심지어 리더십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영향력을 신도들에게 끼치기 위하여 개별적인 접촉을 가지는 어떠한 일을 했다는 기록이 거의 없다. 물론 신도들과 접촉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설교후 잠간 동안의 만남이다.
<나는 교회에서 주말 설교를 마치고 영접실 앞에 서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신혼부부가 다가왔다.> (19)
설교를 끝마친 다음에 나가는 교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그 짧은 시간에 나누는 대화로는 그들과 깊은 관계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그런 모습으로 목회를 이끌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리더가 이러한 풍요로움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80) 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는 리더된 사람은 빌 하이벨스 자기처럼,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가? 그의 살아가는 모습이 당신이 생각하는 목회자의 모습인가?
당신은 그러한 빌 하이벨스가 부러운가? 그렇게 지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가? 그렇게 살기를 소원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분은 하루 속히 목사의 옷을 벗고 기업체를 운영하여 CEO가 되는게 좋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 교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사회로 나가는게 아니라 교회에서 여전히 리더의 위치에 있으며 이제는 교회를 경영조직처럼 운영하며 CEO의 모습으로 일하고 있다. 빌 하이벨스가 바로 그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상한 말을 하기도 한다. 그는 분명 목사인데도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는 것을 무슨 이유일까?
<나는 사업가의 가정에서 자랐고 사업문제로 중역들과 토론하는 시간을 즐겼다.>(182)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목회에 뛰어든 사람이다. 따라서 자기가 사업을 운영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게 단순한 번역상의 실수일까? 아니면 자기가 목사가 아니라 CEO라고 착각하는 것일까? 그래서 자기는 CEO 이고 장로들과 부교역자들이 중역으로 보이는 것일까?
그럼, 왜 그는 CEO 처럼 교회를 운영하고 있을까? 피터 와그너의 글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피터 와그너는 그의 책 <교회 성장을 위한 지도력>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
< 그러나 200명선을 넘어서 성장의 건전한 비율을 유지하려면 목회자는 높게 여겨지는 대가를 기꺼이 치러야 한다. 즉 목회자는 목자(shepherd) 의 형태에서 목장 경영자 (rancher) 의 형태로 기꺼이 바꿔야 한다. 나는 이 생생한 용어에 대하여 라일 E. 샬러에게 감사한다. 그는 텍사스주에 있는 한 장로교 목사가 즉석에서 한 말에서 그 용어를 찾아냈다. 목장경영자에 의해 인도되는 교회에서는 양은 여전히 돌보아지지만 목장경영자는 그것을 하지 않는다. 경영자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행하는 것을 본다.> ( 64쪽)
피터 와그너의 말은 CEO형 목사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말이다. CEO 목사란 목자가 아니라 목장 경영자이다. 빌 하이벨스가 한 말을 빌린다면 “여러 해 동안 교역자들을 고용”한 목사를 말하는 것이다. 목장 경영자는 양은 돌보지 않는다. 그대신 다른 사람이 양을 돌보는 것을 본다. 그래서 빌 하이벨스는 피터 와그너가 말한 ‘목장 경영주’로서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는 것이다.
비단 빌 하이벨스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CEO 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목사님들이 여럿 계시다.
이런 분들은 모두 다 피터 와그너의 목장 경영주 이론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터 와그너가 주장한 목장 경영주가 성경에서 말하는 목회자의 모습과 얼마만큼의 일치를 보이고 있을까?
성경에서는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하여 교인과 목회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다. 그러니 양과 목자에 관한 부분을 찾아 보도록 하자.
예수님은 친히 양을 치는 목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 10:1-5)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제자들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경고로 다가오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신다. 그것이 요한복음 10장 7절 이하의 말씀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10:14-15)
예수님은 또한 베드로를 불러 친히 ‘그의 양’을 맡기셨다.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21: 16)
성경의 어디에서도 양으로 비유된 하나님의 백성을 보살피는데, 양떼를 보살피는 목자를 고용해서, 그들이 양을 치는 것을 바라 보라고 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잠 27:23)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피터 와그너는 큰 실수를 했다. 성경말씀에 어긋나는 모습으로 목자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목자의 모습과 피터 와그너가 그려 낸 목사의 모습은 천지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심지어 예수님 자신도 목장 경영자란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기 위하여 고용한 다른 목자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친히 잃은 양을 찾으러 가시는 목자의 모습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목회자는 모름지기 예수님의 본을 받아 ‘직접’ 양을 치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
그럼 과연 나 자신이 지금 목자인가 아니면 목장 경영자인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천안대의 장동민 교수는 그의 글 <목회의 목적을 다시 점검한다>에서 목회의 중심이 사람 중심인가, 교회 중심인가에 관한 판단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하는데, 이 방법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지난 한 주간 동안 대화한 사람은 누구이며 그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부교역자와 성도 심방에 대해 보고받고, 관리 집사와 교회 정수기 점검에 대해 이야기하며, 장로 두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내년도 예산 편성에 들어가야 할 항목에 대해 부탁하고, 구역장 집사들과 둘러앉아 내년도 사회 봉사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전부라면 그 목회자는 사람 중심이 아닌 교회 중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심방하면서 어떤 대화를 나눴는가? 교회 생활하는 데 별 문제가 없는지를 점검하고, 교회에 더욱 충성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고 심방을 마쳤다면, 이 역시 성도들을 ‘관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정 심방을 사용했을 뿐이다. 물론 교회의 최고 책임자로서 목회자가 이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 수 없고, 교회의 관리에 대해 지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목회자라면, 성도가 규칙적으로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을 갖고 있는지, 자녀들의 공부와 신앙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 주고 있는지, 남편이 직장에서 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는지, 고난의 상황을 말씀으로 이겨나가고 있는지 성도의 실존적 삶과 관련된 문제를 중심으로 대화를 나눌 것이다. 물론 부교역자를 대할 때 다음 세대의 교회를 이끌어 갈 동역자이자 후배로서, 교회의 직원들에게도 피고용인이 아닌 사랑의 관심을 가질 것이다.”
위에 지적된 사항에 얼마나 해당되는지 점검해보라. 해당되는 사항이 많을수록 당신은 CEO 에 가까운 목회자이다.
리더십 주창자들이 그려내는 리더상은 빌 하이벨스가 그의 책에서 묘사한 그의 일상과 대동소이할 것이다. 교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노트북을 들고서 비행기를 타고 가는 장면, 정부 관리를 만나기 위해 교인과의 상담을 취소하고 바쁘게 출발하는 장면, 일정이 바쁘다 보니 모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선별해야 하고, 그 일정은 비서가 알아서 조정해주는 모습들, 수많이 모인 대중집회에서 연단에 올라 사자후를 토하는 당신의 모습, 혹시 당신도 그런 꿈을, 비전이라는 미명하에 가슴 한구석에 품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모습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목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영적 리더십을 주장하는 김광건 교수조차 이에 대한 경계의 말을 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다시 말하자면 여기에 지대한 위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즉 영적 리더의 C.E.O.화이며 이것은 결국 한국교회를 엄청난 영적 파탄으로 몰고 갈 수 있는 것이다.” ( CEO에서 선지자로 )
목사가 CEO 라고 불려도 좋을까? 글쎄, 당분간은 좋을지 모르겠지만 주님 앞에 가서도 그럴까?
주님께서 “내가 맡겨 놓았던 ‘내 양’을 어떻게 보살폈냐”고 물으신다면 뭐라 대답할까?
“저는 여러 해 동안 교역자들을 고용했고 그들에게 예산을 주며 양을 돌보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일중에 가장 복잡한 일 중 하나는, 바로 (양을 돌보는데) 성과가 저조한 부교역자들을 다루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른 일로 바빠 오래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 교회 복도에서 교역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 양들을 잘 돌보도록 당부했습니다.”
빌 하이벨스는 예수님에게 그렇게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당신도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가?
2007.01.10 18:27:42
정말 예수님께서 성직자에게 양을 보살피라고 했는데 그러하였냐고 했을때, "목회"나 "사목"이 아닌 경영을 했다고 한다면 매우 부끄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07.01.11 09:49:41
작년 ... 한국에 릭-워렌이 왔을 시기에
이곳 호주 Hill Song -Curch에서는 빌- 하이벨스가 왔었고
두분 공히 교회 성장론에 이견이 없는
동일한 관점으로 바이블을 인용 했다고 그때 이 게시판에도 보고 드렸던것 같은데 ..
근디요, 힐쏭 ~처치, 대표이사께서는
서슴없이 자신을 호주에 내노라는 CEO로 소개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곤 합니다.
이것을 그곳 교인들은 그대로 소화(?)하고 있읍니다 .
대단한 예측과 성장의 경영-메니지먼트로 보게 된다는 것이죠.
(오래지 않아 미국과 같이, 정치발판이 되는 기독교 단체로
은혜롭게 변화(?변질)를 받을 것 같습니다.)
좌우지간, 한국인이나 호주인이나 ... 최면에 걸리면 ..... ㅋㅋㅋ
이곳 호주 Hill Song -Curch에서는 빌- 하이벨스가 왔었고
두분 공히 교회 성장론에 이견이 없는
동일한 관점으로 바이블을 인용 했다고 그때 이 게시판에도 보고 드렸던것 같은데 ..
근디요, 힐쏭 ~처치, 대표이사께서는
서슴없이 자신을 호주에 내노라는 CEO로 소개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곤 합니다.
이것을 그곳 교인들은 그대로 소화(?)하고 있읍니다 .
대단한 예측과 성장의 경영-메니지먼트로 보게 된다는 것이죠.
(오래지 않아 미국과 같이, 정치발판이 되는 기독교 단체로
은혜롭게 변화(?변질)를 받을 것 같습니다.)
좌우지간, 한국인이나 호주인이나 ... 최면에 걸리면 ..... ㅋㅋㅋ
2007.01.13 10:42:08
안녕하세요 목사님~
간간히 목사님이 쓰신 글을 읽어보긴 했었는데...
이렇게 칼럼방으로 옮겨지고 나서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깔깔 웃으며 읽기도 했지만 읽고 나니 참 씁쓸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오늘 새벽에 이른바 교회 리더 모임이란 것을 다녀왔습니다.
저희교회에서는 올해 부터 NCD라는 프로그램을 적용한다고 하더군요.
자연적 교회성장 원리가 8가지 있다고 하는데 그 내용보다 방법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 12리더를 세우고 그 리더들을 통해 셀 번식을 해서 교회 성장을 이룬다는게 취지인 것 같습니다.
그 첫 12리더에 제가 뽑혀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 성장이 곧 하나님 나라 확장이고, 셀리더가 먼저 교육받고 셀을 확장시켜서 새로운 리더를 세우고 또 그 리더가 새로운 리더를 세우고... 이렇게 하다 보면 교회가 자연적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희 교회 목사님께서는 자꾸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영적리더십에 의한 방법, 영성에 의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한참 설명을 하시고 저희 청년들에게 다 이해되죠? 라고 물으셨는데 저만 빼고 모든 청년들이 다 이해되었다고 하더군요. 혼자 이해 못한 저만 바보가 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정말 리더십에 입각한 목회를 하지 않으면 무언가 뒤쳐지는 교회가 될까봐 조급하신건지... 얼마전 새성전 입당을 했기에 부족한 좌석 수를 채우지 않으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시는건지...
그러는 가운데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자연스럽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이 발전하면 좋겠지만 세상적인 관리기술과 친교기술만 발달하지 않을까 걱정이됩니다.
목사님께서 해석해주신 마가복음 말씀... 정말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저희교회에서도 섬기는 리더가 되기 위해 이 프로그램을 한다고는 하지만 섬기는 리더라는 말 자체가 예수님 말씀과 어긋나 있다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교회의 덕을 위해 이 교육에는 계속 참여는 하겠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리더가 되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세상적인 관리기술을 발휘하고 있지 않을지... 항상 조심하고 깨어 있어야 겠습니다.
앞으로도 말씀에 입각한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립니다.
간간히 목사님이 쓰신 글을 읽어보긴 했었는데...
이렇게 칼럼방으로 옮겨지고 나서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깔깔 웃으며 읽기도 했지만 읽고 나니 참 씁쓸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오늘 새벽에 이른바 교회 리더 모임이란 것을 다녀왔습니다.
저희교회에서는 올해 부터 NCD라는 프로그램을 적용한다고 하더군요.
자연적 교회성장 원리가 8가지 있다고 하는데 그 내용보다 방법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처음에 12리더를 세우고 그 리더들을 통해 셀 번식을 해서 교회 성장을 이룬다는게 취지인 것 같습니다.
그 첫 12리더에 제가 뽑혀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 성장이 곧 하나님 나라 확장이고, 셀리더가 먼저 교육받고 셀을 확장시켜서 새로운 리더를 세우고 또 그 리더가 새로운 리더를 세우고... 이렇게 하다 보면 교회가 자연적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희 교회 목사님께서는 자꾸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영적리더십에 의한 방법, 영성에 의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한참 설명을 하시고 저희 청년들에게 다 이해되죠? 라고 물으셨는데 저만 빼고 모든 청년들이 다 이해되었다고 하더군요. 혼자 이해 못한 저만 바보가 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정말 리더십에 입각한 목회를 하지 않으면 무언가 뒤쳐지는 교회가 될까봐 조급하신건지... 얼마전 새성전 입당을 했기에 부족한 좌석 수를 채우지 않으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시는건지...
그러는 가운데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자연스럽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이 발전하면 좋겠지만 세상적인 관리기술과 친교기술만 발달하지 않을까 걱정이됩니다.
목사님께서 해석해주신 마가복음 말씀... 정말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저희교회에서도 섬기는 리더가 되기 위해 이 프로그램을 한다고는 하지만 섬기는 리더라는 말 자체가 예수님 말씀과 어긋나 있다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교회의 덕을 위해 이 교육에는 계속 참여는 하겠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리더가 되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세상적인 관리기술을 발휘하고 있지 않을지... 항상 조심하고 깨어 있어야 겠습니다.
앞으로도 말씀에 입각한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립니다.
2007.01.13 12:23:58
박상열님
그렇지 않아도 '좋은 316'이란 말에 대하여 설명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것 같아 망서리고 있었습니다.
'누가 물어봤냐구?' 라는 소리 들을 까 봐서.
여기 댓글로는 거시기 하니까 별도의 글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물어 봐 주신 것, 그래서 정말 감사!!!
그렇지 않아도 '좋은 316'이란 말에 대하여 설명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것 같아 망서리고 있었습니다.
'누가 물어봤냐구?' 라는 소리 들을 까 봐서.
여기 댓글로는 거시기 하니까 별도의 글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물어 봐 주신 것, 그래서 정말 감사!!!
2007.01.13 15:42:37
정말 수없이 많은 운동들이 밀물처럼 넘쳐나다가 어느새 썰물처럼 사라지는 모습들을 바라봅니다.
교회안의 여러가지 방법들 말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정신차리지 않으면 본질은 도외시한채
곁가지만 붙들고 있게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바우로, 스몰웨이, 봉크 3님 댓글 감사합니다.
지금 리더십 주창자들은 리더십의 안경을 쓰고서 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목적'에 이끌리는 성경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자연 무리수가 나올 수 밖에요.
분명 자기들 입으로 예수님은 리더십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 없다 하면서도
부득불 해석을 그런 식으로 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측은하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교회안의 여러가지 방법들 말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정신차리지 않으면 본질은 도외시한채
곁가지만 붙들고 있게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바우로, 스몰웨이, 봉크 3님 댓글 감사합니다.
지금 리더십 주창자들은 리더십의 안경을 쓰고서 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목적'에 이끌리는 성경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자연 무리수가 나올 수 밖에요.
분명 자기들 입으로 예수님은 리더십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 없다 하면서도
부득불 해석을 그런 식으로 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측은하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2007.01.13 20:54:24
목사님의 글을 매번 잘 읽고 있습니다.
제가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많이 고마운 것은
항상 제 머리속에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각해 오던 것들을
목사님께서 잘 정리해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 생각으로는 오늘의 이런 일반적 현상들은
목사님의 지적하심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계속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 본성에 관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란 결국 큰 것과 많은 것으로 대별되죠.
그것은 여과없이 교회로 흘러 들어 왔는데 그것이 곧 교회성장학 아니던가요?
성장이란 개념을 교회의 본질에서 이해하고 적용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일반적 개념, 곧 인간적 개념으로 쉽게 적용한 것으로 시작했기에
당시 교회 성장학자들의 주장 중에 교회의 성장 방법과 수퍼마켓의 방법이 같았다지요. 아마... ..
좋은 길목에, 넓은 파킹장, 좋은 메뉴, 눈에 띠는 선전 및 등, 즉 마케팅이었죠.
그 흐름을 주창했던 사람들이 아마도 교회성장학파들, 즉 명색이 신학자들인 사람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근데 근래에 어디서 들었는데 그들이 지금의 결과에 자신들로 놀라고 두려워 한다고 하던데.....
사실인지, 혹 그런 말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깊게 생각지 않았었고, 그래서 이렇게 큰 파급효과가 날 줄 몰랐다는군요.
그리고 그렇게 바람직한 모습도 아니라는 것을 이제 와서 깨닫는다는 것이죠.
하여간 어쨌거나 그런 빌 하이벨스나 릭 웨렌 같은,
뭐 이젠 한국에도 이미 많은 분들의 그런 모습들,
일반 CEO 들이 보여주는 것 같은 그런 폼나는 것 같은 모습들이
실은 우리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모습 아닌가요?
물론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마지막 그런 물음 앞에서는 아니겠지만
오늘 여기 이땅을 사는 대부분의 인간, 목사들에게는 부러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물론 예외가 아니구요.
제가 그래서 다른 분들도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다시 말해서 그런 모습이 우리 인간들이란 말이죠.
왜 이런 말을 꺼내는가 하면
이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란 생각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저는 우리 기독교 신앙생활의 핵심 원리가 마16장에 주님이 말씀하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다면 바로 그것이 이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란 생각입니다.
물론 이 성경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 입장도 나오겠지만
저는 다윗의 고백대로 우리 속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며
우리 육신에서 나온 이런 본성적 욕구를 죽이는 것이 곧 신앙생활이라고 보아서
결국 어떤 형태의 사역을 하던, 문제는 자기의 사역을 자기가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즉, 사역의 결과는 자기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는 것임을 알고
자기는 자기 사역의 원리와 내용 그리고 방향을 늘 점검하는
거기서 인간적인 욕망을 추구하려는 본성과의 부단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성공처럼 보이는 사역자나 그렇지 못한 자가 예외없이 해야하는 신앙생활의 핵심 내용인거죠.
전능하신 하나님,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시는 분께서
우리 연약하고 한계적인 인간들에게 사역을 맡기시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가 어떤 위대한 일의 결과를 만들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이런 상식적인 질문에서 그 답을 너무 간단하게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문제는 이런 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시각의 문제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쓰임을 받는 많은 분들에게서 발견되는 문제는
그런 분들이 자기 사역의 결과를 자기가 옳다고 믿고 그것을 합리화 하고
그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그것을 유일한 성공의 길처럼 전파한다는데 있죠.
오늘 일반적으로 교계에서 보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죠.
큰 교회 목사들이 주로 강사로 불려다니는 교회성장이란 미명의 세미나들,
그 분들은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를 쓰시는 한 방법이란 의식을 가지고
그러기에 다른 방법,
즉 오늘의 시각으로 볼 때 실패같아 보이는 모습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 대표적 모습의 성경 인물이 곧 예수님이시고 스데반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 분들에게서는 그런 겸손함이 보이지 않는다는데서 저는 이미 그들이 실패하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그런 분들에게서도 겸손함이 보이죠.
그런데 그들이 보이는 겸손은 겸손을 가장하는 것,
즉 일반적 개념의 겸손이지, 하나님의 다른 섭리를 인정하는 겸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서의 자기 부인과 십자가란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인정 받고 싶은 욕망, 곧 그것을 부인하고 죽이는 것이라고 보는데
그것을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자랑하는 모습이기 때문이죠.
그럴 때 생각나는 성구가 마태복음 7장의 거짓 선지자의 모습 아닐까요?
귀신을 쫓고, 능력을 행하고, 선지자 노릇한 그 모습이
아주 당당한 객관적 모습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 자기도 속고 있었던 것 아닐까요?
그러나 반면에 그렇지 못한 분들도 역시 예외가 아닌 것은
오늘의 시각에서 실패처럼 보이는 사역에 대한 것도
그것이 인간적 사고이지 신앙적 사고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지기 속에서 일어나는 실패감을 부인하는, 그것을 죽이는 영적 애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가 아니라 반대편을 부정하는 것으로 악을 쓰는 것은
실은 똑같은 교만함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두가지를 다른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쓰임받는 사람이 분명 있을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것도 분명 하나님의 또다른 섭리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만이 최선의 쓰임이고 반면 다른 것은 최소의 쓰임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것이죠.
그렇게 쓰임 받는 것이나 저 도서 벽지에서 몇 안되는 사람을 목회하는 분이나
하나님의 시각으로는 똑같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문제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얼마나 충성을 하는냐에 있는 것이지
그것의 규모나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바로 그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즉 우리 기독교 신앙적인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문제가 극복되지 않는 이상
그런 문제는 우리가 인간으로 이 땅에 사는 이상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많이 고마운 것은
항상 제 머리속에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각해 오던 것들을
목사님께서 잘 정리해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 생각으로는 오늘의 이런 일반적 현상들은
목사님의 지적하심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계속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 본성에 관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란 결국 큰 것과 많은 것으로 대별되죠.
그것은 여과없이 교회로 흘러 들어 왔는데 그것이 곧 교회성장학 아니던가요?
성장이란 개념을 교회의 본질에서 이해하고 적용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일반적 개념, 곧 인간적 개념으로 쉽게 적용한 것으로 시작했기에
당시 교회 성장학자들의 주장 중에 교회의 성장 방법과 수퍼마켓의 방법이 같았다지요. 아마... ..
좋은 길목에, 넓은 파킹장, 좋은 메뉴, 눈에 띠는 선전 및 등, 즉 마케팅이었죠.
그 흐름을 주창했던 사람들이 아마도 교회성장학파들, 즉 명색이 신학자들인 사람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근데 근래에 어디서 들었는데 그들이 지금의 결과에 자신들로 놀라고 두려워 한다고 하던데.....
사실인지, 혹 그런 말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깊게 생각지 않았었고, 그래서 이렇게 큰 파급효과가 날 줄 몰랐다는군요.
그리고 그렇게 바람직한 모습도 아니라는 것을 이제 와서 깨닫는다는 것이죠.
하여간 어쨌거나 그런 빌 하이벨스나 릭 웨렌 같은,
뭐 이젠 한국에도 이미 많은 분들의 그런 모습들,
일반 CEO 들이 보여주는 것 같은 그런 폼나는 것 같은 모습들이
실은 우리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모습 아닌가요?
물론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마지막 그런 물음 앞에서는 아니겠지만
오늘 여기 이땅을 사는 대부분의 인간, 목사들에게는 부러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물론 예외가 아니구요.
제가 그래서 다른 분들도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다시 말해서 그런 모습이 우리 인간들이란 말이죠.
왜 이런 말을 꺼내는가 하면
이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란 생각입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저는 우리 기독교 신앙생활의 핵심 원리가 마16장에 주님이 말씀하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다면 바로 그것이 이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란 생각입니다.
물론 이 성경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 입장도 나오겠지만
저는 다윗의 고백대로 우리 속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며
우리 육신에서 나온 이런 본성적 욕구를 죽이는 것이 곧 신앙생활이라고 보아서
결국 어떤 형태의 사역을 하던, 문제는 자기의 사역을 자기가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즉, 사역의 결과는 자기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는 것임을 알고
자기는 자기 사역의 원리와 내용 그리고 방향을 늘 점검하는
거기서 인간적인 욕망을 추구하려는 본성과의 부단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성공처럼 보이는 사역자나 그렇지 못한 자가 예외없이 해야하는 신앙생활의 핵심 내용인거죠.
전능하신 하나님,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시는 분께서
우리 연약하고 한계적인 인간들에게 사역을 맡기시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가 어떤 위대한 일의 결과를 만들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이런 상식적인 질문에서 그 답을 너무 간단하게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문제는 이런 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시각의 문제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쓰임을 받는 많은 분들에게서 발견되는 문제는
그런 분들이 자기 사역의 결과를 자기가 옳다고 믿고 그것을 합리화 하고
그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그것을 유일한 성공의 길처럼 전파한다는데 있죠.
오늘 일반적으로 교계에서 보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죠.
큰 교회 목사들이 주로 강사로 불려다니는 교회성장이란 미명의 세미나들,
그 분들은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를 쓰시는 한 방법이란 의식을 가지고
그러기에 다른 방법,
즉 오늘의 시각으로 볼 때 실패같아 보이는 모습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 대표적 모습의 성경 인물이 곧 예수님이시고 스데반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 분들에게서는 그런 겸손함이 보이지 않는다는데서 저는 이미 그들이 실패하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그런 분들에게서도 겸손함이 보이죠.
그런데 그들이 보이는 겸손은 겸손을 가장하는 것,
즉 일반적 개념의 겸손이지, 하나님의 다른 섭리를 인정하는 겸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서의 자기 부인과 십자가란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인정 받고 싶은 욕망, 곧 그것을 부인하고 죽이는 것이라고 보는데
그것을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자랑하는 모습이기 때문이죠.
그럴 때 생각나는 성구가 마태복음 7장의 거짓 선지자의 모습 아닐까요?
귀신을 쫓고, 능력을 행하고, 선지자 노릇한 그 모습이
아주 당당한 객관적 모습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 자기도 속고 있었던 것 아닐까요?
그러나 반면에 그렇지 못한 분들도 역시 예외가 아닌 것은
오늘의 시각에서 실패처럼 보이는 사역에 대한 것도
그것이 인간적 사고이지 신앙적 사고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지기 속에서 일어나는 실패감을 부인하는, 그것을 죽이는 영적 애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가 아니라 반대편을 부정하는 것으로 악을 쓰는 것은
실은 똑같은 교만함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두가지를 다른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쓰임받는 사람이 분명 있을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것도 분명 하나님의 또다른 섭리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만이 최선의 쓰임이고 반면 다른 것은 최소의 쓰임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것이죠.
그렇게 쓰임 받는 것이나 저 도서 벽지에서 몇 안되는 사람을 목회하는 분이나
하나님의 시각으로는 똑같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문제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얼마나 충성을 하는냐에 있는 것이지
그것의 규모나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바로 그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즉 우리 기독교 신앙적인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문제가 극복되지 않는 이상
그런 문제는 우리가 인간으로 이 땅에 사는 이상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