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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1) -- 아담은 공처가였을까?
“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
성경은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게 된 경위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지만 아담이 어떻게 해서 선악과를 먹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3장 6절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을 뿐입니다.
“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와가 선악과를 따 주었을 때 아담은 그저 말없이 먹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고 그러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그냥 먹었다는 것 밖에는 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그때에 아담은 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면서 시다, 떫다 일체 말이 없는 이유가 뭘까? 혹시 어쩌면 아담은 공처가가 아니었을까?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또 따서 아담에게 주었을 때 아담은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하와의 눈치를 보느라 그냥 군말없이 먹지 않았을까요?
“ 여보, 이것 먹어도 되는거야 ? “ 라고 물었을 때 “ 그냥 주는대로 먹어요, 우리도 하나님처럼 되어서 이땅에서 땅땅거리며 한번 살아봅시다” 라는 핀잔을 듣기 싫어서 그냥 말없이 먹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아담은 하와를 무서워하는 공처가가 아닐까 생각이 든 것이지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라 애처가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하와가 그 실과를 따먹고 그것을 아담에게로 가져 왔을 때 아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분명 하와는 죽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무서운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 아! 이제 하와는 죽는구나. 이를 어떻게 하나"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아담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하와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다. 하와는 이미 먹었으니 곧 죽을 것이다. 그러니 나도 먹고 하와와 함께 죽자."
그런 결심을 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마치 독약을 먹는 기분으로 아무 말 없이 하와가 가져온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아담은 하와를 목숨보다 더 사랑했다, 그러므로 애처가다, 이런 생각입니다.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자면 그렇게 해서 둘은 선악과를 먹고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이제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도 알게 되고 부끄러운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둘은 하나님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면 이제 자기들은 분명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바로 죽이시지 않았습니다
꾸짖기도 하시고 그들을 벌주셨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죽이시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는 장면에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3장 20절을 보십시요. “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우리말 성경으로는 그저 하와라 하였다, 영어에서는 이브라 하여 그 진정한 의미를 모르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 속에 아담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름을 아무렇게나 짓지 않습니다. 이름속에 이름짓는 사람의 마음을 담아 넣습니다.
예컨대, 모세가 광야에서 처가살이를 하면서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 이름을 뭐라 지었느냐면 게르솜이라 했습니다.
그 뜻이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 입니다. 그러니 그이름 속에는 내가 다른 나라 땅에서 나그네 같은 인생을 살고 있구나 하고 탄식하는 모세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출 2:22)
그것처럼 아담도 부인 이름을 하와라 지었는데 그 뜻은 ‘살았다,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둘을 불러 꾸짖으시고 그자리에서 죽이시지는 않고 에덴에서 쫒아 내셨습니다.
이 선고를 들었을 때 하와와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담은 외쳤을 것입니다.
"아! 우리가 살아났구나, 하와가 살았구나! 살았다! 하나님께서 살 길을 열어 주시는구나!"
히브리어로 "살았다"가 "하와"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지었습니다.
죽음의 고통을 지날 때 생명의 환희를 외치게 되듯이 선악과를 먹고 죽을 줄 알았던 부인이 살았으니 그래서 그 기쁨에 겨워 '하와'라 이름을 불렀습니다.
또한 죽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살게 되었으니 서로 얼마나 끔찍히 여기고 사랑했겠습니까?
그 두사람은 죽지 아니하고 에덴에서 쫒겨나 창세기 5장 4절과 5절의 기록에 의하면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부부는 적어도 구백년간을 같이 살았는데 만일 아담이 하와를 선악과 때문에 미워하며 살았다면 그 가정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무려 구백년간을 ‘저 인간 죽지도 않아’, ‘저 인간 때문에 내가 이모양 이꼴이지’ 하면서 미워하며 살았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인류의 조상되는 최초의 부부가 적어도 그런 모습은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아담은 에덴에서 하와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 때의 그 절박함을 매일 되새기면서 하와를 아까고 사랑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은 하와를 무척 사랑했구나, 하는 생각을 제가 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아담과 하와의 그런 모습을 상상하면서 만일 아담이 하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둘이 함께 한 구백년 인생이 얼마나 비참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만일 하나님이 우리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네 모습은 어떻게 되었을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우리 인간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더욱 사랑하셨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벌주시고 쫒아낸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무 가혹하셨다고들 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너무 사랑하셔서 죽을 인간을 살려주시고 또 구원하시려고 위대한 계획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창세기 3장 9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
성경은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게 된 경위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지만 아담이 어떻게 해서 선악과를 먹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3장 6절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을 뿐입니다.
“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와가 선악과를 따 주었을 때 아담은 그저 말없이 먹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고 그러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그냥 먹었다는 것 밖에는 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그때에 아담은 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면서 시다, 떫다 일체 말이 없는 이유가 뭘까? 혹시 어쩌면 아담은 공처가가 아니었을까?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또 따서 아담에게 주었을 때 아담은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하와의 눈치를 보느라 그냥 군말없이 먹지 않았을까요?
“ 여보, 이것 먹어도 되는거야 ? “ 라고 물었을 때 “ 그냥 주는대로 먹어요, 우리도 하나님처럼 되어서 이땅에서 땅땅거리며 한번 살아봅시다” 라는 핀잔을 듣기 싫어서 그냥 말없이 먹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니 아담은 하와를 무서워하는 공처가가 아닐까 생각이 든 것이지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라 애처가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하와가 그 실과를 따먹고 그것을 아담에게로 가져 왔을 때 아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분명 하와는 죽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무서운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 아! 이제 하와는 죽는구나. 이를 어떻게 하나"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아담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하와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다. 하와는 이미 먹었으니 곧 죽을 것이다. 그러니 나도 먹고 하와와 함께 죽자."
그런 결심을 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마치 독약을 먹는 기분으로 아무 말 없이 하와가 가져온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아담은 하와를 목숨보다 더 사랑했다, 그러므로 애처가다, 이런 생각입니다.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자면 그렇게 해서 둘은 선악과를 먹고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이제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도 알게 되고 부끄러운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둘은 하나님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면 이제 자기들은 분명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바로 죽이시지 않았습니다
꾸짖기도 하시고 그들을 벌주셨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죽이시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는 장면에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3장 20절을 보십시요. “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우리말 성경으로는 그저 하와라 하였다, 영어에서는 이브라 하여 그 진정한 의미를 모르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 속에 아담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름을 아무렇게나 짓지 않습니다. 이름속에 이름짓는 사람의 마음을 담아 넣습니다.
예컨대, 모세가 광야에서 처가살이를 하면서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 이름을 뭐라 지었느냐면 게르솜이라 했습니다.
그 뜻이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 입니다. 그러니 그이름 속에는 내가 다른 나라 땅에서 나그네 같은 인생을 살고 있구나 하고 탄식하는 모세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출 2:22)
그것처럼 아담도 부인 이름을 하와라 지었는데 그 뜻은 ‘살았다,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둘을 불러 꾸짖으시고 그자리에서 죽이시지는 않고 에덴에서 쫒아 내셨습니다.
이 선고를 들었을 때 하와와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담은 외쳤을 것입니다.
"아! 우리가 살아났구나, 하와가 살았구나! 살았다! 하나님께서 살 길을 열어 주시는구나!"
히브리어로 "살았다"가 "하와"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지었습니다.
죽음의 고통을 지날 때 생명의 환희를 외치게 되듯이 선악과를 먹고 죽을 줄 알았던 부인이 살았으니 그래서 그 기쁨에 겨워 '하와'라 이름을 불렀습니다.
또한 죽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살게 되었으니 서로 얼마나 끔찍히 여기고 사랑했겠습니까?
그 두사람은 죽지 아니하고 에덴에서 쫒겨나 창세기 5장 4절과 5절의 기록에 의하면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부부는 적어도 구백년간을 같이 살았는데 만일 아담이 하와를 선악과 때문에 미워하며 살았다면 그 가정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무려 구백년간을 ‘저 인간 죽지도 않아’, ‘저 인간 때문에 내가 이모양 이꼴이지’ 하면서 미워하며 살았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인류의 조상되는 최초의 부부가 적어도 그런 모습은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아담은 에덴에서 하와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 때의 그 절박함을 매일 되새기면서 하와를 아까고 사랑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은 하와를 무척 사랑했구나, 하는 생각을 제가 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아담과 하와의 그런 모습을 상상하면서 만일 아담이 하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둘이 함께 한 구백년 인생이 얼마나 비참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만일 하나님이 우리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네 모습은 어떻게 되었을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우리 인간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더욱 사랑하셨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벌주시고 쫒아낸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무 가혹하셨다고들 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너무 사랑하셔서 죽을 인간을 살려주시고 또 구원하시려고 위대한 계획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창세기 3장 9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2007.01.26 13:20:23
아마도 목사님 가정이 그렇게 정 목사님 말처럼 알콩달콩 사시는가 봅니다.
원래 본인이 그렇게 살면 다 그렇게 보인다던데
왜냐하면 저는 그렇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치 못했거든요.
저는 그렇게 알콩달콩스럽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근데 목사님의 글을 보면서
이런 생각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혹시 아담과 하와는 실은 죽음이 뭔지를 몰랐던 것은 아닐까?
뭐든지 다 처음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분명 뵈었을텐데
그렇다면 몇분의 하나님을 뵈었을까?
삼위의 하나님이 하나이신 것을 어떻게 느꼈을까?
그 모습을 보면서 자기 둘이 '한 몸을 이룰찌라'를 이해했을까?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데
창세 전에 그리스도가 전제된다는 의미는
그러면 인간이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인데
그래서 어떤 분은
인간의 구원까지도 즉 타락과 구원
그리고 교회를 통한 완성까지도
넓은 의미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과정이라고 보고
그 마지막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것이란 해석도 하던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원래 본인이 그렇게 살면 다 그렇게 보인다던데
왜냐하면 저는 그렇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치 못했거든요.
저는 그렇게 알콩달콩스럽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근데 목사님의 글을 보면서
이런 생각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혹시 아담과 하와는 실은 죽음이 뭔지를 몰랐던 것은 아닐까?
뭐든지 다 처음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분명 뵈었을텐데
그렇다면 몇분의 하나님을 뵈었을까?
삼위의 하나님이 하나이신 것을 어떻게 느꼈을까?
그 모습을 보면서 자기 둘이 '한 몸을 이룰찌라'를 이해했을까?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는데
창세 전에 그리스도가 전제된다는 의미는
그러면 인간이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인데
그래서 어떤 분은
인간의 구원까지도 즉 타락과 구원
그리고 교회를 통한 완성까지도
넓은 의미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과정이라고 보고
그 마지막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것이란 해석도 하던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2007.01.26 18:00:07
김목사님, 제가 미리 말씀드렸는데도 불구하고 질문이 너무 어렵습니다.
김목사님이 적당한 자리를 만들어서 조금 더 깊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창세기에 관한 책, 주석을 이것 저것 많이 보기는 했는데
지금 위에 말씀하신 내용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는군요.
다만 한가지, 에덴에서 아담, 하와와 하나님 사이에는 완벽한 소통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정녕 죽으리라, 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지금 여러가지로 해석하는 것과는 달리
'죽음'에 대한 완벽한 개념정립과 함께 아담 또한 그것을 완벽히 이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김목사님이 적당한 자리를 만들어서 조금 더 깊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창세기에 관한 책, 주석을 이것 저것 많이 보기는 했는데
지금 위에 말씀하신 내용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는군요.
다만 한가지, 에덴에서 아담, 하와와 하나님 사이에는 완벽한 소통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정녕 죽으리라, 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지금 여러가지로 해석하는 것과는 달리
'죽음'에 대한 완벽한 개념정립과 함께 아담 또한 그것을 완벽히 이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백년 인생이라,
알콩달콩 그렇게 그들이 살았다는 말이지요.
지금도 그런 정도의 세월을 부부로 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