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4) --  백부장의 종이 받은 복

[구정 설날을 맞아 다비안 여러분들의 가정에 만복이 깃드시기 기원합니다.
그 기원하는 마음으로 '복"에 관련된 설교를 한 편 올립니다.
이 설교는 지난 2006년 2월호 <월간 프리칭>에 실린 것으로서
'복'을 주제로 한 설교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썼던 설교입니다. ]

백부장의 종이 받은 복 / 마 8: 5~13

하나님은 사람들이 복 받고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 하나님이 그들, 곧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후에도 하나님은 계속하여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또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의 경우가 바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처럼 사람들이 복을 받고 살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복을 받고 살기를 원하시는데, 과연 우리들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지금 현재 자신이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시간에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인물을 통해서 그 사람과 우리 살아가는 인생을 비교하며서 우리가 받아야 할 복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현장에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비하여 분명 주인공 격으로 이름은 나오지만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백부장의 종입니다. 오늘은 평상시와는 달리 각도를 달리하여 현장에 나오는 인물들의 대화에 거론만 되는, 그러나 실상은 주인공인 인물, 백부장의 종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그 종은 마태복음에는 하인으로 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도 하인으로 되어 있으나 누가복음에서는 종이라 했다가(눅 7:2) 나중에는 하인이라고 (눅 7:7) 하기도 하니 여기서는 종과 하인을 구별하지 않고 같이 쓰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그 종의 인생살이가 어땠는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본문에 그 하인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가 중풍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오는 데에서 이야기는 시작이 됩니다. 그 종은 병이 든 것 때문에, 오늘 본문에 등장하지만 그 종에게도 병이 들기 전, 아프지 않던 시절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병에 걸리기 전에 그 하인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병에 걸리기 전에는 물론 건강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풍병에 걸린 것으로 보아 나이도 상당히 들었다고 봅니다. 중풍은 대부분 중년 이후에 걸리는 병이기에 그 종은 나이가 중년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면 사람 됨됨이는 어떨까요? 종에 대한 더 이상의 정보는 본문에 나와 있지를 않습니다. 본문에서는 백부장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것이 많지만, 하인이 어떤 사람인가, 사람 됨됨이는 어떤가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신분이 종이니 그 인생은 자기에 의해 결정되기보다는 그 상전이 되는 백부장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상전인 백부장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면 그 종의 인생살이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상전인 백부장부터 살펴보도록 합시다. 백부장은 로마 군인입니다. 로마 군인으로서 백부장이면 100명을 부하로 데리고 있는 군인입니다. 그렇다면 군인인 이 사람의 성격은 어떨까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군인이면 엄격하고 인정이 없는 그러한 성격일까요? 아닙니다. 본문의 여러 곳에 그 사람의 성격이 그렇지 않다는 기록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의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눅 7:2) 라고 기록된 것을 살펴봅시다. 그 당시 종은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받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백부장이 사랑하였다 하니 백부장은 종이라는 신분에 상관없이 그 종을 인간적으로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이 종을 정말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가 예수님을 만나 종의 병에 대하여 말하는 장면에서 입니다. 백부장은 그 종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에게 종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그저 아프다고 말한 게 아니라, 중풍병을 거론한 것으로 보아 그는 하인의 병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군대의 백부장이면 책임이 막중한 자리입니다. 따라서 집안일보다는 군대에 더 신경을 써야 하기에 집안 일 하는 종이 무슨 병으로 아픈가, 그리고 어느 정도 아픈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종의 병이 무엇이며 어느 정도 아픈지를 정확히 말합니다. 그만큼 종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백부장은 종이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한다고 말합니다.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는 말로 보아 백부장은 그 종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느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남의 죽을 병보다 자기 손가락에 가시 박힌 것이 더 아프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병으로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진정 자기가 아픈 것처럼 느끼기에 그것을 예수님께 고쳐주시기를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그만큼 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백부장의 다른 성격을 살펴봅시다. 마태복음에서 백부장이 말한 것을 살펴봅시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마 8:8)
이 말에서 두 가지를 알 수 있는데, 첫째는 백부장의 예수님에 대한 배려입니다. 예수님 입장을 헤아려주는 그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유대인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부정하다 하여 금기시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빌라도 충독이 예수님을 심문하는 장면을 보면,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있는 관정에 예수님이 붙잡혀 심문을 받고 있는데 정작 고소한 유대인들은 거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방인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들어가지 않고 대신 빌리도가 안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는 행동을 반복하며 예수님을 신문하며 유대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요 18:28~40) 그러니 총독인 빌라도조차 존중해주고 있을 정도로 유대인들은 그 관습을 엄격히 지켰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다스리는 나라는 피점령국의 사회, 문화에 대하여 연구를 많이 합니다. 그래야 다스리기가 편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한일합방시 일본은 우리나라를 점령하기 전에 우리나라의 역사, 사회, 문화 등 전반을 연구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삼았던 로마도 분명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백부장도 유대민족의 관습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예수로 하여금 이러한 번거로움을 끼치지 않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지 않아도 바리새인들에게 여러모로 공격을 받고 있는데 거기에 더하여 이방인의 집에 들어갔다는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인 것입니다.

둘째는 그가 보여주고 있는 겸손함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백부장의 종을 치료 주시기를 부탁하는 유대인 장로들이 나옵니다. 그 장로들이 백부장을 이런 말로 평가합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나이다”( He is worthy for you to grant this to him.) (눅 7:4)
다른 사람이 그렇게 자기를 높게 평가해주는데도 백부장은 자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I am not worthy that You to come under the roof.)(눅 7:6)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I did not even consider myself worthy to come You.)(눅 7:7)
백부장이 보여주고 있는 이 겸손함은 집 나갔던 둘째아들이 돌아와 아버지에게 한 말과 그 흐름이 같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I am no longer worthy to be called your son.) (눅 15:21)
‘감당치 못하다’란 말은 영적, 도덕적으로 몹시 부족함을 고백하는 말로서 어떤 권위 있는 대상에 대하여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느낄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는 분명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절대 거룩성을 알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로서 백부장의 겸손한 마음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 백부장의 겸손함을 읽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백부장은 상대방 입장을 헤아려주는 마음과 겸손함이 몸에 배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의 상전이 되는 백부장의 성격을 종합해보자면 그는 정이 많고, 종일지라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주는 인격자이며,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주는 사려 깊은 사람이며 또한 겸손하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성격이 좋은 사람인데, 그럼 재물 쪽은 어떨까요? 그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려주는 대목이 나오는데, 누가복음 7장 5절입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습니다.”
회당을 지어준 자금이 로마의 대민지원사업으로 쓰는 공금인지 아니면 개인 재산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유대인의 장로들이 로마 정부라는 말을 하지 않고 '저가' 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자금의 출처가 백부장의 개인 재산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유대인 장로들이 말하길 ‘그가 회당 짓는 데 애를 썼다’ 또는 ‘그가 회당 짓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백부장의 자신의 재산으로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토대로 하여 살펴볼 때에 인격자에다가 정이 많고, 그리고 권력과 재물이 많은 백부장을 상전으로 두었으니 백부장의 종은 종의 신분이었지만, 그 인생살이가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이가 되어 중풍병에 걸리기까지 백부장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지금 2000년 전의 종을 주인공으로 생각하려니 그 사람의 삶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이것을 현대의 상황으로 바꾸어 봅시다.

현대에서 경제활동을 하며 살고 있는 보통 사람은 실상 이 하인과 같은 처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대부분의 사람은 누구 밑에서, 또는 회사에서 일을 합니다. 회사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회사의 주인, 곧 회장 혹은 사장의 하인 노릇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현대의 용어로 ‘회사원’이고 ‘샐러리맨’이지 일하는 내용은 하인과 다름없습니다. 또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이라고 해도 다른 거래 업체와의 관계를 보면 마찬가지로 하인과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이 하인을 우리 시대의 샐러리맨으로 바꿔 생각해보면 그 인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주인공 샐러리맨이 다니고 있는 회사는 아주 튼튼합니다. 회사 운영이 잘되어서 회사 망할 염려가 없습니다. 또한 그 회사 주인이 세상적으로 권력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려고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또한 백부장이 종을 사랑했다는 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 종이 백부장을 얼마나 성심성의껏 섬기며 봉사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에게 사랑받을 만큼 그 하인은 성심성의껏 봉사했을 것이고 이것을 현대식으로 바꿔 말하자면 그 샐러리맨이 성실히 일을 해서 사장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승진도 하고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또 거기에다가 몸도 건강합니다.

자, 이러면 이런 사람을 우리가 보통 뭐라 평합니까? 그 사람 복이 있다. 사장을 잘 만나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게 된 것에 대하여는 인복이 있다고 합니다. 회사가 잘되니 월급도 올라가고 이제 돈 걱정은 없어집니다. 그러면 재물복이 있다 말합니다. 건강하니 이도 튼튼할 것이고 눈도 잘 보이고, 그래서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처럼,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백부장의 종은 복을 받아 누리고 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사람이 보기에는 정말 복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복이 이런 종류의 복일까요? 여러분은 이런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우리들이 이미 그 사람의 인생 다음 장면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그 하인을 복 받은 인생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 하인은 바로 그 다음에 중풍에 걸려 눕게 되니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단계에서 여러분에게 그런 복을 받으시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저주로 받아들이지 복이라고는 생각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그렇게 잘살던 하인이 이제 중풍에 걸려 눕게 되기에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종은 병에 걸렸는데, 지금 중풍으로 자리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중풍병이란 병이 그 당시로는 고치기 어려운 병이어서 백부장의 가진 재물로도, 백부장의 권세로도 고치지 못하고 집에 누워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현대적 개념인 샐러리맨으로 바꿔 생각한다면 정년퇴직할 나이도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중풍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중풍에 걸렸으니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합니다. 당연히 회사에서는 일을 못하게 되어 회사를 휴직하게 됩니다.

백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지 못했다면 그 하인은 그대로 병으로 고생하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죽었다면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초년, 중년에는 복이 있는 듯하더니 말년에는 지지리도 복이 없구만. 그렇게 고생하다 죽었으니….” “그러게 말이야, 그러니 사람팔자 시간문제라니까.”
그러니 사람이 누리는 복,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복은 얼마나 허무한 것입니까? 어제 있다가 오늘 없어지는 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복입니다. 그래도 여러분, 이런 복에 미련이 남아 있습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백부장의 하인은 지금 병에 걸려 누워있습니다. 복 대신에 화를 당해서 그는 인생의 지금 최대 위기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 되는 백부장이 어디로부터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드디어 이집에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들은 소문에 의하면, 예수님의 권능으로 병자들을 고친다는 것입니다. 그 소문을 그대로 믿고 백부장은 예수님을 만나 뵐 결심을 합니다. 자기 하인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난 백부장은 예수님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는데, 예수님이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며 믿음대로 되리라는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그때 하인은 나았습니다. 누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종이 강건하여졌더라고(눅 7:10)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던 심각한 병이 즉각적으로 치료가 되어 중풍병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상인처럼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였음을 가리킵니다. 이제 종은 정상인처럼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다시 화에서 벗어나서 복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현대 상황으로 말하자면, 그 샐러리맨은 다시 건강을 찾고 복직을 하여 사회생활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상전인 백부장의 믿음 덕분에 하인은 자기는 전혀 예수님을 만난 일도 없고,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는데 병에서 나았습니다. 건강하게 된 종은 집에 돌아 온 백부장으로부터 일의 자초지종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인이 중풍으로 앓아 누웠던 것이 복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생각했던 대로 화입니까? 병으로 고통 받고 있을 그 당시에는 그것이 고통이요 화라고 생각되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프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 병이 없었더라면 본인은 물론이고 상전인 백부장도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소문을 들었어도 당장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자로서 그 사건을 돌이켜본다면 그 병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 병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육체적인 건강과 아울러 이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건강할 때,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복 받아 잘살 때에는 거들떠보지 않던 영혼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병 때문에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 결과 이제 백부장의 종은 다윗이 시편 133편에서 말한 바 영생의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3)
그것은 또한 바울 사도가 말하는 신령한 복이기도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3~6)

그 병 때문에 백부장도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또한 하인도 예수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으니 그 병은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화가 아니고 그것은 오히려 축복중의 축복입니다.
저는 그 하인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백부장을 구원하여 그리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지평을 열기 위하여 그 하인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개입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하인은 이제 세상 사람이 부러워하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러한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이제 백부장을 살펴봅시다. 그는 한낱 종에 지나지 않는 사람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사랑하여 그 결과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의 처음 만남에서 권능을 체험하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믿음으로부터 받는 축복을 자기 혼자 누리는 게 아니라, 자기의 하인과 같이 누립니다. 아니 같이 누리는 게 아니라 실제적인 축복은 하인이 독차지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를 거쳐 복이 전해지는 믿음을 소유한 백부장의 모습은 바로 복의 근원이었던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창 12:2) 복의 근원이란 것은 복이 그 사람을 통해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시냇물이 흘러가며 그 주변의 땅을 골고루 적시듯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복을 주는 사람이 바로 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하등 믿음과 상관없는 하인에게 복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복의 근원이 되어서 그 하인에게 전달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하인이 병들기 전 누렸던 그러한 복입니까? 아니면 병들었다 나은 후 누리게 된 신령한 복과 그에 터 잡은 복입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복이 현세의 복이라면 중풍병에 걸리기 전에 하인이 누렸던 그러한 복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만 추구하는 신앙은 한계가 있습니다. 복을 추구하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은 기복(起伏)이 심합니다. 복을 받고 잘살 때에는 하나님이 축복하였다고 생각하며 믿음생활을 잘하겠지만, 어려움을 당하거나 실패하면 하나님이 계시네, 안 계시네 하면서 믿음의 동요가 있을 것이기에 기복(起伏)이 심한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려야 할 복이 무엇인가를 백부장과 그의 종을 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올해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복, 누리던 당시에는 복 같았으나 나중에 정신 차리고 보면 화가 되는 복은 받을 생각마시고 영생의 복, 신령한 복을 먼저 받으시기 원합니다.
백부장처럼 우리로부터 신령한 복이 남에게로 넘쳐흐르는 복의 근원이 되시고 백부장의 종처럼 신령한 복을 받아, 그에 터 잡는 복된 삶을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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