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 (26)
- 그들도 가끔씩은 본심을 말한다.  

리더십이란게 중독성이 있는 것이어서 그런지 웬만한 사람들은 리더십이론에 접했다 하면 중독이 된다. 중독이라는 말이 너무 심하다 생각한다면 취한다는 표현은 어떨까? 이미 몇 가지를 지적했지만 리더십 이론을 실천하기 위해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 취해도 단단히 취하게 되는 모양이다. 리더십에 취해 있기는 리더십주창자들이 한 수 위이다. 그들의 책들을 볼 때마다 꼭 술 취한 사람들이 횡설수설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런데 그들이 언제나 취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주장을 잘 들어보면, 취한 것 같이 보였는데 어떤 때에는 취기(醉氣)에서 벗어났는지 바른 소리를 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순간은 길지 않다. 바로 또 취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짝 깨어있을 때에 하는 말들, 그것이 그들의 본심이 아닐까? 이번에는 그런 그들의 ‘본심’을 한번 찾아보기로 한다.  

먼저 ‘리더십’ 자체에 대한 그들의 ‘본심’을 알아보자. 정말 그들은 리더십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길래 그렇게 리더십에 목을 메고 있는지를. 먼저 리더십의 사부라 할 수 있는 존 맥스웰의 말을 한번 음미해 보자.
<모든 사람이 리더십에 대해 말하지만 실제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많은 사람이 리더십을 원하지만 실제로 얻는 사람은 없다.> (리더십의 법칙, 22)
이렇게 말하고 나서 존 맥스웰은 연달아 책을 펴내면서 리더십을 논하고 있으니 희한한 노릇이다.

또한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리더십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려고 애를 쓴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제가 선교와 실천신학의 시각에서 리더십을 연구하며 느낀 것은, 결국 리더십의 패러다임은 성경에서 나와야 하며, 이를 위해 성경의 데이터를 전문으로 다루는 성서신학의 지원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리더십, 20)

그런데 같은 책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글들은 위와는 정면으로 배치되어 오히려 눈길을 끈다. 같은 책에 들어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글이다.

<성경의 주된 관심이 리더십이 아닌데 성경을 쥐어짜듯 하여(?) 리더십 이론을 도출하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첫 번째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하나님 나라와 리더십, 64)

<김교수(김광건)는 성경이 리더십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리더십, 75)

한홍목사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리더십이라는 주제를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어가는 중에 나는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예수님은 ‘리더십’에 대하여 언급한 적은 거의 없지만, 따르는 일(followership)에 대하여는 무수히 많은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거인들의 발자국, 63쪽)

이렇게 서로 배치되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이런 말을 하는 때는 깨어 있음에 분명하다. ‘리더십은 성경에 근거를 두어야 하기에,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찾아 보았으나 성경 속에서 리더십에 대한 근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깨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깨어 있을 때에는 일반 리더십 이론을 비판적으로 볼 것을 그들은 제안한다. 일반 리더십 이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시시때때로 강조하기도 한다.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인 원리에 대한 바른 확신 가운데 일반 리더십에 대한 책들을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 나라, 65)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군대 또는 기업과 교회는 분명 그 존재목적이나 기타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경영학 이론을 교회에 도입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야 합니다.>(하나님 나라, 83)

<영적 리더십을 설명하면서 일반적인 리더십의 모형을 먼저 제시하고, 그에 대하여 단순하게 성경적 해석을 덧붙이고 영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영적 리더십의 개념을 모호하게 만듭니다. > (하나님 나라, 96)

<현재 적잖은 목회자들 사이에 대교회 목회자나 성공한 기업으로부터 리더십을 카피하는 것이 유행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사실 어느 정도 위험성과 한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칼과 칼집, 한홍목사와의 대담에서 사회자의 말, 55)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 같은 한 명의 탁월한 경영자가 나오면 그 사람의 리더십 방법들을 모두가 벤치마킹하려고 한다. 물론 그가 탁월한 사업가임은 틀림없지만, 이런 맹목적인 우상숭배에 가까운 인물 카피는 위험부담이 크다. 왜 그런가?>(거인들의 발자국, 19)

<어차피 영적 리더십의 목적은 교회, 기독교 공동체, 그리고 선교를 위함이다. 그런데 지금 리더십에 많이 도입된 원칙, 테크닉들이 세속적 사회과학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 문화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김광건, 영적 리더십의 새로운 패러다임, 135)

<비즈니스 세계의 리더십 방법론을 정치나 예술, 교육, 특히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면 문제가 많이 생긴다. 물론 근본적인 개념, 가령 다음 세대 지도자를 키워내는 시스템 같은 본질의 문제는 분야를 초월해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만, 그래도 각 분야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맞게 빠르고 정확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첨단 산업 경영 방식을, 장기적인 안목을 가져야 하는 교육 정책에 바로 투입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교육 개혁이 계속 난항을 거듭하는 이유는 정부와 교육이 너무 밀착되어 있어, 장관 한 번 바뀔 때마다 입시 정책이 정신 못 차리게 바뀌기 때문이다) 교회는 더더욱 그렇다. 비즈니스는 사장이 밥그릇을 쥐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최소한의 권위가 있지만, 자원 봉사를 철칙으로 하는 교회에서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접근하는 리더십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물론 비즈니스 경영에서 많은 중요한 리더십 기본 원리들을 배울 수 있긴 하지만, 그것을 깊이 숙고해서 여과하지 않고 그대로 교회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목회자들 또한 단순한 종교적 흑백논리의 시각으로 급변하는 세상의 기업과 정부와 언론을 쉽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거인들의 발자국>, 20~21)

그렇게 제 정신일 때에는 일반 리더십 이론을 교회의 리더십에 도입하는 것을 경계하던 분들이 조금 리더십에 취하면 곧 바로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 조차 하다.

어디 그뿐인가, 요즈음 대세라고 주장하고 있는 ‘서번트 리더십’이란 희한한 조어에 대해서도 그들은 깨어 있을 때에는 이렇게 말한다.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종된 지도자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종처럼 행동하는 지도자가 되지 말고 아예 종이 되라고 말합니다. 영적 리더는 분명 종이 되어야 하며, 섬기고 희생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리더십, 103)

그렇다면 어디 릭 워렌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리더십에 관한 수천 권의 책이 쓰여졌지만 섬김의 도에 대해 쓰여진 책은 거의 없다. 누구나가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지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장군이 되기를 원하지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크리스천들도 섬기는 리더(servant-leaders)가 되기를 원하지 그저 종으로 남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종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자신을 그렇게 부르셨던 것이다. > (목적이 이끄는 삶, 336)

종이 되는 것하고 섬기는 리더가 되는 것하고의 차이를 그들은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애써 외면하는 것일까? 릭 위렌이 말했으니 그의 말 한마디에 까무러지는 우리나라 리더십 주창자들은 이 말을 따라야 하는데, 희한하게도 또 이런 글은 못 본체 지나간다. 취해 있음에도 선별의 능력이 놀랍다. 한마디로 쓴 약은 먹지 않겠다는 자세다. 독이라 할지라도 달콤한 것만 먹겠다는 본능적 자세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서번트 리더십’과 ‘서번트십’의 차이를 모를 리 없건만 왜 그들이 ‘서번트십’ 대신 ‘서번트 리더십’이 대세라고 주장하는지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바울의 리더십을 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깨어 있을 때에 한 이런 말을 한번 들려주는 게 좋을 것이다.
<누군가 바울에게 리더십에 관해 물었다면 그는 당황했을 것입니다. 리더십이라는 관심사가 그에게는 생소하게 들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리더십이라는 말의 속뜻을 물을 것이고, 그 속에 담긴 관심사가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진리안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지 숙고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리더십, 146, 권연경, 바울과 십자가의 리더십)

또한 바울이 성공한 지도자로서의 모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의문을 품는 것도 그들이 깨어 있을 때이다.  
<한 사람의 지도자로서 바울은 얼마나 ‘성공적’이었을까요? 사실 바울이 훌륭한 지도자 혹은 목회자로 인정받았을 가능성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성공한’ 목회자는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읽는 그의 편지들은 승승장구하는 목회자의 성공담이라기 보다는 전전긍긍하는 한 목회자의 갈등과 고통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여느 누구와 같은 평범한 목회자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에게서 ‘성공적’ 목회 리더십을 바라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 (하나님 나라와 리더십, 147-148, 권연경)

권영경 교수가 알려진 바울 신학자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앞으로 바울의 리더십 어쩌구 하는 사람은 우물가인지  부엌인지 먼저 잘 살펴야 할 것이다.  

또 구약의 지도자들을 열거하면서 리더십을 운위하는 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구약에는 ‘리더십 매뉴얼’로 간주될 만한 책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리더십, 243)

이것은 그들이 깨어있을 때에 한 말이다. 그들은 이런 말을 한 후에는 다시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 엄밀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구약은 물론 신약에서도 부지런히 리더십 매뉴얼을 찾아 헤맨다. 그래서 한홍목사는 이런 말을 하기도 하는데 모두 다 엄밀하게 말하지 않는, 취하면 나오는 그들의 습관 탓임에 틀림없다.  

<바울과 베드로, 요한이 쓴 목회서신들의 상당 부분이 당시 리더 훈련 매뉴얼로 쓰인 것들이다. >(칼, 33)
<초대교회의 지도자 바울은 젊은 지도자 디모데에게 리더십에 대하여 조언하기를> (거인, 54)

이렇듯 깨었을 때와 취했을 때에 서로 말을 달리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리더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것에 한번 취하면 도저히 깨어나지 못하는 그들이기에, 그들의 본심은 이렇게 가끔씩 들을 수밖에 없는 게 안타깝다. 그들을 비몽사몽 상태로 이끌어가는 ‘리더십’의 영향력은 그 정도로 끈질기고 질기다.

그러나 필자는 확신한다. 그들도 언젠가는 리더십의 미몽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때 깨어나는 그들에게 “당신들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오히려 본심에서 나온 말들이죠?” 라고 말해주면 그들이 덜 부끄러워하리라.
여기 그들이 했던 바른 말들을 한번 정리해보는 것도 그래서 의미는 있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지 않아도 실상 이런 말들이 그들의 본심일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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