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없이 성경읽기

브니엘, 거기에도 꽃이 피어있었을까? / 창 32: 22-32

요즘 여기저기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것을 보면서, 또는 그러한 꽃들이 피어있는 길을 걸으며 봄의 향기에 취해봅니다. 그런 길, 걷기 좋은 길을 걷다가, 창세기에서 야곱이 걸어갔던 길이 생각이 났습니다. 창세기 32장 31절입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해가 돋을 때에 브니엘을 지나면서 야곱이 걷던 길, 그 곳이 성경에 기록된 길 중에서 가장 의미있고, 아름다운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기 브니엘, 야곱이 걸어갔던 그 길 어디쯤에는 꽃들이 피어있었겠다,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야곱이 그렇게 꽃들이 피어 있음직한 길을 걷기까지 본문을 통해 살펴볼텐데, 본문은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인 사건에서 비롯됩니다.
야곱이 형인 에서와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가로 챈 다음에 집안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형인 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벼르고, 집안이 말이 아니게 되었지요. 그런 절제절명의 순간에 어머니 리브가가 지혜를 짜내어 야곱을 자기 오빠의 집으로 피신을 시킵니다. 거기에서 야곱은 장가를 들어 이제 제법 일가를 이루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형이 있는 곳이 가까워지니까 걱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로 형인 에서가 자기를 어떻게 대할까 하는 걱정입니다. 형이 자기를 속였다고 과연 얼굴을 펴고 맞아줄 것인가 아니면 죽이려고 달려들 것인가, 하는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러한 가운데 야곱이 새로운 결단을 하게 되고 이제 담대하게 에서를 만나러 길을 떠나게 되는 그 계기가 되는 어떤 사건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1. 야곱, 그는 홀로 남았다. 

24절입니다. <그는 홀로 남았더니>
지금 야곱은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형인 에서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한 때에 과연 에서는 어떻게 나올 것인가? 죽일 것인가, 아니면 야곱을 동생으로서 따뜻하게 맞이 해 줄 것인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그러한 처지에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혼자입니다. 집안의 가족도 어떤 점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도움이 되는 조언은 할 수 있지만 결국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은 본인입니다. 우스개 말로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밥 먹는 것하고 화장실 가는 것은 대신해줄 수 없다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은 고독한 존재입니다. 본문에서 살펴보는 야곱의 경우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인생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혼자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 모습입니다. 문제 앞에서 혼자임을 꼽씹어야 하는 현실, 그게 바로 우리들이고,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입니다.

2.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

자, 이때 누가 등장합니다. 24절, 계속 읽어봅니다.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

바로 천사입니다. 성경에는 “어떤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천사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으로, 실상은 하나님이 보낸 천사입니다.

그 천사가 왜 나타났습니까? 여기 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은 혼자였다. 따라서 사람은 혼자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혼자다,라고 말씀드렸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겉으로 보기에는 혼자인 것 같지만 바로 거기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혼자인 그 시간에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멀리에서 바라보시고 계시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가까이 하시며 우리의 속내를 듣고 싶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길래 지금 야곱을 찾아 오신 것입니다. 야곱이 홀로 남아 깊은 시름하는 그 자리에 바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그의 마음을 열어놓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 야곱은 그 사람과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씨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씨름에는 진짜 상대방을 붙들고 하는 씨름도 있지만 입으로 하는 입씨름도 있으니, 그 자리에서 물리적인 씨름도 있었겠지만 입씨름도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더 의미있는 것은 입씨름입니다. 26절 이하의 기록을 보면 야곱과 그 사람 사이에 한바탕 입씨름이 벌어집니다.

우리말이 재미있지요? 입씨름, 입으로 씨름한다? 서양 언어인 영어에서는 입씨름이란 표현은 없습니다. 그저 토의, 격론 정도의 뜻인 argument, dispute가 있을 뿐인데, 동양의 표현으로는 언쟁(言爭) 설전(舌戰)이란 말이 있고, 우리 말에는 입씨름이란 말이 있으니 재미있습니다. 그러니 동양에 해당하는 유대에서 기록된 이 성경에 등장하는 '씨름'이란 말에는 입씨름도 포함된다 생각합니다. 

물리적으로, 힘으로는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야곱으로부터 벗어났으니 그리고 31절에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분명 그 사람이 힘으로 야곱을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의미의 이름으로 바꾸어 준 것을 보면 그 씨름이 비단 상대방 허리를 잡고 밀치고 넘어뜨리는 씨름만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는 생각입니다. 어쨌든 야곱은 그렇게 그 사람과 씨름을 해서 이겨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3. 천사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그런데, 26절에 보면 뜻밖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6절, 천사가 <날이 새려하니 나로 하여금 가게 하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나라의 <전설 따라 삼천리>에 나오는 귀신처럼, 날이 밝으면 힘을 못쓰니까 가겠다는 것일까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일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시간개념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고 하나님의 수족인 천사에게는 시간개념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이 가야 할 이유가 시간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이 밝으니 가야 할 필요가 없는데도, 날이 새려 하니 가겠다는 것은 결국 유한한 존재이며 시간에 구애받는 존재인 야곱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힘이 한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 반면 천사는 사람처럼 한계가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만일 그 천사가 시간을 전혀 생각지 않고 하루도 좋고 이틀도 좋아, 하면서 계속해서 야곱과 겨루었다면 어찌 야곱이 그 천사를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천사가 말한 바, <날이 새려 하매>라는 말은 야곱을 위한 말인 것입니다.

야곱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 고민은 끝없이 이어져 옵니다. 겨우 한가지를 해결했다 하면서 생각의 갈피를 잡아 놓으면 또 다른 생각이 고민이 되어 터져나옵니다. 그렇듯 고민은 누에의 입에서 실이 나오듯이 끝없이 뻗어 나옵니다. 그런 것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잠을 자려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내일 다가올 일들이 고민이 되어 정신을 잡고 놓아주질 않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날밤을 새우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전전반측(輾轉反側)이라는 말이 그런 경우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날이 새도록 고민 고민하지만, 그 고민은 해결되지 않아 머리만 아픈 경우, 야곱이 바로 그런 고민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야곱의 그 고민을 끝내시기 위하여 천사로 하여금 ‘날이 새려 하니, 나로 하여금 가게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 날이 새려 하니 나로 하여금 가게 하라는 것은 천사가 시간에 쫓겨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너 야곱이 이제 그러한 고민을 그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너와의 싸움은 끝났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야곱아, 네가 고민하는 시간은 이제 끝이 났다’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4.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렇게 해서 야곱이 인생 일대의 가장 큰 고민, 형인 에서를 만나는 것에 대한 야곱의 고민이 해결되었습니다. 야곱은 인생에 진정한 새 아침을 맞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31절에 뭐라 합니까?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결국 야곱은 길고 긴 고민의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고민에서 벗어난 야곱에게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화사하고 신선하고 아름답게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가 지나가는 곳의 경치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5.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다.

야곱이 홀로 고민했던 것, 그것은 그의 인생길에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밤을 새워가면서, 홀로 있으면서 걱정하고 고민했던 것이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를 통해서 그때까지 멀리 있는 것으로만 알던 하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가끔씩 물어보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물리적으로는 만날 수 없지만 그분의 분신과 마찬가지인 말씀을 통해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야곱은 그렇게 마치 몸의 뼛속 깊이 있는 것 같은 고민 거리 하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지금까지의 인생을 방향전환하는 중요한 시점을 맞지 않았습니까? 그날 하룻밤이 그래서 야곱에게는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이정표가 되는 날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고민을 떨쳐버리고 이름마저 이스라엘로 바꾼 후에, 아름답게 해 뜨는 아침, 먼저 보낸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야곱이 걸어가던 그 길, 꽃들도 밝게 웃어주었을 그 길을 우리도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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