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읽기

네 이웃을 사랑하라  - 첫 번째  / 마 22: 34- 40


성경을 앞에 두고, 사람마다 성경을 대하는 마음 자세는 다를 것입니다. 대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 그래도 예사롭게 대하지 않고 무언가 의미있는 책으로 생각을 합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분들도, 한 종교의 경전이 되는 책이니 어느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생각조차도 없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문제는 믿는 사람들이 이 책을 어느 정도로 받아들이느냐에 차이가 있다는 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씀의 속 의미를 찾아 애쓰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나타난 글자만 생각하고 그 속의 깊은 뜻을 헤아릴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러한 차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I. 꽃밭에 물을 주어라

본문 35절에 율법사가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율법사라 함은 율법 전문가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서 그 결과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율법을 따라 살도록 교육도 하고 또 율법의 세부적인 사항을 규정하는 사람들이 바로 율법사라 이름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자료를 보니까 그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해 놓고 있습니다. 
<서기관들 혹은 율법사들 ; 성경을 필사하는 임무를 지닌 자들.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문제삼아서 그리스도를 모함하려고 언제나 바리새인들 곁에서 같이 행동하였다. 그들은 율법의 영적인 면보다 문자적인 면에 관심을 더욱 기울였다.>

그들이 하는 성경해석 방법을 비유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 어떤 부모가 여러 날 집을 비우면서, 애지중지하는 꽃밭을 아이들에게 돌보도록 부탁을 해놓고 갔습니다.
‘애들아, 이제 여름인데 꽃밭에 꼭 물을 주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부모님의 말씀을 아이들은 잘 순종하여 하루에 한번씩 화단에 물을 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 그날은 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자, 아이들 간에 의견 충돌이 생겼습니다.
어떤 아이는 말하기를, ‘비가 오기는 하지만 부모님 말씀은 순종해야 하는 것이고 여하한 경우에도 거역할 수 없는 법이니 비가 오더라도 꽃밭에 물을 뿌려야 한다’ 했고 또 다른 아이는, ‘아니다. 부모님이 꽃밭에 물을 주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자, 꽃밭에 심은 화초들이 물이 없으면 죽을까봐 물을 주라고 하신 것이니 비가 오는 날이면 물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두개의 의견이 충돌한 것입니다.
첫번째 의견을 내세운 아이들이 논리가 부족하다 생각했는지, 또 이런 주장을 내세웁니다. ‘그렇다면 비가 얼마나 와야 물을 주지 않아도 되느냐? 비가 어느 정도 오면 물주지 말라 그랬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 없으셨으니, 그것 한번 따져보자, 
그리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어떤 분이냐? 엄격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운해 하실 분들인데 그분들이 우리가 비오는 날이라고 해서 꽃밭에 물을 주지 않는다면 일하기 싫어서 꾸며대는 핑계라고 하실 것이다. 비가 온다고 내린 비에 물을 더 주면 어디가 어때서 그러냐? 그러니 물을 주어야 한다.’>

이런 비유가 너무 과장이라고 생각되자만, 현재도 그런 경우 얼마든지 있으며,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에는 더욱 심했습니다. 지금 그런 예가 바로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율법사들입니다.

안식을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 말씀을 그들은 충실하게 지킬 목적으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 등을 무수히 연구해서 발표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얼마 정도 걸어가면 안되고, 심지어 밥을 지어도 안되고 불을 켜도 안되고, 그래서 안식일에는 다친 사람을 구해줘도 안되는 것으로 규정을 만들어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느라 무진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 규정을 문자 그대로 지키느라 애를 쓰기는 했지만 정작 그 계명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참 뜻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인 율법사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22;36)

II.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참으로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하느냐고 묻는데 이런 질문에는 대답을 잘해도 탈이고, 못해도 탈입니다.
어느 것 하나를 들어 그것이 제일 가는 계명이라고 대답한다면, 그럼 왜 다른 것은 중요시 하지 않느냐고 책을 잡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는 말의 뜻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중에 우리가 지켜야 할 많은 계명이 있는데, 그중에서 이 두계명이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이며 이 둘은 그래서 다른 많은 계명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두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다른 계명은 지키나 마나 하는 것이며 고로 이 두계명의 정신으로 다른 계명을 또한 지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영어 성경에 보면 hang on이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그 뜻은 다른 많은 계명들이 이 두계명에 달려있다. 걸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두계명이 튼튼하게 유지 되지 않으면 다른 계명들은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강조하신, 두가지 계명을 살펴보면 대상은 다르지만 사랑이라는 공통인자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III.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 범위가 넓으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살펴보기로 하고 두번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랑이 과연 무엇일까요?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우리 모두 각자 무언가 떠오르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사랑이란 말의 정의가 너무 다양하더군요.

① 아끼고 위하는 정성스런 마음. 또는 그러한 마음을 베푸는 일. ¶ 어머님의 ~. 나라와 겨레에 대한 ~.
② 남녀가 서로 정을 들여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 또는 그러한 일. ¶ ~을 맺다. ~에 빠지다. ~을 속삭이다.
④ 어떤 사물을 몹시 즐기거나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러한 일. ¶ 자연(동물)에 대한 ~. 예술에 대한 .

그런 정의를 따라 사랑이 무엇인가 살펴보니, 무언가 알듯도 합니다. 그런데 국어사전에는 그런 사랑의 개념 외에도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사랑의 의미가 별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하느님이 사람을 불쌍히 여겨 구원과 행복을 베푸는 일.

국어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는 사랑’이니,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의 사랑과는 다른 사랑입니다. 본문을 살펴볼 때에는 사람들이 ‘하는’ 사랑의 개념을 적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 다시 두번째 계명으로 돌아옵시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지금 이 말씀을 받는 상대방은 본문에서는 율법사이지만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우리들이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시대를 건너 바로 우리들에게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사랑이란 행위가 가야 할 곳이 두군데 있숩니다. 하나는 이웃이고 또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그러니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사람도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자존(自尊)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만드신 귀한 생명이구나, 하나님은 나를 세상에 보내셔서 나를 통하여 무언가 일을 하시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가질 때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세를 가지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여기에 딜렘마가 있습니다. 과연 다른 사람을 나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경험을 해보기는 한 것 같은데, 바로 이것이 그거다,라고 샘플로 내세울만한 경험이 없기에 망설였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에 그냥 그런 것이 있으니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자신처럼 사랑하십시오, 꼭 하셔야 합니다,라고 말 할 수 없어서 고민하던 차에, 아주 좋은 그리고 효과있는 사례를 발견했습니다.

조선시대 실학자로 유명한 정약용의 일화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다산 정약용이 외출을 했다가 집에 돌아오니 무언가 집안 분위기가 다른 게 느껴집니다. 집에서 허드렛 일을 하는 계집 종이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서있고 아내 홍씨는 안색이 상기된 표정입니다. 아내 홍씨는 깐깐한 성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아닌지라 사연을 물어본즉, 오랜 장마로 끼니가 끊긴지 오래되어서 호박죽을 끓여서 겨우 연명을 했는데 이제 그 호박마져도 다 떨어져 끼니가 간데 없어지니 그것을 보다 못한 계집종이 옆집 텃밭에서 호박 하나를 몰래 따와서 그것으로 죽을 끓여 왔고. 
그것을 알게 된 홍씨가 잘햇다는 말 대신 매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너더러 도둑질을 시키더냐?”
그런 이야기를 들은 다산 정약용은 매를 때리려는 아내를 말리며 탄식을 합니다.
“만권 책을 읽으면 무엇하나? 아내가 배부를 수 없으니 그것도 소용이 없다. 두 이랑 밭만 있어도 계집 종이 죄를 짓지 않을 것을,,,,,”
다산은 그의 공부와 생각을 거기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생활 자체에서 내가 무언가 겪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이자리를 피할 수는 없지만 또한 벗어나야만 하는 그런 진퇴양난의 처지를 그는 오히려 이용합니다. 내 아내와 자식들이 배고파 굶주리는 것을 알았으면 다른 사람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내가 내 처자식만 살린다고 내 것만 챙긴다면 역시 그런 굶주림을 겪는 옆집은 누가?
그래서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내 자식의 굶주림을 못 보아 넘기니, 그 때문에라도 남의 자식의 굶주림도 헤아려보자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그가 낳은 아이들은 모두 6남 3녀인데 그중 4남 2녀을 잃었습니다. 원인은 천연두.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의 아이들을 천연두로 잃은 슬픔을 겪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마과회통>이라는 의학서를 지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남의 아픔을 마치 자기 것인양 생각하며 백성들의 고초와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하여 그는 갖은 애를 썼습니다. 결국 그런 것을 시기한 보수 세력에 의해 그의 인생은 영광의 자리보다는 험난한 곳에 많이 섰지만, 역사는 말합니다. 그의 인생이 백성과 국가를 위한 진정한 선각자였다고. >

저는 바로 그런 정약용의 삶이 바로 네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라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또한 그 당시 청나라에서 들어온 서학, 즉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IV. 내 가정의 행복이 나의 경쟁력(?)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일생동안 자기 삶으로 실천한 사람도 있는 반면에 요즈음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풍조는 바로 경쟁입니다. 경쟁이라는 말은 다름 아니라 남이 나보다 못해야만 내가 산다는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서로 같이 살아가는 상생(相生)이 아니라 내가 살고 남이 죽은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를 보시면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그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신 예수님이 무어라 말씀하실까? 실로 궁금합니다.

얼마전에 이곳 전주시에서 주관하는 교양강좌가 있었는데, 자기들은 좋다고 그렇게 제목을 정했는지 모르겠으나 그 제목을 듣는 순간 가슴에 섬뜩한 그 무엇을 느꼈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서울에서 강사를 초청해서 하는 강좌 타이틀이 <내 가정의 행복이 나의 경쟁력>입니다. 물론 그 취지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밖에 나가서 가족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는 가장들에게 포근한 안식처가 되어서, 가정이 행복해야만 된다는 이야기이지만 이 제목에는 엄청난 모순이 들어 있습니다.

내 가정은 행복해야 한다. 왜? 왜라는 질문에 그 강좌 제목은 치명적인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내 가정이 행복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 전체의 행복을 만드는 기초가 되니까, 가 아니라 내 가정의 행복은 밖으로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기 위한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 가정이 행복해서 가장이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런 편안한 마음으로 가정 밖으로 나가서 다른 가정의 가장들과 경쟁해서 이기고 돌아오라.

물론 현대는 경쟁사회입니다. 약육강식의 동물적 논리가 철저하게 지배하는 곳이 바로 이 사회이기는 하지만 회사에서 경쟁하서 모두 일등할 수 없고 또한 회사끼리 경쟁해서 모두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니, 실패하는 많은 가장들이 그래도 가정에서만은 평안을 찿고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웃의 슬픔과 아픔을 감싸주는 것 또한 내 가정의 행복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가정의 행복이 나의 경쟁력’이라는 구호는 그 타이틀 자체가 내 이웃을 나의 경쟁 상대로 여기라는 부추김이며, 이웃을 사랑의 대상의 아니라 경쟁의 대상으로 삼고 이겨야만 하는 경쟁자 이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서 우리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철저하게 다릅니다.

그런 경쟁의 마음에서 벗어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에 자기 사랑에서 이웃사랑으로 흘러가고, 그 흘러간 이웃사랑은 다시 자기 사랑으로 흘러옵니다. 그렇게 두개의 사랑은 서로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더욱 큰 사랑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 모두는 나의 행복이 이웃의 행복이 되는 그러한 시절이 찾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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