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금송아지 다시 만드는 우리 / 출32:1-6, 출 35: 20-29

오늘 본문은 영화를 통하여서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산에 가 있는 동안 산 밑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산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금붙이를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 대신에 자기들을 인도하는 신이라 부르며 한바탕 잔치를 떠들썩하게 벌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내산 위로 올라갑니다. 거기에서 40일간을 지냅니다. 그 내용이 출애굽기 24장 마지막 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출 24:18)

그 곳에 있으면서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을 모두다 기록하여 두는데, 그 내용이 25장부터 시작해서 31장까지 이어집니다. 31장 마지막 절인 18절에,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I. 모세, 돌판을 던져 부시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받고 돌판을 들고 내려오는데, 산 밑에서는 모세를 기다리던 백성들이 다른 신을 만드는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그게 바로 32장의 기록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태에 당연히 하나님이 진노하셨지요. 진노하셔서 그들을 징계하시고, 그 후속작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34장에 걸쳐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돌판을 던져 부수어 버리지요. 그래서 다시 모세는 다시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 말씀을 받아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 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출 34장 1-3절)

그래서 산에 다시 올라갔다 내려온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하는 장면이 35장입니다.

그럼 다시 본문인 32장으로 돌아와 볼까요. 이 일이 다름아닌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일어났다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들의 고통을 다 헤아리시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도중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그런 좋으신 하나님을 결국 없다고 부정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까? 이 본문은 우리 믿는 자로서 생각해 볼 때,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난 것으로, 이 사건을 저지른 자들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럼 32장을 살펴보면서 금송아지 사건이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었는가 살펴봅시다. 우선 겉으로 나타난 모습을 보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금들을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금을 모으는 주관자인가 하면, 실망스럽게도 모세의 형인 아론입니다. 32장 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그런 일을 말려도 부족할텐데, 오히려 백성들로 하여금 그런 일을 하도록 방조한 책임이 아론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건의 뼈대는 아론 – 제사장이 되는 사람 – 이 백성들에게 금붙이를 바치라 하고, 그 금들을 모아서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이 사건을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말씀드렸는데, 이것은 일단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건을 굳이 비난할 이유가 없습니다. 참 신과 우상의 관계를 논하는 것은 기독교에 해당되는 사항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아니라면 우상을 만들기 위해 금붙이 즉 헌금을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 문제가 된다면, 35장의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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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성소를 위해 헌물을 바치다

그래서 32장의 금송아지 사건의 의미를 자세하기 살펴보기 위하여, 35장의 상황과 비교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의미를 더 확실하게 알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25장부터 31장까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은 성소를 짓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다 놓고 일일이 설명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말씀을 간직한 모세는 산밑으로 내려가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산 밑으로 내려가 말씀을 전해주어야 하는데, 그만 사고(32장)가 생겨서 전하지 못하고 다시 올라가 돌판을 받아오느라(34장) 늦어졌습니다.

그래서 35장에서야 비로소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달하게 되는데, 성소를 짓기 위하여, 모세가 백성들에게 명령을 한 구절을 살펴봅시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개정개역) (출35: 4- 5)

성소를 짓기 위한 헌물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기본 원칙은 어떤 것일까요?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자원해서’입니다. 강제적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게 바로 백성들에게 바치라고 할 때의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그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35장 20절 이하입니다. 백성들이 금붙이들을 가지고 몰려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예물을 바칠 때의 모습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2장의 사건과 비교하기 위해서입니다. 35장에서 ‘성소를 만들기 위해 헌물을 바친 것’과 32장에서 ‘자기들의 신을 만들기 위해 금고리 등을 바친 것’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겉으로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모두다 헌물을 가져다 바친 것,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속마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들의 속마음을 살펴봅시다. 먼저 성소를 만들기 위해 바치는 35장의 경우입니다. 
바치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가? 바칠 때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 출35:21)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 (출 35:29)

35장에서 성소를 짓기 위해 헌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원함’입니다. 그렇다면, 32장에서 금송아지를 만들려고 금을 바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32장에는 거기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강제로 바쳤습니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했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기 위해 바치는 그들의 마음이 어땠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적어도 그들이 마지 못해서 가져왔다거나 억지로 가져왔다는 기록은 없으며 그런 때에 오히려 자발적으로, 열성적으로 바쳤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두 사건은 두 가지 측면, 즉 겉과 속마음 모두 동일합니다.
자원하여, 열성적으로 재물을 바친 것, 모두 똑 같습니다. 각자 그들이 신이라고 믿는 존재 – 하나님과 송아지 - 에게 재물을 ‘자원하여’ 가져다 바친 것, 모두 같습니다.

그런데 두가지 사건- 32장과 35장의 헌물 사건 - 이 살펴 본 것처럼 똑 같은 것이라면, 아무래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그래도 뭔가 하나님에게 재물도 드리고 또한 시간도 드리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 한다고, 출애굽기 35장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열과 성을 다하여 하나님에게 충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금송아지 만든 사건(32장)과 똑 같은 모습이라니, 이 얼마나 섭섭한 일입니까?

그래서, 아무리 그래도 그 두 사건 사이에 무언가 차이가 있어야 하겠는데, 차이가 보여야만 우리 마음이 놓일 것인데,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 사건에서 차이는 무엇이며, 그 차이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35장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21절)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팔찌와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다가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22절)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29절)

여기에서 ‘여호와께’ 라는 말이 두 사건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호와께’ 라는 말이 있으니 35장에서 드린 헌물은 분명 하나님에게 드린 것이고.
32장의 사건에서는 그게 아니라. 사람에게 주고 사람을 위해 쓰인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명쾌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32: 7-8)

III. ‘자기를 위하여’ 대(對) ‘하나님께’

어떻습니까? 확실히 구분되지요? 그렇게 성경상으로는 확실히 구분이 가능합니다. 객관적인 기록에 의해 확실하게 구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 그 구분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을 위해 드린 것이냐, 자기가 만든 신에게 드린 것이냐? 현실상에서 그런 구분을 할 수 있을까요?

현실에서 그런 구분이 가능한지, 따져볼까요?
첫째, 옆에 있는 사람, 김집사 이집사가 드린 헌물이 과연 하나님께 바친 것인지, 어떤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남이 하는 종교적인 행동, 헌금이라든지 열성을 내어서 봉사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에게 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다른 사람 제 3자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옆의 사람이 낸 헌물이 그런지 아닌지, 제 3자는 알 수 없습니다. 오직 그 사람, 본인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 마음 속에 과연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겉으로만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결코 남의 경우는 어떤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다음. 나 자신, 본인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알 수 있을까요?
일단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바치는 것이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이다, 아니다, 라는 확신이 있다 없다, 알 수 있지요. 그렇게 오직 내가 바치는 경우  내 마음을 내가 알 수 있길래 나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참, 아니지요? 나만 아는 것이 아니라, 바치는 나와 받으시는 하나님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문제가 있습니다.
실상 우리도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지만 확실하지 않은 경우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다행하게도, 이단 종교에 빠지지 않아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지만,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뭐 자기들이 이단의 잡신이라고 생각하면서 믿는 것은 또한 아니니, 문제입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는 내 마음, 그것을 확실히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32장 1절을 보십시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IV. 부재(不在)가 더 잘 보인다. 

개정개역 성경에서 재미있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우리 말이 재미있지요?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이 말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후로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한동안, 오랫동안 모세가 보이지 않으니, 그들이 조바심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더디 옴을 보고’라고 재미있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보고. 본다는 말 아시지요? 눈으로 본다, 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도 마찬가지로 ‘본다’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When the people saw that Moses was so long in coming down from the mountain> (NIV)
<Now when the people saw that Moses delayed to come down from the mountain> (NASB)

이 ‘본다’는 말, 잠깐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려고 하는 그 어떤 것, 그것을 우리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며, ‘보라’ 하시는데, 그래서 평소에 하나님을 보기는 하지만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비로서 그게 하나님의 역사였구나, 하면서 하나님을 알아보게 되고 결국,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어서, 그 살아계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애가 타서 ‘보라, 제발 좀 봐라’ 하시는데, 우리들은 정작 보라는 것은 보지를 않고 엉뚱한 것을 보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으니 문제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 구절입니다.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니까, 그 대신 뭐가 보입니까? ‘더디 옴을 보고’
보는 것도 두 가지 있습니다. ‘봐야 할 것을 보는 경우’가 있고 ‘볼 필요가 없음에도 그것을 쓸데 없이 보는 경우’, 그렇게 두 가지입니다. 모세가 더디 옴을 보고, 라는 말은 쓸데없는 것을 본 것이지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모세가 보이지 않으니, 모세가 존재하지 않는 것, 곧 모세의 부존재가 눈에 확 띈다 그런 말입니다.
우리 말에도 같은 말이 있습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우리말 속담.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인식하지 못하다가, 사라지면 그때서야 비로소 소중함을 알게 된다는 뜻이죠. 떠난 사람의 빈자리는 항상 크게 다가오는 법.

그때까지는 모세가 있든 없든 별로 상관하지 않았었는데, 모세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불안해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모세의 부재가, 모세의 지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불안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더디 옴을 보고 나서, 그래서 결국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쓸데 없는 것을 본 결과, 그들은 모세를 넘어 계시는 하나님을 보는 대신에 ‘눈에 보이는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모세가 더디 오는 것 하고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었습니다.
관계가 있어도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정확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을 똑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려 했고, 모세가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이 이제 안 계시는구나, 하면서 다른 신을 찾았던 것입니다. 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이런 질문에 그들은 똑바른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우상을 만들어 거기에 의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서두에 이 사건이, 이 일이 다름아닌 이스라엘 민족가운데 일어났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들의 고통을 다 헤아리시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고 내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도중에 그런 일이 생긴 것을 유의해야 하는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 하에 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임이 분명한데, 잠시 우리 앞에 보여야 할 무엇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 대신 다른 신을 만들어 섬기는 것이 아닌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우리 안에 과연 하나님이 계신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성소(35장)를 만드는 대신에 사람 눈에만 번지르한 금송아지(32장)만 만드는 결과를 낳는데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며,
또한 바른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를 확실히 아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 입니다.

그렇게 확실하게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야. 비로소 오늘 말씀,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출 35:21)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출 35:22)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출 35: 29)는 말씀이 우리에게 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려면, 무언가 바치려면 우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먼저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아무리 적은 것을 드릴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아시고 기쁘게 열납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에게 드릴 때에 기쁘게 열납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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