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엘 오스틴 비판적 읽기 - 6

제 1 장 : 그렇게 ‘힘’이 좋더냐?

2. ‘힘’은 힘이 세다

생명력이 있는 것은 자신의 힘을 발산하고 싶어한다 – 생명 그 자체는 힘에의 의지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 1장 철학자들의 편견에 관하여, No. 13

왜 그리 사람들은 ‘힘’에 매달리는 것일까? 대체 ‘힘’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사람들은 그 힘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싶어서, 힘을 가지려고 목숨을 거는 것일까?

무언가 있길래, 힘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약점을 노려서 출판하는 책마다 ‘힘’이 있는 것처럼 ‘힘’이라는 돌림자를 집어 넣으려고 안달하는 것이겠지. 원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아니 오히려 책의 내용을 왜곡시킬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체면 불구하고, 책 제목을 그렇게 하는 데에는, 분명 무엇인가 있으렸다! 아님, 생명력이 있는 것은 자신의 힘을 발산하고 싶어한다는 니체의 발언을 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엘 오스틴의 책에 동인(動因)이나 추동력(推動力)이 아니라 ‘힘’이 있다고 과시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분명 있다. 동인이나 추동력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지만 ‘힘’은 그렇지 않다.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힘은 자기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힘’인 것이다. 남을 제압하는 기능이 있기에 ‘힘’은 매력이 있는 것이다.

힘에게는 만족이 없다.

‘힘’은 만족을 모르는 동사형 명사이다. 지칠 줄 모르고 뻗어가는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힘’은 관성의 법칙에 지배된다. 더 가지려 하고 더 커지려는 관성의 법칙 말이다. 힘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부, 지위, 권세 등등 여러 갈래로 가지를 치고 뿌리를 뻗어 끝없이 확장하려고 하는데, 특히나 이러한 갈래들은 저마다 홀로 서기를 시도하다가 어느 정도 성장이 되면 이제는 서로 서로 협력하여 더 커지려는 속성을 가진다. 그야말로 괴물이 되는 것이다.

힘은 투쟁한다

‘힘’은 관성의 법칙에 따라 그 외연을 넓혀가는 포식자이다. 포식이 성립하려면 비교가 필요하다. ‘힘’은 힘을 알아보는 법. 힘이 있는 대상과 없는 대상을 알아본다. 따라서 그 ‘힘’에는 태생적으로 비교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힘’은 그 옆의 힘과 비교하며, 그 비교를 통해 투쟁하며 끝내는 잡아먹거나 잡아 먹히거나 하는 투쟁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힘은 외향적이며 또한 과시는 필연적이다. ‘힘’은 아무리 힘을 써도 내부에서 잠잠히 있을 수가 없다.

‘힘’은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송곳 같아서 설령 자기가 말하지 않아도 그 ‘힘’의 냄새를 맡고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다. 우리가 원시시대로 돌아가 보면 ‘힘’이 가지는 의미를 확연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체적으로 ‘힘’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살펴본다면 나의 견해에 동의할 것이다.

힘 앞에서 모든 것은 둘로 나뉘어진다

그러므로 힘은 결국 힘이란 매개를 통하여 사람들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 힘’은 지배와 복종이란 두 단어를 시녀처럼 거느린다. 우리들은 힘 앞에서 갈라진다. 지배하는 자, 복종하는 자로 나뉘어 진다.

‘힘’은 소시민들이 사는 곳에서 조차 경쟁이란 이름을 달고 등장한다. 소박하게. ‘힘’을 힘있게 가지는 자들은 지배와 복종으로 우리를 다스리지만, 우리 소시민 사이에서조차 ‘힘’은 경쟁으로 등장하여 그 키를 재보려고 안달한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힘’을 가지고, 최상급의 힘을 가진 자에게는 어찌 할 수 없지만,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는 비교적으로 힘을 더 많이 가지기를 원하니 그것은 자연 경쟁이란 방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경쟁에서나마 이기기 위하여 ‘힘’을 가져야 하는데, <긍정의 힘>, <행복의 힘>이란 책은 그런 면에서 그 간판에서부터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다.
 
‘힘’에 대하여 너무 부정적인 면만 나열한 것을 용서하시라. 이 시대가 힘을 그렇게 만들었으니, 나로서도 어찌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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