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엘 오스틴 비판적 읽기 - 8

제 2 장 : 오스틴의 믿음, Case study 

1. 오스틴의 믿음, 우리의 믿음 

지금부터 조엘 오스틴을 본격적으로 읽어보기로 하자. 제대로, 읽어보자는 것이다.
해서 우선 워밍업을 할 것인데, 조엘 오스틴의 책 중에서 몇 군데를 샘플로 하여 그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 어떤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 전에 말씀드릴 게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조엘 오스틴의 책을 사보거나, 다시 읽어보는 수고를 하지 않도록, 그의 글을 인용할 때에는 거두절미하는 식의 인용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단편적인 인용으로 인해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장황할지라도 길게 인용할 작정이다.]

그가 말하는 믿음은?
먼저 그가 말하고 있는 믿음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책들은 모두다 부제를 하나씩 달고 있다.
<긍정의 힘: 믿는대로 된다.>
<잘 되는 나: 믿음으로 산다.>
<최고의 삶: 믿음이 이긴다.>

믿음,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믿음’이라는 부제를 모두다 달고 있는 그의 책들은 그래서 믿음의 책처럼 보인다. 믿음이란 단어를 듣기만 하여도 “믿은 대로 될지어다”(마 8:13) 라는 말이 바로 떠오르는 우리들로서는, 그의 책을 믿음을 이야기한 책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는 것도, 그의 글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자고 외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누군가로부터 쓸데없는 짓거리 아닌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기에 그렇다. 혹자는 그래서 이런 비판적 글을 쓰는 것을 에너지낭비라 여길 것이다. 그러나 전에 밝힌 것처럼, 그런 일들을 마냥 방치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게 올바른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저 달콤한 가짜 약에 홀려 바른 말씀을 배척한다 해도, ‘평양감사도 저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데, 놔두지’ 하는 식으로 포기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기로 한다.

방법은 다른 게 없다.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조목 조목 무엇이 문제인가를 따져보는 수밖에. 그래서 그토록 은혜를 받으며 읽었다는 오스틴의 책들이, 쓰레기에 다름 아님을 알려주는 수밖에 없다.

더 읽기 전에 생각해보기

*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믿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기록해 보는 것은 어떨지?)


*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믿음’의 원천(혹은 ‘믿음’의 대상)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 위의 항목들에 대하여 생각해 본 다음, 아래 글을 읽어보도록 하자.

<우리는 칭의의 토대인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가능하게 하는 그 믿음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우리의 능력인지, 아니면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은총인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그 믿음이 우리의 지성에 대립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 여기서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조직신학 해설, 정용섭, 203쪽)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가능하게 해주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에 필수적으로 전제되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전제되지 않는 믿음이란 아무 것도 아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Credo in Deum) 의 줄임 말이지, 그저 아무나 (또는 아무 것이나) 믿는 행위는 아닌 것이다.

조엘 오스틴의 글 중 두 꼭지

다음 글들은 조엘 오스틴의 책에서 뽑아낸 것들이다. 각 인용문에서 밑줄 친 부분을 유념하여 읽어보고 당신이 위에서 정의한 바 ‘믿음’과 같은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예문1)
<우리 부부는 신혼초에 동네를 거닐다가 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아름다운 집을 보았다. 문이 열려있기에 집안으로 들어가 둘러보았다. 동화에나 나올 것 같은 아름다운 집이었다. 커다란 2층 건물에 천장이 높았고 창문은 대문처럼 커서 그림 같은 뒤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멋진 집이었다. 아내는 그 집에서 나온 후에도 자꾸 뒤돌아보며 말했다.
“여보, 우리도 저렇게 아름다운 집에서 살 날이 올 거예요.”
그때 우리는 무척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집안에는 제대로 닫히는 문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도 우리 전 재산을 쏟아 부어서 간신히 산 것이었다. 그런 우리가, 방금 본 것 같은 멋진 집에 살 수 있을까? 도대체 언제?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였다. 당시 우리의 은행 잔고와 내 수입으로서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라고 자처하던 내 입에서는 갈망이 아닌 절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 너무 허황된 꿈을 꾸는구려. 우리가 어떻게 저런 집을 살 수 있겠소?”
 하지만 아내의 믿음은 나를 훨씬 능가했다. 아내는 포기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 집 문 앞에서 30분이나 선 채로 논쟁을 벌였다. 아내는 꿈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온갖 이유를 댔고, 나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온갖 이유를 댔다.
“조엘, 그렇지 않아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반드시 이 소망이 이루어질 거라는 느낌이 들어요.”
나는 아내의 기대를 산산조각내고 싶지 않아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하지만 아내의 고집을 누가 말리랴! 이후 몇 달 동안 아내가 끊임없이 믿음과 승리에 관한 말을 하는 바람에 나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우리도 그런 우아한 집에서 살 수 있다는 아내의 믿음이 점점 내 마음을 움직였다. 나는 좁은 생각을 버리고 아내의 생각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어 주실거야!’ 나는 끊임없이 확신하며 말했다.
몇 년 후에 우리는 낡은 집을 팔았다. 그리고 다른 땅을 사서 우리가 꿈에 그리던 그런 집을 지었다.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먼저 마음에 품지 않았다면, 아내가 내게 큰 비전을 심어주지 않았다면, 그 집은 절대로 탄생하지 못했으리라.>
(<긍정의 힘>, 19~20쪽)

위의 인용문에서 오스틴은 믿음이라는 말을 세 번 사용했다.
오스틴이 그렇게 세 번 사용한 믿음이라는 단어를 음미해보자. 과연 오스틴이 사용한 믿음은 당신이 맨 처음 이 장에서 믿음이라는 말에 관하여 정의를 내린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더하여 당신이 생각하는 믿음의 원천과 오스틴이 말하는 믿음의 원천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음미해보시기 바란다.

다음은 또 다른 예, 그가 사용하고 있는 ‘믿음’의 용법을 살펴보자.

(예문 2)
<하나님은 이제 새로 출발해야 할 때라고 말씀하신다. 열정의 불씨를 되살리고 꿈을 다시 꾸라. 오랫동안 질병에 시달렸는가? 상관없다. 오늘은 치유될 날이다. 절망과 실망의 감옥에 갇혀 살아왔는가? 이제 풀려날 시간이다. 패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집안에서 태어났는가? 오늘은 빛으로 나아갈 날이다. 다시 한번 믿음을 발휘해보라. 매일 좋은 일을 기대하며 눈을 뜨라. 그럭저럭 만족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꿈을 향해 계속 전진하면 그 꿈이 진짜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잘되는 나>, 36쪽)

믿음이란?

이상 오스틴의 글 두 꼭지를 읽어보았는데, 그는 거기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네 번 사용했다. 어떤가? 당신이 생각하던 ‘믿음’이라는 단어의 개념과 오스틴이 사용한 믿음이 일치하는가?

그가 생각하는, 사용하는 믿음은 적어도 내가 사용하는 단어인 ‘믿음’과 다르다. 그가 믿는 믿음은 대상이 없다. 그저 기대하고 바라는 그러한 믿음이다.
심지어 '우아한 집에서 살 수 있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사용하는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따라서 나는 오스틴이 사용하는 믿음이라는 말을 그런 상황에서 사용하지 못한다. 단지 '기대', '소망', '바라는 것'이라는 말로 사용할 것이 분명하다.

당신은 어떤가?

믿음을 그저 하나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오스틴의 생각이 위에 인용한 그의 글에 여실히 드러나 있지 않은가?  누구를 믿느냐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 믿음, 그저 잘 되겠지 하는 심리적 확신을 그는 믿음이라 부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책들이 모두다 ‘믿음’이란 부제를 주렁주렁 달고 있지만, 그것은 그저 기독교인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알아 두어야 한다. 오스틴의 믿음은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이 전제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잘 될 것이라는 ‘확신’ 정도, 그것도 막연한. 위의 오스틴이 보여주고 있는 바 ‘믿음’이란 말을 아무 곳이나 마구 활용하는 행태는 다음과 같은 글에 의하여 철저하게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 질문하기보다는 신앙만능주의에 안주하는 이유는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그 답이다. 기독교 신앙을 이용해서 자기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어가겠다는 일종의 실용적이고, 도구적인 생각이 오늘의 기독교인들을 사로 잡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신앙의 본질로 들어갈 필요는 없으며, 단지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만 추구하게 된다. (하략)>
(조직신학 해설, 정용섭, 203-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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