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없이 성경읽기>

그가 미처 하지 못한 한마디 말 / 눅15: 11-24

본문을 읽어보면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예수님의 이 비유를 기록하면서, 지문을 통해 상황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 사이 사이에 그들의 대화를 기록하여,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번 살펴볼까요?

어떤 아버지에게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 둘째 아들. 그런데 이 둘째 아들로부터 문제가 시작됐습니다.
<둘째가 아버지에게 청하기를 나에게 돌아올 분깃을 나눠주소서 하는지라> (눅 15:12)

이때 아버지는 무슨 말씀을 하셨나요? 물론 실제로는 무언가 말씀하셨겠지만, 성경에는 그것을 기록해 놓고 있지 않습니다.
그 다음, 그 아들은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버립니다. 이때에도 역시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들이 자기 곁을 떠나가는 동안에 아버지가 한 말이 한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야기에서, 말이 없었다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아버지의 기분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라는 것이지요.

후회막급, 전전반측.

그럼 다음 장면을 살펴봅시다. 모두 아시는 내용이라, 생략하고 집을 나갔던 아들이 이제 돈이 떨어지니까 집으로 돌아 갈 생각을 합니다. 집에 돌아가기 전에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하지, 하는 고민을 잔뜩 하다가 드디어 아버지를 만나 할 대사 한 꼭지를 만들어 봅니다. 물론 후회하는 마음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성이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밖으로 표현해야 하니까 그것을 미리 한번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눅 15;17-19)

그런 내면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 그는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결단을 내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는 둘째 아들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았더라면, 분명 이런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어떤 말을 중얼 중얼 하면서 갔을 것인데,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말을 마치 놀부가 흥부 집에서 화초장 하나를 빼앗아 가면서 그 이름을 잊어버릴까 봐 입으로 화초장, 화초장, 하고 되뇌면서 가듯이 길을 가면서 몇 번이나 입에 올렸을 것입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이에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눅15:20)
그렇게 집으로 향한 아들이 드디어 집이 저 멀리 보이는 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집이 아직도 먼데, 뜻밖에도 거기에 아버지가 자기를 알아보시고 달려오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달려오시는 아버지를 만난 아들은 어떠한 감정이었을까요? 그 아들은 자기가 생각한 아버지와의 만남이 어긋난 데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집안에 계신 아버지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자기가 준비해 온 말(눅15: 18-19)을 하고 조용히 엎드려, 아버지의 처분을 기다릴 속셈이었는데, 뜻밖의 시간과 뜻밖의 장소에서 아버지를 만난 것입니다.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은 것도 당황스러운 일인데, 아버지의 태도가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무척 달라 그는 어찌할 바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벼룩도 염치는 있는 법, 아버지의 뜻밖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처지를 변명하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준비해 온 말은 해야지’ 하는 심정으로 외워 온 대사를 읊기 시작합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눅15:21)

그 말까지 했을 때, 아버지는 말을 중간에서 가로챕니다. 이제는 아들이 말할 차례가 아니라 아버지가 말할 차례인 것입니다. 왜?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그 사실이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그래서 종들에게 이 아들에게 옷을 입히게 하고, 가락지를 끼우게 하는 등, 명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반부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아버지가 얼마나 말이 많아졌습니까? 22절에서 24절까지 지금까지 못했던 말들을 줄줄줄 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가 원래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나요? 아니었지요, 아들이 나갈 때에는 침묵으로 일관하시던 그 분이 아들이 돌아오자 갑자기 수다쟁이처럼 변한 것은 바로 아들이 돌아와 기쁘고 즐겁기 때문인 것입니다.

초지일관인 하나님 VS 변화무쌍한 둘째 아들

이 비유 이야기 중에서, 아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그대로인데 아들은 저 혼자 집을 나갔다가 들어왔다가 그럽니다.
한마디로, 변화가 무쌍합니다.
아니, 아들이 취한 태도중 한결같이 같은 모양이 한가지 있습니다. 집을 나가면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것'처럼 나가더니, 돌아 올 때에도 '아들이 아닌 것'처럼 들어온 것이 같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아닌 것처럼, 나가고 들어오고 했지만, 두 행동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나갈 때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거들떠 보지 않고 '의기양양'해서 나갔지만, 돌아 올 때에는 아버지가 자기를 거들떠 보지도 않으시면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걱정하며 '의기소침'해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그 자리 그 모습으로 계시는데, 아들은 저혼자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아버지 속을 썩여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속 썩이는 아들이지만 그 아버지는 그저 아들이 돌아온 것이 고맙고 그래서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즐거움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기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푸는 것입니다.

아들이 미처 하지 못한 한마디 말

아들이 집에 오는 길목에서 만난 아버지에게 준비해 놓은 말을 하기는 했는데, 아버지가 말을 가로 채는 바람에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아들이 준비한 말은 다음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눅 15:18-19)

그러나 막상 아버지를 만나서 한 말은 다릅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15:21)

두 말을 비교해 보면 준비해 놓은 말 중에 아들이 하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바로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말입니다.

아들이 준비해 온 말 중에,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거기까지 했을 때, 아버지는 말을 중간에서 가로챕니다. 아들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15:19) 라는 말을 마저 하려는데, 아버지는 아들 말을 중간에서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니, 중간에서 끊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들 말은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들어봐야 그 말이 그 말 아니겠습니까? 공식적인 멘트 아니겠습니까? 그런 말들이 아버지에게는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들, 그 ‘아들’이 집에 돌아온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지요. 그는 아들이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는 생각을 하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돌아온 아들을 품꾼의 하나가 아니라 '아들'로 맞이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간단한 비유에서 하나님을 너무 정확하게 그리고 너무 멋들어지게 표현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러한 분이 우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미처 하지 못한 말, 아니 그 말 -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 을 하지 못하도록 하시며 따뜻하게 맞아 주시는 아버지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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