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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에서의 기쁨 / 눅 23 : 39- 43

다음 주는 부활주일이고, 이번주는 수난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로마군인들에게 잡혀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아니 이미 일어난 일이니, 과거형으로 묘사해야겠지요. 예수님은 그런 고통스러운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 달려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하신 그러한 기간이 바로 고난주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고난을 거쳐 예수님이 돌아가신 사건, 그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그 고난의 시간이 어찌보면 부활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통과의례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난의 시간을 지나면서 예수님은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고난, 힘들고 괴롭고,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따르는가' 하시며 괴로워하신 고통의 시간이 었을까요? 아니면 그런 가운데에서 어떤 기쁨은 없었을까요?
 
저는 본문에서 그렇게 심한 고통의 순간을 지내면서도 예수님이 만드신 기쁨, 아주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기쁨이 그 속에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인간의 존재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기쁨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인생 자체를 변화시키는 기쁨이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일보 직전의 일입니다.
거기에는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보내고 있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십자가가 세개 세워져 있고 그 가운데 예수님이 달리셨습니다.
예수님 옆에는 다른 두명이 달렸는데, 그 사람들은 32절과 33절에 의하면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

그렇게 행악자 두명이 같이 십자가에 달린 것입니다. 행악자라는 말은 악한 일을 한 사람, 즉 나라 법을 어긴 죄수들이라는 말입니다. 나쁜 일을 한 사람 중에서도, 그 죄의 정도가 사형을 받을 정도라는 것이지요.

먼저 예수님을 살펴볼까요?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을 맞대면하여 그 앞에서  죽음이라는 것과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어떤 모습인가요? 46절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인간은 육신만으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바로 사람이라는 존재는 영혼과 육체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하여 그 말은 바로 그 영혼은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그는 십자가 상에서 죽음의 문제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 중차대한 시점에 그 옆의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그렇게 죽음과 싸움을 하는 예수님을 향해, 한 사람이 말을 걸어옵니다.
39절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구원자'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이 구원자이니까, '당신이 구원자이지? 그러면 당연히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해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인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비방하는 말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이면서 왜 헤어나지 못하고 이 고생을 겪고 있느냐'하는 식의 능력에 대한 비난과 아울러 '그 정도도 못하면서 어찌 당신이 그리스도일리가 있겠느냐' 하는 존재 자체에 대한 비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너와 나를 구원해보라’는 비방은 이것이 첫번째가 아니지요, 십자가 밑에서 이미 두번 겪은 일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 (눅 23 : 34-38) 

그런 비방이 이번이 세번째이니, 보통사람들 같으면, '내가 한두번이면 참으려고 했는데, 세번씩이나 같은 말을 들으니 도저히 못참겠다'하고는 '십자가 나 안질래'하고 내려올만도 한데 예수님은 그 비방에 묵묵히 말하지 않으심으로 대응하십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은 이런 것과 비슷한 시험을 겪으신 경험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예수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사탄의 세가지 세가지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중의 하나: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 4 : 5-6)

'뛰어내리라'는 말은 성전 밑으로 네 몸을 날려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예수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듯 뛰어내린다면 그것이 메시야를 고대하는 백성들에게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표징이 되지 않겠느냐는 유혹입니다. 이는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있는 마귀가 예수님에게 희생의 길을 걷기보다 세상적 환대와 영광을 누리는 영웅적 삶을 살아가라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그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 : 7)

그런 시험을 이미 한번 겪으신 예수님은 정말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자리, 즉 그 십자가에서 멋지게 내려오면서 양쪽에 달린 두 죄인도 같이 데리고 내려 만천하에 자기 자신이 그런 백성들이 원하는 형태의 그리스도임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마다하고 다시 한번 참으셔서 그 모욕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한쪽 편의 죄수는 예수를 모욕하고 비방하는데 비하여, 다른 쪽에 있는 죄인은 다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눅23 : 40-42) 

조금 말이 많지요? 그렇게 길게 말한 내용을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한편 죄수, 즉 예수를 모욕하고 비방한 죄수를 꾸짖는 내용입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지금 너는 벌받을 죄를 지어서 십자가에 달려 사형을 받고 있은데, 뭐 그리 말이 많느냐' 하는 말인데, 그 다음 내용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죄지은 사람이 그 죄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는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그 말 속에는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과응보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가장 기본되는 이치이기도 합니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 데 팥 난다는 이치,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하는 인과관계가 기본이 되어, 잘못한 것은 형벌로, 잘한 것은 상으로 보응받는다는 인과응보의 사상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법칙입니다.

생각해보십시다. 잘하면 그에 대해 보답을 받습니다. 또한 잘못하면 당연히 그에 상응한 벌을 받는 것, 마땅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런 인과응보의 법칙을 잘 알기에, 우리들은 착한 일을 하려고 애쓰고, 좋은 일을 하도록 힘쓰며 남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으려 하는 인생살이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를 만들어 서로 서로 그러한 상식하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을 하는 죄수에게는 벌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자기들 두사람이 십자가 형벌을 받는 것은 바로 자기들이 지은 죄 때문이라는 것이기에, 그들은 거기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죄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런 인과응보의 사상에 머무르지 않고, 예수님에게 한마디 덧붙여 부탁을 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살이의 원리인 인과응보에 의하면 내가 죽을 수 밖에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에게 하나 간청하는게 있는데 그것은 하늘나라에서 나를 기억해 기억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일이지만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과응보사상을 건너 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온 일에 대하여 심판을 받는다면 그것은 죽음밖에 답이 없지만, 그래도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면, 우리가 그런 형벌을 받지 않을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간절한 그의 소원이 그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두 죄수는 각각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마지막 말처럼 예수님에게 털어 놓습니다. 한사람은 비방으로, 한사람은 자책과 아울러 간청으로.

그런데,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 달린 두 죄수, 십자가에서 죽음의 자리에까지 같이 동행했던 두 죄수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이 예수님을 설명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 죄수가 말한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두번 째 죄수가 말한,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그리스도, 즉 구원자로서 그가 행한 일은 모두 옳은 일을 하셨다는 것을 그들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이제 또하나 일을 하십니다. 무슨 일입니까? 두번째 죄수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자, 그런 대답을 들은 죄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본문에는 그 죄수의 반응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을 조금만 발휘한다면, 그 죄수의 반응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기쁨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살면서 행한 일에 대한 평가는 자신도 인정한 것처럼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을만한 것이었으며, 그래서 이세상의 상식인 인과응보에 의하면 그는 죽음을 벗어 날 수 없었지만, 그는 예수님께 은혜 주시기를 간구한 결과, 낙원에 이르게 되는 기쁨을 얻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게 구원입니다.

그는 그렇게 십자가위에서 예수님이 구원자, 진정 그리스도이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더하여 죽음의 고비에서 죽음을 넘어서는 인생 최대의 기쁨, 그런 기쁨을 그는 맛보고 있습니다. 그 기쁨은 어떤 좋은 것을 가지게 되었을 때, 또는 즐거운 일을 만나게 되었을 때 느끼는 기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어떤 기쁨인가? 그의 존재가 총체적으로 맛보는 희열입니다. 그의 인생이 바꾸어지는 변화이기에 그는 기쁜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더해지거나 더 좋은 것으로 바뀌어서 기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변화되어서 기쁜 것입니다. 비록 이순간 사형수가 되어 세상에서는 치욕적인 죽음을 맛보지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바,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그에게 죽음을 넘어서는 기쁨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던 그 순간, 거기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를 통하여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의 의미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고난의 현장에서도 기쁨이 있었는데, 그것이 정작 우리가 가져야 할 기쁨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옆자리 두 명의 죄인이 바로 우리 인간을 대표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묻는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바로 우리 세상을 축소해 놓은 축소판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죽음을 다스리시며, 영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또한 같이 달린 죄수중 한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비방하며 마친 반면, 다른 한 죄수는 인생의 잘못을 철저히 고백한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한 결과 이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기쁨을 맛보는 그러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십자가 상에서 우리 인생들의 자리가 갈라집니다.

부활절을 기다리는 이 시점에서 십자가를 깊이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가장 극한적인 장소인 죽음의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만났던 그 죄인처럼, 예수님을 만나 그런 은혜를 맛보는 우리를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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