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월간목회' <내가 사사하는 세계석학>시리즈의 하나로써 2012년 6월호에 게재된 글이다. 애초에 아무런 고민없이 청탁을 덜컥 받았다가, 글 쓰는 내내 망서렸던 글이다. 더 깊이있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 아무래도 나로서는 부족하다 싶어, 원고를 보낸 후에 다른 분으로 교체해주십사 부탁했었는데, 다른 분에게 부탁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든지 그대로 실리게 되었다. 그래도 신학교 다닐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나혼자 추억에 잠겨보는데는 아주 쓸모있었던 글이었다. )  

 

성경의 문을 열어 보여주신 로버트 H. 슈타인 교수

 

법학을 공부하다 신학을 시작하면서 처음 접한 문제가 바로 성경해석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 해석학의 대가이며 공관복음서와 예수님의 비유 연구로 유명한 로버트 H. 슈타인 교수님의 강의를 듣게 되면서 성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되었다. 지금껏 알고 있던 성경 지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해석의 길을 제시한 로버트 H. 슈타인 교수님을 소개한다.]

 

그때, 학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휴게실에는 항상 사람들이 붐비곤 했었다. 수업과 수업 사이 사이, 그 휴식시간에 학생들이 모여서 간단한 음료와 대화를 나누느라 휴게실은 항상 만원이었다. 그 중에는 한국인 학생들도 삼삼오오 모여 환담을 나누곤 했었는데, 주제는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어떤 주제가 나오게 되면 그 것은 여기

저기로 가지를 치다가 결론은 누군가의 주석에서의 해석을 누군가 기억해내곤 그 주석서의 내용을 해설해 주는 것으로 끝나게 마련이었다.

“아 그렇구나, 바클레이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 해석이 맞겠지요.”

“매튜 헨리의 주석에 그렇게 되어 있다면…”

이야기의 결론을 맺는 사람은 어떻게 그런 주석들을 다 꿰는지 모르지만, 신기하게도 주석의 내용들을 줄줄 읊어대니 대단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견해가 다른 몇 가지씩 말이다. 그렇게 주석을 읊어대어 결론을 내리는 사람은 가끔씩 바뀌기도 했지만, 나는 거기에 한 번도 끼지 못하였다. 어디 주석을 읽어 볼 시간이 있었을까? 과목 진도에 맞추느라 교과서와 참고자료 읽기에 허덕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주석을 달달 외우는 그들이 부러웠다. 저렇게 성경해석을 거침없이 해 나가야 하는데 …

그 때, 시간에 쫓겨 가며 읽던 교과서 중에 로버트 H.슈타인(Robert H. Stein) 교수님의 <A Basic Guide to Interpreting the Bible>이 있었다. 법학(Indiana University Law School)을 공부하던 내가 신학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맨 처음 접한 문제가 바로 해석의 문제였기에, 그 과목은 나의 신학입문에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따라서 로버트 H. 슈타인 교수님은 나에게 성경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분이라 할 수 있다.

 

로버트 H. 슈타인 교수님은 해석학의 대가이시며, 공관복음서와 예수님의 비유 연구로 유명하시다. 내가 학교에 들어갔을 때에 이미 은퇴를 몇 년 앞두고 계셨지만, 후학을 위해 열심히 강의를 계속하고 계셨다. 그래서 나도 그 덕분에 그 분으로부터 두 과목 - 해석학, 신약- 을 배울 수 있었다. 먼저 해석학을 들었는데 그 다음해엔가 교수님이 은퇴하신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래서 모든 강의를 접으신다는 소식에 아쉬움을 금할 길 없었다. 그런데 수강신청 즈음에 다행이도 교수님이 한 학기는 더 맡으신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강의가 열렸다. 그래서 반갑고 기쁜 마음으로 신약학을 수강하였다. 그게 교수님의 마지막 강의였으리라. 그 다음에 교수님의 은퇴소식을 들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분으로부터 두과목을 들었다.

 

그분의 강의는 언제나 만원이었다. 그것도 대강당에서, 적어도 백명은 넘을 것 같은 강의실에서, 그분은 후학들을 위하여 열성적으로 가르치셨다, 웅변은 아니었고 차분한 목소리로 강의하셨다. 해석학 시간, 그분은 차근차근 성경 해석에 있어서의 방법론을 가르쳐 주셨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게임의 규칙, 그분은 성경에 다양한 종류의 문학양식이 있다는 것을 토대로 그것들을 해석할 때에 “경기규칙”이라는 재미있는 접근법을 사용하셨다. 예컨대 농구게임에서 선수들은 공을 발로 찰 수 없지만 손으로 공을 잡을 수는 있다. 하지만 축구에서는 반대이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도 비유는 비유를 풀어내는 방법을 사용해야 하고, 예언서는, 또 시는, 풀어가는 나름대로의 게임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때에 문자주의적 해석이 나오게 되고, 견강부회식의 엉터리 해석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아주 기본중의 기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당시 처음으로 성경 해석을 대하는 나를 생각해 본다면 그런 내용들을 스폰지처럼 받아들이던 나의 모습이 이해되리라.

 

법학적 견지에서 시도하던 법령 해석, 그리고 개별 사건(case)에의 적용과 성경을 앞에 두고 시도하던 해석, 해석이라는 말은 같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달랐다. 그 때까지 ‘지시 언어’(referential language)에 따른 해석에 충실하던 내가 ‘언약 언어’(commissive language)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하던 ‘지시 언어’에 더하여 감정을 전하며, 느낌을 유도하며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 주목적인 ‘언약언어’의 존재를 성경 속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더하여, 성경의 말씀들을 다양한 문학 양식 - 잠언의 지혜서, 예언서, 시, 비유, 과장법 등- 에 따라 다른 해석의 룰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도 교수님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Meaning(의미), Implication(함의), 그리고 Significance(의의)의 차이다. 법학적 차원에서 그러한 개념들을 이해하던 것을 성경해석학에서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해하려니, 신기하기도 했거니와 당황스럽기까지 했었다. 그 분의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그때까지 - 일반 평신도로써 - 들었고, 알고 있었던 모든 성경지식을 버리고,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가령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예수님이 개라고 모욕했다는 식으로 설교를 들었던 나에게, 그 본문(마15:21-28, 막 7:24-30)이 그 여인이 헬라인으로서 예수님은 헬라와 유대의 문화 차이를 아시고, 애완견이란 단어를 매개로 하여 그 여인과 교감하셨던 예수님의 진면목을 말해 주는 것임을 알게된 것도 교수님을 통해서이다. 그런 것이 어디 한 둘일까, 교수님의 말씀은 시간 시간마다 나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해서 성경 속으로, 풍요한 말씀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때 열심히 읽었던 책, <A Basic Guide to Interpreting the Bible>이 요즈음 한글로 번역되어 나온 것을 보니, 그 때 짧은 영어 실력으로 붙잡고 있던 그 책이 더욱 새삼스럽게 생각이 난다.

 

그렇게 교수님으로부터 해석학을 배운 다음 살펴보니, 그때까지 알고 있었던 성경지식중 많은 부분이 문자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 등등 모든 것이 혼합이 되어, 견강부회식의 해석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런 안타까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마음은 몇가지 결실로 나타났다. 교수님으로부터 배운 해석학에 의지하여 성경을 읽고서 생각한 것들을 글로 써서 여러 매체에 나누었는데, 그런 글을 엮어서 낸 책이 바로 <각주(脚註)없이 성경읽기 시리즈>이다. 그 시리즈 첫 번째 책이 <아담은 공처가였을까>라는 제목으로 출간이 되었고, 이제 8월 경에 두 번째 책인 <삭개오의 크리스마스>가 출간을 앞두고 있으니, 새삼 교수님의 해석학 강의 듣던 시절이 기억에 새롭기만 하다.

 

교수님의 말씀 중 기억나는 것 - 물론 기억이 희미하긴 하지만, 문장으로 정리해서 말하자면 - 은 다음 몇가지를 들 수 있겠다.

 

“성경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의 참된 의미를 놓친다면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설교자가 명쾌하게 메시지를 전하지 못했다면, 이는 본문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더욱더 부지런히 연구해야 한다.”

 

또 빼 놓을 수 없는 것 하나는, 교수님의 수업중에 C.S. 루이스(Lewis)를 알게 된 일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내가 알고 있었던 ‘루이스’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저자 “루이스 캐롤”이였다. 그런데 해석학 수업 중에 C.S. 루이스의 글과 루이스 캐롤의 글이 동시에 등장한 것이다. 어? 같은 사람 아닌가, 하다가 다른 사람임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C.S.루이스를 알게 된 것이다. 그 뒤로 기독교 변증가로 유명한 분임을 알게 되었고, C. S. 루이스의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순전한 기독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등이 그것이다.

 

로버트 H. 슈타인 교수님은 러트거스 대학교(Rutgers University), 풀러 신학대학원(Fuller Theological Seminary), 프린스톤 신학대학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Ph. D.) 에서 수학하시고, Bethel Seminary와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가르치셨다.

 

교수님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Commentary on Mark>

<The Method and Message of Jesus’ Teachings>

<Interpreting Puzzling Texts in the New Testament>

<Studying the Synoptic Gospels origin and interpretation>

<A Basic Guide to Interpreting the Bible>

<Jesus the Messiah: A Survey of the Life of Christ>

 

위의 책중 대부분의 책들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으니 반가운 일이다.

 

교수님과의 또 다른 인연 하나 소개하련다.

학교에서 자선 바자회가 열려서 교수님들이 물품들을 하나씩 내어 놓으셨다, 나도 허실삼아 바자회 장소에 들렀는데, 거기 보니 교수님이 사인을 하셔서 책을 두 권 내 놓으셨지 않은가? <Interpreting Puzzling Texts in the New Testament>, <Studying the Synoptic Gospels origin and interpretation>. 내가 사려고 마음에 담아둔 책들이었다. 다른 학생들도 그 책을 탐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원매자 리스트를 보니 사람들이 많이 올라 있었다. 나도 이름을 올려 놓았다. 그 바자회 - 아마 사흘 동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 끝날 마감 오후에 가보니, 웬걸 다른 사람이 다시 금액을 높여 올려 놓지 않았는가. 나는 마감 시간을 맞춰 기다리다가, 마감 직전에 다시 이름을 올려 놓았다. $17.50. 다행이도, 그 후로는 아무도 오지 않았고, 그렇게 해서 그 책들은 나의 것이 되었다. 거기엔 교수님의 다음과 같은 자필 서명이 있었다. With Best Wishes in Christ. Robert H. Stein.

그 책들이 나의 애장도서임은 말해 무엇하랴! 지금도 그 책들을 대할 때마다 그 책에 사인하고 계셨을 교수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모쪼록 건강하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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