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없이 성경읽기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 출애굽기 3: 7-10

올해도 어김없이 광복절을 맞이합니다. 우리가 일본의 강압통치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광복절, 그 날의 의미를 다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런 광복절을 맞이하면 저는 김구 선생이 떠오릅니다.
광복절을 맞이하여 생각할 사람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분으로 김구 선생을 떠올립니다. 그렇게 백범 김구 선생이 떠오르는 것은 그가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사랑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한 사람. 그분이 바로 김구 선생입니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광복이 되었는가, 어떻게 해서 주권을 되찾았는가? 바로 그렇게 사심없이 자기 자신을 버리며 광복운동을 하신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독립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백범의 발언 중에서 나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자주독립이라 하신 말씀, 지금도 되새겨 봐야 할 말입니다. 김구 선생은 늘 대한독립이란 소원을 가슴에 품고 있었음이 분명하고, 그런 소원이 이루어져서, 하나님이 그런 소원에 응답하셔서 우리나라가 독립을 하게 된 것이지요.

광복절을 맞이하여 좋은 사례로 살펴볼 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해방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소원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애굽의 압제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개인적인 소원들도 있었겠지만, 그들의 공통적인 소원은 다름이 아니라 민족의 해방이었습니다. 누구 한사람 예외 없이 애굽의 질곡에서 벗어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런 소원이 드디어 하나님에게 당도했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입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상달되었다는 말은 그들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 그들을 구원해 내시는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내어 말씀을 나누시며,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시려고 하는 그 순간의 하나님과 모세와의 대화를 기록한 구절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 아실 것이기에 생략하는데, 저는 오늘 본문 9절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출 3:9)

우리말 성경, 개정개역에 의하면 아주 내용이 평이합니다. ‘내가 보았으니’, 라고 과거형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은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 애굽 시키려는 임무를 맡기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말을 들은 모세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자기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설득 작업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 중에 한 부분인 9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면인데, 개역개정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내 백성을 애굽이 괴롭히는 것을 보았다, 며 과거형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표준새번역으로 같은 본문을 읽어보면 무언가 다른 점이 발견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보인다.>

“지금도”, “들린다”, “보인다”. 모두다 현재형입니다. 개정개역 성경은 과거형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표준 새번역 성경은 현재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하나님은 지금 모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백성에게 가 있습니다. 온통 신경이 거기에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지금 모세와 대화하시면서도 ‘내가 지금 보고 있다’, ‘그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의 신음소리가 들린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장과 3장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가 어떻게 바꾸었습니까?
아직 하나도 바꾸어진 게 없습니다. 그대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된 일 때문에 부르짖는 일이 아직도 진행중입니다.

따라서 3장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은 목하 진행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에는 그것이 현재 진행형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지금 하나님의 눈 앞에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도 대부분, 현재형으로 번역을 하는데, 제가 읽은 영어 성경 세가지 모두다 Now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킹제임스버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Now therefore, behold, the cry of the children of Israel is come unto me.
<그러므로, 보아라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음이 나에게 (들려) 오고 있구나>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엄마가 밥을 하면서도, 빨래를 하면서도, 집안에 있는 젖먹이 아이에게 온통 신경이 가 있듯이, 그래서 아이 울음소리 들리면 얼른 뛰어가 젖을 물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은 실제적입니다. 결코 남의 집 건너짚듯이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 아니라 현재 하나님의 눈 앞에 그런 고통이 보이고 들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이 하나님에게는 실제적인 아픔,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렇게 표준새번역의 번역처럼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학대하는 것도 보인다.>는 말씀, 하나님의 시선이, 신경쓰심이 현재형인 것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아직 아플 때, 우리의 아픔이 계속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계시며, 그런 동안에 우리에게 무엇을 하시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의 아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현재, 지금도 보고 계신다, 듣고 계시는 그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이라 생각한다면 지금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기도를 듣고 계실까요?
우리에게, 아니 우리 민족중에서 가장 절실하고 안타까운 소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지금으로부터 60여년전 우리 민족의 울부짖음이 하늘에 들려, 이 나라가 독립이 되었다면, 지금 현재는 어떨까요? 

그 당시 자기자신을 버려가면서 나의 소원은 이 나라의 독립입니다, 라며 몸바쳐 싸운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심이 분명한데, 그 살아계신 하나님은 어떤 기도를 듣고 계실까요?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뭐 광복절을 맞이하여 소원을 말씀하라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가지고 있는 소원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국민들의 평균적인, 또는 보편적인 소원은 무엇일까요?
아파트 평수 늘려가며 사는 것? 아들 딸 대학 좋은 데 가고. 무사히 졸업하고 좋은 직장 취직하는 것? 취직해서, 높은 자리 올라가는 것이 소원이겠지요.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작년의 일입니다.  KBS 방송 <추적 60분>이란 프로를 보고 있었는데 참으로 가슴 아픈 소원 하나가 소개되었습니다.
추적 60분, 그 때의 주제는 한진중공업 사태였는데,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 중에 저를 감동시킨 장면, 한진 중공업 해고 근로자 부인의 소원입니다. 

그 여자의 남편, 즉 한진 중공업 직원인 남편이 떡볶이를 맛있게 잘 만든답니다.
그 남편이 부엌에서 떡볶이를 만드는 모습이, 등을 보이면서 떡볶이를 만들고 있는 그 모습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 여인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렇게 남편이 만들어주는 떡볶이를 먹는 것, 그것이 소원입니다”. 남편이 만들어 주는 떡볶이를 먹으면서 TV 프로그램 <일박이일>을 보는 것이 그 사람의 소원이랍니다.

저는 그 소원을 생각하면서, 만약 하나님이 이 땅을 내려다 보시면서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 하시면, 그 부인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들었던 말씀 중에 한가지 생각이 납니다.
목사 안수를 받는 안수식에 선배 목사님들이 와서 격려사, 또는 권면의 말씀을 하셨는데, 그 중의 한 분,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가 열심히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자기 개발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하는 말 중에 이런 예화를 들어 주셨습니다.
목사의 그릇은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
마치 물통 안에 들어 있는 물을 측정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물통이 어떤 물통인가? 우리가 흔히 보는 프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 통짜로 된 것이 아니라, 예전에 쓰던 물통, 나무판을 하나씩 잘라서 주욱 이어 엮어 놓은 물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판, 연결되어 물을 담는 그 나무 판이 하나라도 갈라지거나, 다른 것에 비해 짧다면 물을 어디까지 담을 수 있는가?
바로 갈라진 나무판 거기까지, 다른 것보다 짧은 판 거기까지만 담을 수 있기 때문에.
바로 거기까지가 당신의 그릇이다, 라는 경계의 말씀이었습니다.
목사는 그러므로 어느 나무 판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안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지식이면 지식, 지혜면 지혜, 영성이면 영성, 등등 어느 한 분야라도 소홀이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예화 속의 물통을 우리나라의 행복물통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나라 사람들의 행복을 물통에 담아 주시려고 하시는데 물통을 만들기를, 모든 사람의 소원으로, 크고 작은 소원을 모두 이어 엮어서 나무판으로 만들어 물통을 만들어 가지고 오면, 그 안에 내가 행복을 담아주겠다, 하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소원과 행복은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져야만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소원이 가지각색 여러가지 층하가 있겠지만, 우리 나라 전체로 볼 때 생각한다면 아까 말씀드린 남편이 만들어 주는 떡볶이를 먹으며 일박이일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는 것, 그것이 바로 조그마한 소원이며, 가장 절실한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 이외에 다른 사람의 소원이 아무리 크고 멋있고, 또한 절실하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의 전체 행복은 그 것을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복을 넘치도록 주신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누리기 전에 다 쏟아져 버리는 법, 그래서 우리는 먼저 그러한 가슴 아픈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제 생각이 너무 과한 것일까요?
광복절 아침에 태극기를 게양하면서 우리 아파트 동에 몇집이나 태극기를  달았나, 세어 보았더니 저희 집을 포함해서 세집이었습니다. 광복절에 대해서 도통 관심이 없는 것이지요, 관심도 없고 그 날의 의미도 이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실상 광복절은 이제 개개인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있다면 역사적 의미, 우리나라가 일본의 힘에 밀려 나라를 잃어버리고 모진 고난을 당하다가, 겨우 나라를 되찾은 사실, 그래서 그런 일을 다시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 이 나라를 강하게 만들어, 그야말로 어디 나가서도 무시당하지 않는 나라가 되어야 하는데, 누가 그런 데에 신경을 씁니까?

나 먼저 잘 살아야 하고, 내 자식이 남의 자식을 물리치고 일등을 해야 하고 그래서 모두가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는 마당에서 누가 그런 사람의 소원, 누가 거들떠나 봅니까?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그런 사람에게 가 있다는 것입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는 그 시점에서, 우리나라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아주 조그마하고 힘없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강대국 사이에서 우리나라를 살려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현재의 시점에서 하나님이 귀 기울여 기도를 들으신다 하실 때에
가장 관심과 신경을 쓰셔서 들으실 소원은 무엇일까요?
아까 말씀드린 그런 조그마한 소원, <내 남편이 만들어주는 떡볶이를 먹으며 좋아하는 티부이 프로그램을 보고 싶다>는 그 소원을 일착으로 들어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빠져나오면서 한사람도 빠짐이 없도록 단속을 잘해서 모든 백성들이 빠져 나와 모두다 홍해를 건넜습니다. 모든 백성이 홍해를 건너자, 하나님이 물결을 다시 합하셔서 애굽을 벌하셨습니다. 맨 마지막에 건너는 그 사람까지도 하나님은 돌보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그런 자그마한 소원, 누가 들으면 우스울 만큼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아주 조그마한 소원을 하나님께서 바로 이 시점에서 들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일박이일>을 언제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집사람이 만들어주는 떡볶이를 먹으면서 말입니다. 그런 소원은 이루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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