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없이 성경읽기

내 딸아,라고 부르시는 예수님 / 막5:34-36

제가 여기 병원에서 일하면서, 실수를 여러가지 했는데 가장 큰 실수가 뭔가 생각해보니, 바로 환우분들의 나이를 잘못 읽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여자분들의 나이를. 어떤 때에는 병문안 온 동생을 언니냐고 묻기도 하고, 언니를 어머니냐고 묻기도 하고..
하여큰 그래서 여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 그 죄가 어디 보통 죄입니까?
어떤 아주머니가 입원하셨는데, 보호자로 같이 오신 남편분을 잘 못 보고 아들이냐고 물었다가 혼쭐이 날뻔 했는데, 그 환우분이 아픈가운데에서도 눈흘김을 하는 여유(?)를 갖게 했으니 그것도 일종의 좋은 일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건 저 혼자만의 생각인가요?
어쨌든 환우분, 특히 여자분들의 얼굴에서 나이를 읽어내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예수님도 그런 경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는 말씀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그때 그 여인의 얼굴을 보고 나이를 잘 못 읽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딸이라니요?
본문 전후를 살펴보면, 분명 이 여인에게는 ‘아주머니.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십시요’라고 해야 적당할텐데, 예수님은 딸이라 불렀으니, 예수님도 저 같은 실수를 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이 딸이나, 딸 벌 되는 사람은 아니라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흔히들 예수님을 본받자, 하는데 저도,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한가지 본(?) 받는 것이 있구나, 하는 마음에 오늘 본문을 살피면서 기뻤습니다.

참, 여기 우리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성경을 보면 대부분,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할 때에, 하대로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나이, 신분에 관계없이 예수님은 항상 상대방에게 하대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하대를 하신 경우도 있었겠지만 보통은 상대방에게 경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나이도 모르는데 아무렇게나 반말을 썼겠습니까? 번역상의 문제라 봅니다.
하여튼 여기에서 예수님은 딸아,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상합니다.

그럼, 우리가 말하는 것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언제 상대방을 ‘딸아’라고 부르는지 살펴볼까요?
첫번째는 당연하게도 나와 혈연적으로 딸인 관계인 사람에게 딸아, 라고 부릅니다.
자녀, 내 아이인 경우 딸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딸이 맞고 또 당연히 그렇게 딸아, 라고 부르는 것이 사리상 전혀 틀린 것이 아니지만 실제로, 우리가 자녀인 딸을 부를 때, 딸아, 라거나 딸!~~~ 이라고는 부르지 않습니다. 대개의 경우 그 이름을 부르지요,,,
혹시 심청전에 등장하는 심봉사가 다시 살아 돌아온 딸 심청을 만났을 때에, ‘딸아” 라고 불렀을까요? “내 딸, 청아!” 라고 불렀다고 생각합니다만…
반면 요즈음, 아들 가진 부모, 특히 엄마는 “아들~~”이라고 부르는 모습을 많이 보는데 그 이유가 무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이유 아시는 분 있으면 저에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여인은 당연히 예수님의 딸이 아니지요. 예수님은 결혼한 적이 없고, 따라서 자녀를 가진 적이 없으니 딸이 있을 리가 없지요.
따라서, 이 여자는 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딸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다음 어떤 경우에 딸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드물기는 하지만 여자 아이가 너무 귀엽거나, 예뻐서 ‘너 내 딸 해라, 그럼 맛있는 것 사주고 할게’, 할 때에 남의 딸이지만 내 딸이라고 부르는 경우 있습니다.
어린 아이, 철모르는 경우에는 이렇게 부르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글쎄 나이 먹은 여자에게도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경우는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니, 예수님이 그 여인을 향하여 딸이라 부르는 것이 이상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여인 나이를 한번 따져볼까요? 물론 여성들의 나이는 기밀사항 (?)이라고는 하지만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하여는 부득불 나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딸이라고 부를만한 여지가 있는지 살펴보려는 것이고, 또한 성경은 그런 의문에 대하여 몇가지 단서를 남겨두고 있으니 말입니다.

첫번째 단서는 25절입니디.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온 한 여인이 있어>
그러니 그 여자의 나이는 일단 12살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12년을 앓아 왔다니까, 그리고 그것이 현재 진행형이니까 일단 그 여자의 나이는 12살 이상입니다.

그럼, 두번째 단서는 무엇일까요?
26절 <가진 것을 다 허비하였다>는 말에서 무언가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가진 것, 부모가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여자가 가진 것이라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그 여인이 부모의 슬하를 떠나 자기 힘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하면서, 가지게 된 것을 말하니 그말은 결혼했다는 말이 되고, 설령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혼자 독립하여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당시 이스라엘에서 성인이 되는 나이는 13살이고, 여자들이 결혼하는 평균 연령은
예수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연령이 많지 않은 때인 10대 중반에 결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15살에 결혼했다 치고, 거기에다 12년을 더하면 27세.
더구나 이 여인은 병으로 12년을 앓았다고 하니, 얼굴이 더 나이 들어 보였을 것입니디
그리고 그 당시 예수님의 나이는 30대 초반 
따라서 그 여인은 예수님과 거의 비슷하거나 오히려 나이가 많은 사람이 확실합니다.
그러니 도저히 딸이라고 부를 수 없는 여자를 예수님은 딸아, 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런 여자를 향해 왜 <딸, 아> 라고 부르셨을까요?
왜 예수님의 입에서 갑자기 딸아, 라는 말이 튀어 나왔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몇가지로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먼저,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여자 얼굴 볼 줄을 모른다는 가정입니다.
저처럼 얼굴만 보고는 나이 가늠을 할 수 없어 그만 나이 든 여인을 딸아, 라고 불렀다는 것인데, 이것은 일단 가설로 남겨두고 다른 가능성을 찾아 봅시다. 성경에서 여러가지 힌트가 보입니다.

22-23절에서 힌트 하나를 찾았습니다.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에게 와서 엎드려 간구합니다.
뭐라 말합니까?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그말을 들은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어린 딸이 죽어간다는 말을 듣는 순간, 예수님의 마음은 안타까움으로 가득 차고, 그 딸이 눈에 어른거렸을 것입니다.
‘열두살 먹은 어린 아이인데, 얼마나 아플까,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그 아이와 그 아버지의 아픔으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경험하지 않습니까? 누가 힘든 상황에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것으로 마음이 아프고 마음이 가득차서 다른 것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경험, 다 해보셨지요,,
우리도 그런데 예수님은 오죽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간다는 그 가슴아픈 사건으로 가득차 다른 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야이로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두말 하지 않고, 야이로를 앞장 세우고 그 집으로 가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모두 기록된 이야기인데 
세가지 복음서 모두다 회당장 야이로가 와서 엎드려 간구하니, 예수님이 다른 말씀없이 바로 야이로를 따라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에 그만큼 예수님이 이 일을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오직 한가지, 야이로의 딸, 그리고 구원받아 낫게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예수님이 눈앞에 혈루증 여자를 보는 순간, 그만 입에서 그 말이 나와 버린 것이지요. 마음 속에 가득차 있던 것, 소녀 (딸)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딸아,라는 그 말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해석, 이것도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이 가정은 예수님이 차분하게 그 여인과 대화를 나눈 기록이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아 보입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를 되돌려 봅시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기 위해 급한 마음을 가지고 길떠나는 예수님의 그 행동은 예수님의 뜻대로 되지 않았지요. 그 중간에 혈루증 여인이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혈루증 여인은 예수님의 관심을 어느 정도 빼았을까요?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전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언제까지? 자기 몸에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아실 떄까지.
30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스스로 아시고>
자기 몸에서 그 능력이 나가기 전까지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셨는데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신 다음에는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바쁜 걸음을 멈추시고 그여인을 불러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때 자기 앞에 선 사람이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것을 비로소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전후 사정을 다 물으시고, 들으셨습니다. 그런 사정을 다 듣고 나니, 더군다나 12년이나 앓아 고생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문득 야이로의 딸이 떠오릅니다. 그 아이는 지금 그 나이인데, 한 인생이 나서 자라는 동안, 이 여인은 그렇게 고생을 했구나, 그러는 순간 예수님의 마음 속에 그 아이의 가슴아픈 사연이 눈 앞에 엎드려 있는 여인의 상황에 오버랩 되어 예수님의 마음을 때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언가 그 여자에게 말씀하시려고 하는데 그때까지 예수님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말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야이로가 예수님에게 다가와 무릎 꿇고 간구하던 그 말,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그 말이 예수님의 가슴 한 복판을 차지하고 있던 차에, 그 여인의 상황을 듣자, 그 마음속에 있는 야이로의 말이 바로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나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가만히 살펴보면, 그래서 예수님이 혈루증 걸린 여인에게 하신 말씀과 야이로가 예수님에게 와서 한 말 중에 같은 말이 등장합니다. 무엇입니까?
그 하나는, 내 어린 '딸',
또 다른 하나는 <구원을 얻게 하소서>의 '구원'

예수님은 그 여인을 너무 긍휼이 여기는 상황에서 자기도 모르게 딸아,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여인에게 구원의 선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누구나 인생에 어려움이 있구나, 아픔이 있구나, 하시면서 발걸음을 멈추고 그 두사람의 인생을 들어다 보셨을 것입니다.
그 여인이 처한 상황을 묵묵히 듣고 계시던 예수님에게 그 여인의 안타까운 사연이, 그리고 딸이 사경을 헤메고 있는 야이로의 그 간절한 마음이 전이, 이입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딸 가진 아버지의 아픔이 이번에는 그 여인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전달이 된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아픔이 예수님의 마음 속에 가득차 있던 그 아픔이 예수님의 입을 통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이 나이가 많건 적던, 아이든 아주머니든 또 할머니든, 예수님의 눈에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딸을 바라보는 심정이 되어 딸아, 라고 부르셨을 것입니다.
딸아,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그 마음이 이해되십니까? 저는 해석하기를, 그래서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딸아, 라고 부르시며, 말씀하셨다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이 그 여인을 향하여 딸이라고 부르는 그 순간에, 그 딸이라는 말에 유독 귀가 쫑긋하고 끌리는, 그래서 유심히 듣게 되는 또하나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회당장 야이로, 지금 예수님 옆에 바짝 붙어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아니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본의 아니게 길을 멈추어 서있습니다.
그 멈춰있는 시간, 그에게는 일각이 여삼추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고 다른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 그의 가슴이 얼마나 타들어갔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분명, 그 앞에 엎드려 있는 여인이 어린 나이의 여자가 아닌데도 '딸아', 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 '딸아', 라는 말씀을 들을 때에, 야이로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저 음성이 나에게 하는 말이라면, 나의 딸에게 하시는 말씀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씀 내용은 분명, 내가 예수님에게 간곡히 부탁하던 그 말, 그대로가 아닌가
나에게도, 그러니 내 딸에게 하시는 말씀이면 좋겠다', 하면서 그의 마음은 한편으로는 시간이 지체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가 충만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가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합니다. 잔인하거나 아니면 너무 냉철하거나.
그가 야이로의 마음을 조금만 헤아렸더라도 바로 35절의 말씀을 기록하는 일은 조금 더 늧추었을 것이니, 35절을 보십시요..뭐라 기록하고 있습니까?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너무 참혹하지요,,,,
야이로의 그런 애타는 마음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늦추어서 나중에 소식이 왔다고 기록했으면 그래도 마음이 덜 아팠을 것인데, 마가는 바로 예수님이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라고 기록하여 바로 그런 야이로의 즐거운 소망, 즐거운 상상을 잔인하게 허물어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게 인생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나마 위로받으려고 몸부림 칠 때에 현실은 바로 우리옆에 와서 우리 가슴을 후벼 놓습니다. 한시도 우리의 마음이 평안을 누리지 못하도록 우리를 휘저어 놓는 것입니디.

그러나, 아직 실망할 떄가 아닙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다음 말씀, 이제는 딸이 아닌 남자인 야이로에게 하시는 말씀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오늘 저는 본문 3개절을 통하여 예수님이 혈루병 걸린 여인에게, 그리고 야이로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를 해 볼까요?
34절의 그 여자에게, 혈루병 걸린 그 여자에게 하신 말씀은 대상이 일차적으로 그 여인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또 한 사람, 회당장 야이로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금 집에서 딸이 죽어 그 소식을 들고 오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꼐서 낙담하게 될 야이로에게 미리 선제적으로 그 말씀을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주여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라는 야이로의 간청에 대한 대답이 바로 그것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4절과 35절에서 연커퍼 두번 쓰인 ‘딸’이라는 말은 그 뒤로는 사라집니다.
이상하게도 딸이란 말은 정작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야이로의 집에 가시는 예수님의 입에서는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딸이란 호칭은 이미 야이로에게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쓰였기에 이제 새삼스럽게 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그 뜻을 전했다고 마가는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마가는 이 34절과 35절에서 딸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와 간구한 그 내용,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에 대하여 예수님이 살려주심으로 응답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
바로 예수님이 혈루병 걸린 여인에게 딸아, 네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말하는 시점에 아미. 

저는 서두에 여자분들의 얼굴에서 나이를 잘 못 읽는다 하면서 예수님도 혹시 그런 분이 아닌가 했는데, 예수님은 그럴 분이 아니시지요.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딸이라 부르신 것은 실수가 아니라, 그 아픈 사정을 다 아시기에 그 아픔을 달래주시려고 긍휼의 마음을 표현하시려고 그렇게 부른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들이 아무리 나이를 먹고 세월이 흐른다 해도, 예수님에게 우리는 여전히 딸 같은 존재이고 아들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단순히 딸, 아들이 아니라 오늘 예수님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야이로의 그 간청..
그 말 그대로 ‘내 딸을 ..그 위에 손을 얹으사,,구원을 받게 하소서’ 하는 그 기도가
가슴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휘몰아 치고 있는 예수님에게 우리는 여전히 그런 딸, 혈루증 걸린 여인처럼, 인생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경을 헤매고 있는 12살 먹은 어린 소녀처럼, 아픈 시간을 보내고 살아가는 아들, 딸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우리를 보고 예수님은 뭐라 말씀하십니까?
바로 혈루증 걸린 여인에게,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그 바쁜 걸음에도 일부러 걸음을 멈추시고 그 사정을 다 들어주시던 것처럼 우리의 발걸음 소리, 지쳐서 힘없는 그 소리에도 바삐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다 들어주시며, ‘내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는 말씀을 주시는 들려주시는 분 아니십니까?

그런 예수님의 음성을 모두 듣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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