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서론 – 그의 책들이 수상하지 아니한가?
<문득 생각 같아서는 배의 양머리를 손으로 쥐고 바닷속에 축 처 넣었다가 배를 오염시키고 있는 인간, 쥐, 벌레 같은 산 것들을 몽땅 떠 내려가도록 뒤흔든 다음에 깨끗이 씻기고 텅 빈 배를 다시 띄워 놓고 싶어진다. >
(희랍인 조르바, 25쪽)
기독교인 환자의 병상에는 어떤 책들이 있을까? 환우들이 즐겨 읽는 책은 어떤 것일까? 성경? 있다. 성경은 그래도 기본이다. 비록 읽지 않는다 하더라도 병상의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또 어떤 책이 있을까? 조엘 오스틴의 책이다. 그래서 병상에는 예수와 조엘 오스틴이 나란히 놓여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예수와 조엘 오스틴은 병존한다. 그것도 동격으로.
조엘 오스틴의 책들, 참으로 이상한 책이다.
기라성 같은 많은 분들이 추천사를 썼다. 몇 페이지에 걸쳐 우리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각계의 권위자, 리더들이 그 책을 읽어보기를 권하는 ‘강추’ 추천사를 써 놓았다. 읽으면 인생이 바뀐다고.
일례로, 한국에서 번역된 오스틴의 베스트셀러
또한 많은 독자들이 그 책을 읽고 칭찬을 한다. 이구동성으로 그 책을 읽고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그 책을 들고 읽고 있는 환자들 백이면 백 모두다, 그 책을 읽고 힘을 얻는다고 한다. 나에게도 읽기를 권하고, 어떤 분은 일부러 책을 사서 선물하면서 읽어보십사, 간청한다.
읽고 나서 다른 환자들에게 읽혀주기를 바라면서. 지금까지 백이면 백, 이라 하면 너무 과장된 것이겠지만 현실은 그렇다. 그들은 조엘 오스틴의 책에서 힘을 얻는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내가 그 책의 위험성에 대하여 말할라치면, 무슨 소리냐고 힐난하는 표정이다. 책을 펴가면서 여기 저기 짚어주며 설득해 보았으나 “은혜 받고 힘내면 그게 좋은 것 아닌가요?” 라는 대답에, 이제는 개별적인 설득을 포기했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그 책을 읽지 않고 그러는 줄 알고, “그런 좋은 목사님의 책을 읽기나 하시고 비판하시는지요?”라 말한다. 내가 어찌 읽어보지 않았을까? 읽어도 “제대로” 읽었다.
'아니 이런 책이?' 할 정도로 뻔히 그 속이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곳곳에 숨어 있으니 문제라는 것을 '제대로' 읽으면 보이는데, 어찌 그냥 건성으로 읽었을까?
'제대로' 읽은 결과, 그책은 단언컨데 달콤해서 입안에서 살살 녹는 사탕이다. 아니 솜사탕이다. 약으로 치자면 전혀 약효가 없는 가짜 약이다. 아니 약효가 없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번 맛을 들이면, 진짜 약은 전혀 먹으려 들지 않으니 해로운 약이다.
게다가 중독성이 있어, 이제 <긍정의 힘>은 <잘되는 나>를 거쳐 <최고의 삶>에 이르렀다. 어디 그뿐인가? 그 책들은 가지를 치고 줄기를 뻗는다. <실천편>, <직장인 편>, 또는 <성경공부>라는 타이틀로 얼굴을 바꿔가며 인쇄에 인쇄를 거듭하고 있다. 그렇게 잘 팔리니, 아마 지금쯤 어디선가 조엘 오스틴의 다음 책이 준비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런 오스틴의 해악에 대하여 아무도 그 위험성을 경고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아니다, 이미 많은 경고가 있었다. 그 약은 마약이니 먹지 말라는 경고가 수 차례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우선 먹는 맛이 달콤하니 그런 경고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을 그렇게 방치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게 올바른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저 달콤한 가짜 약에 홀려 바른 말씀을 배척한다 해도, ‘평양감사도 저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데, 놔두지’ 하는 식으로 포기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기로 한다.
방법은 다른 게 없다.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조목 조목 무엇이 문제인가를 따져보는 수밖에. 그래서 그들이 그토록 은혜를 받으며 읽었다는 오스틴의 책들이, 쓰레기에 다름 아님을 알려주는 수밖에 없다.
먼저, 바른 시각을 가지고자 원하는 분들을 위해 조엘 오스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책들을 여기 소개하려고 한다. 물론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그런 책들이 있으면 계속하여 여기 소개하려고 한다. .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마이클 호튼, 부흥과개혁사, 91쪽~ 136쪽
<바벨탑에 갇힌 복음>, 행크 해네그래프, 새물결프러스, 83~91쪽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옥성호, 부흥과개혁사, 198~228쪽
<뉴에이지 신비주의>, 김태한, 라이트 하우스, 31~53쪽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부키, 175~205쪽
그러나 위에 열거한 책들을 일반 독자들이 한꺼번에 (사서, 또는 구입해서) 읽기는 어렵다. 또한 그 책들에서 조엘 오스틴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일부분이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조엘 오스틴의 ‘말’들을 분석해 놓지는 못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다.
그래서,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를 읽고 은혜 받았다는 교인들에게 이래서, 이 부분은 잘못 되었고, 저래서 저 부분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하나 하나 짚어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오스틴의 책들을 축조식으로 읽어가며. 그 책들이 어떠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지 따져볼 것이다. 그의 책들이 실로 수상하다는 것을 말이다.
오목사님, 오스틴이라는 분이 기독교인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요?^^
어떻게 저렇게들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비판적 시각도 만만치는 않더라구요.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요,
그 비판내용속에 오스틴이 말한 내용들이 중첩되어 있다는 거여요.
"에잉 뭐야, 비틀었을 뿐이지 따라쟁이들 같넹.." 이러게 된다니깐요. ^^
그래서 무엇보다도 기독교에 대한 바른 시각이 먼저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앞으로 우리 기독인들이 성서도구적 신앙관에 머물러 있는 한
오스틴류의 사상들은 볼라벤보다 더 큰 힘을 뽐내겠지요?
저도 그 책 짜증이 많이 났어요. 머야.. 개폼잡고 있잖아? 그랬어요. ^^
목사님, 블라벤 전주 비껴 갔나요?
여기 충청도는 아직 숨 죽이고 있어요.
태풍피해 엄써야 될텐데.. 걱정이네요.
여기 전주에도 피해를 끼치고 ..현재 진행중입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우리 병원 앞에 있는 아파트에 유리창이 깨진 사례가 적어도 7-8 군데
제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심지어 제가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에서는 차량이 바람에 밀려 ( 풋 브레이크를 채워놓지 않은 모양 )
앞 차를 들이 받아 놓은 모습도 보았습니다.
수련회 잘 다녀오셨는지요?
오스틴의 경우는 성서도구적 차원으로 접근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세상의 온갖 잡설을 마치 성경의 진리인양 호도 하고 있습니다.
세속주의, 성공주의의 사설(邪說)들에다 성경구절을 적당히 깔아놓은 것들인데
성경구절이 들어있으니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듯이 보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적이라 합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자 하는 첫번째 작업은 ........그 둘을 구분하여 분류해 보여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라라님도 같이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직도..빗소리가, 바람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평안하시길!!
삼송님!!!!오랫만에 댓글을 뵙습니다. 잘 지내셨지요?
저의 부족한 글, 읽어주신다니 더더욱 감사합니다.
삼송님께서 말씀하신 것, 많이 듣습니다. \
긍정이 그 나름대로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나름대로 ( 임상학적으로? ) 의미있는 결과도 있다는 것도 듣습니다.
앞으로 하나 하나 짚어가면서
과연 그러한 효과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사람들에게 좋으니 괜찮다고 하는 것인가
생각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더군다나 오스틴이 말한 바 '긍정'이
< 심리적 효과가 아닌 예수님안에서 긍정을 강조한다> 는 것인지도 생각해 보렵니다.
물론 모든 것에는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저는 오스틴의 사설을 부정, 긍정 적인 측면으로 나누어서 살펴볼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지만
삼송님의 고견에 따라 그 두가지 측면을 제 힘닿는 데까지 한번 짚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차제에, 제가 글을 올릴 떄마다 삼송님도 같이 동참하셔서
과연 어떤 것이 주님의 뜻인지 알아보도록 하시면 어떨지요.
삼송님의 의견을 주시면 바로 바로 제가 반영하는 것으로 하면 어떨지요?
목사님 건강하셨습니까? 정말 존경합니다.
제가 글을 적다가 예전에 다비아에서 조엘오스틴글들이 올라온 것을
보고 제가 생각을 잘못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글을 지웠습니다.
목사님께서 방금 제글을 보셨군요 죄송합니다.
조엘 오스틴의 글들도 저도 별로 좋게 생각안합니다.
이분이 미국 보수교회 흐름을 반영하는 것은 알았지만
미국교회내에서도 이단 취급까지 받았던 사람인 것은 제가 잘몰랐습니다.
예닮교회 김진호목사님이 조엘 오스틴 책을 번역하는데
일조하셨는데 지금 예닮교회에 들어가서 김진호목사님 설교를
들으니 조엘오스틴과 거의 비슷하고 신학적으로 아니다 라는 생각을 방금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신학방향성과는 거리가 많습니다.
그냥 제가 좋게 볼려고만 생각했습니다.
오목사님 글을 보면서 제가 다시 공부를 많이 해야 할것 같습니다.
저 말씀은 무시하시구요 목사님께서 의도하시고 바라시는 방향대로
짚어주십시요 죄송합니다.
감히 목사님의 글에 반론을 제기한 것은 전혀 아니구요.
저는 예수님안에서의 긍정은 무엇일까? 그런 측면에서 생각이 들어서요
신학도 제대로 모르면서 질문만 생기네요
정용섭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네요
내면의 가능성을 끌어올리려는 '긍정의 힘' 유의 신앙적 태도는
철저하게 자유로운 성령에 의존하는 기독교 영성이 아니라
심리학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인간학적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차이를 예민하게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제가 위의 글을 보면서 확 깨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목사님 건강하세요
어? 삼송님이 댓글을 삭제하셨네요.....
제가 댓글에 대한 댓글을 올리는 동안에 삭제하셨네요.
그래서 저도 저의 댓글을 삭제하려다가, 아무래도 삼송님의 생각에 일리가 있는 듯해서
그냥 살려 놓고, 다시 이 글을 씁니다.
많은 분들이 오스틴의 <긍정의 힘>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생각하기를, 제 생각만 옳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댓글에 말씀드린 것처럼,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하는 의미에서
위의 댓글을 살려 놓았고, 다시 한번 이 란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의 뜻을 두드려가며 알아보는 심정으로 같이 의론해 보기를 원합니다.
저도.. 삼송님의 글을 읽어보다가
사람마다 각자 생각이 다른데 일방적으로 말씀 드리는 건 아닌가,
좀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한 때는, 어디를 가든지 오스틴의 이야기가 화제거리였지요.
물론 말씀드린 것처럼 비판의 말씀들도 당연히 따라 다녔고요.
그런데, 그 비판이라는 게
저희들이 지향하는 신앙의 방향성하고는 많이 틀리더라구요.
삼송님께서도 이미 감지하셨겠지만,
정목사님이나 오목사님, 여기 다비아에서 추구하는
신학의 방향과는 많이 어긋나 있을 거예요.
저도 그렇게 느꼈거든요.
한 때 정목사님 설교비평책이 시중에 나와 있을 때
제 주변의 많은 분들이(책을 꼼꼼히 읽어봤다는 분들조차)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해.."이런 판세였거든요.^^
그런 분들이 지금은 기독교 신학을 올바로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계시답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 이런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건 아닐런지요.
별나서도 아니고 잘나서(?)도 아니고요.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말씀 하신 것처럼
오직,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해서 "과연 누구신가?"의 질문인 아닐까 싶습니다.
삼송님, 혹여..
저로 인해서도 마음 상하신 게 있다면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라라님, 갈고 닦은 내공으로
저랑 같이 오스틴 한번 제대로 손(?) 좀 보십시다.
정말 제대로, 오스틴을 읽어보십시다.
그래서 무엇이 사람들을 유혹하는지, 그래서 무엇이 잘 못된 길로 이끌어가는 것인지
분별해 내어, 안개 속을 걸어가는 듯난 이 세대에
주님의 글을 잘 찾아내는데 라라님이 저의 부족함을 채워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삼송님도, 같이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 목사님, 오랫만입니다. 다시 한판 시작하셨군요. 이곳 미국에서도 비교적 건강하다는 교회의 교인들 조차도 조엘 오스틴의 책들을 읽고 은혜받았다며 서로 권하고 나누는 것을 종종 보아왔는데요, 저 같은 평신도가 '이래 저래서 요리 조리 위험한 내용이 많다' 그러면, "목사님도 괜찮다며 추천했는데, 당신이 뭘 안다고 토을 다느냐" 뭐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곤 했지요. 역시 주요 이슈는 목사님들의 말발이 잘 먹히는 구나 그런 생각이 다시 들었는데요, 많은 기대가 됩니다. 주변의 많은 분들에게 너얼리 너얼리 소개해도 되겠지요? 이번 글들이 '사영업'에 이어 많은 분들에게 '인지부조화'를 일으켜 새로운 영적인 세계에 접목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질문을 잘 하는 것이 공부를 잘 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계속하면서 하루하루 살고 있습니다.
오 목사님의 글쓰기에 성령님의 보혜가 넘치시기를!
김명곤 드림
오 목사님,
오스틴의 책읽기에 시간을 쓰시게 되었군요.
저는 그분의 책을 조금 읽다가 짜증이 나서 도저히 못읽겠던데요.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하십시오. ㅎㅎ
기대하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