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엘 오스틴 비판적 읽기 - 3
들어가는 말 3 – 냉동칸의 절망, 삼인 삼색.



유명한 토크쇼의 진행자 쟈니 카슨은 나중에 묘비명에 어떤 글을 남길 것인가에 대해 기자의 질문을 받자, 대답했다.
“잠시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 <쓸모 없지만 유쾌한 지식의 발견> 12쪽)


이쯤 해서, 왜 그 사건이 문제인지를 다시 한번 말해보자. 왜 그런 예화/이야기가 그렇게 중요한지, 냉동차에서 죽었던, 냉장고에서 죽었던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오스틴은 그의 책에서 수많은 이야기/ 간증을 털어 놓는다. 문단 하나 건너 그의 간증이 펼쳐진다. 많이 읊고 있는 간증은? 그의 가족 또는 그의 교회 성도 심지어 그의 애완견과 관련된 것인데 재미있는 것을 주차 간증이다. 그는 주차장에 들어 설 때마다, 자기를 위해서 자리를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다고 간증한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한 결과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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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나와 아내는 두 아이를 차에 태우고 휴스턴 시내 근처의 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그런데 공원 안은 온통 사람과 자동차 천지였다. 공교롭게도 봄 소풍이 한창인 때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주차 공간을 찾을 가망성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네다섯 대의 차가 주차장을 돌면서 자리가 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이 가족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할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이렇게 말했다. “아빠를 잘 보렴. 아빠가 곧 앞 열에 주차할 거야. 느낌이 오거든.
아빠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따라다닌다.
나는 호언장담을 하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앞 열을 지나갈 때 바로 앞에서 주차해 있던 차가 빠져 나갔다. 그 차가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완벽한 타이밍에 빠져 나간 덕분에 우리 차는 속도를 줄일 필요 없이 빈자리에 곧바로 주차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주차장 내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였다.
> (<긍정의 힘>, 53-54쪽)

그런 간증은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쓰인다. 자기 주장이 맞다는 것을 그런 예화/ 이야기를 간증으로 하여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지극히 주관적인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때 같이 있었던 오스틴의 부인과 아이들을 증언대에 세울까? 그럴 수 없겠지. 물론 가족의 증언이라 증언으로서의 가치는 떨어지겠지만, 그것 확인한다고 그의 가족들을 불러 증언대에 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믿을 수 밖에.
그의 말을 들을 때는, 그래서 둘 중의 하나다, 믿거나, 말거나! 그렇듯, 그의 간증이 대부분 주관적인 간증이라 아무런 증명 방법이 없는데도, 우리가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런 것을 잘 아는 그인지라, 오스틴은 전가의 보도처럼 주자창 자리, 식당의 자리를 들먹인다. 하나님의 은혜라며. 마치 요즈음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는 수많은. 천국간증처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간증들이다.

참, 잠깐 곁길로 가보자, 범람하는 천국간증. 대체 무슨 일들인지?
천국에 갔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나더러 천국을 증언하라 하셨다는 천국간증. 그것도 문제다. 어떻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지? 당사자의 꿈, 또는 입신(?) 과정을 들여다 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미 지나간 일이니, 우리가 그 주장하는 사람의 꿈 속을 들어가 볼 수도 없으니, 우리는 그저 그런가 보다, 하며 믿을 수 밖에.
있다면 방법은 단 한가지. 그렇게 천국을 다녀왔다 주장하는 사람들을 한군데 모아 대질심문(?) 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말이 다르다면, 누군가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대질심문을 해본다면, 아이들 앞에 졸다가 들킨 훈장님의 “공자님을 꿈속에서 만나고 왔느니라”는 어설픈 변명에 ‘저도 공자님을 꿈속에서 만났는데, 훈장님은 만난 적이 없다던데요” 라는 개구쟁이 학동의 말처럼, 누군가의 입에서 상황을 파악할만한 단서가 나올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 말하고 있는 오스틴이 언급한 냉동차에서 얼어 죽은 사나이 이야기는 객관적 사건이다. 아니, 객관적인 사건처럼 보인다. 오스틴이나 오스틴 가족이 아닌 제 3자가 등장한다. 또한 제법 육하원칙의 얼개를 갖춘 듯 보인다. 그래서 이 사건은 그의 말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케이스다. 생각의 힘을 강조하기 위하여 오스틴은 그 사건을 예로 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주장의 진위를 판단하는 시금석으로 그 예화를 검증해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객관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증명할 수 없다. 오스틴 서재를 압수 수색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구체적인 증빙 자료를 청구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바로 베르베르와 대질해 보는 방법이 그것이다. 베르베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그 두 사람을 대질해 본다면 분명 무언가 보일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두 가지 예화/ 이야기를 지금부터 대질하려 한다.

그래서 두 사건을 비교하여 대질하려는 찰나, 또 한 명의 증인이 등장했다.
바로 루이제 린저다. 루이제 린저는 소설, <완전한 기쁨>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 놓았다.

"옛날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신문에서였어요. 파리의 노동자 얘기였는데. 그 사람은 실수로 냉동차에 갇혔어요. 하루 뒤에 사람들이 문을 열었을 때 그 남자는 죽어 있었대요.
그의 옆에는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는데, 편지에 이렇게 쓰여 있더래요.
'냉동 장치는 가동되고 있지 않다!' 고”
"그렇다면?” 하고 내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질식사군."
"아니에요,” 그녀가 대답하였다. “공기는 충분했어요."
"그러면 왜 죽었을까?”
“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그렇다면 신경성 죽음이군."
"그렇게 말 할 수도 있지요,"하고 그녀가 대답했다
"뭐라고 했으면 좋겠소?"
"제 생각으론”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 사람은 자기 상태에 대한 절망으로 죽은 거예요."
"상상으로 엮어낸 절망 상태로군."
"그래요. 바로 그거예요."
( <완전한 기쁨> 루이제 린저, 범우사, 1986년 발행, 251쪽)

이제 냉동차에서 죽었다고 하는 사람이 무려 세 명이나 된다.
대체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거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시체가 되어 나오는 것일까?
그리고 어쩌면 마치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그들은 그런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혹 쟈니 카슨이 말한 것처럼, 다시 돌아와 말해주기라도 한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냉동고에서 일어난 사건을 자기들의 시각으로 설명하고 있을 것이니, 대질하여 본다면 누군가는 허점이 보일 것이다. 둘만 불러 놓고 들어도, 무언가 잡힐 듯 한데 이제 세 사람이나 우리 앞에 있으니 그런 허점 찾기는 더욱 쉬워졌다.

그럼 이제부터 세 가지 죽음을 비교해보자
.


 

(루이제 린저의 책을 읽고, 자료를 주신 The One 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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