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단풍나무 완상(玩賞) - 14

제 2 장. 인문학에 단풍나무를 묻다.

2. 단풍잎 서리에 하마 놀래라.

앞서 삼인성호(三人成虎)라 하여 잘 못 된 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하면  곧이듣는다는 말, 또 하늘이 무너졌다며 뛰어가는 토끼 뒤를 무작정 따라 가는 동물들이 있다는 이솝우화를 말한 바 있지만,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마가 사람 잡는 법!! 누가 그런 허황된 말을 믿을까 싶지만 단풍나무에 관해서 이런 고사성어나 우화는 이미 실제 상황이 되어 버렸다.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믿고, 하늘이 무너진다며 무작정 달려가는 토끼 뒤를 무작정 뒤따라 가는 행태는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숲에서, 궁궐에서 뿌리를 굳게 내리고 어른은 물론이고 아이들까지, 모두다 단풍나무의 그 안타까운 과거를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그렇게 뿌리 내린 그 주장은 현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한가지만 살펴보자.

<소쇄원사십팔영(瀟灑園四十八詠)>이란 오언절구가 있다. 모두 48수다. 소쇄원(瀟灑園), 담양에 있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의 경치를 노래한 것인데, 하서 김인후 (河西 金麟厚, 1510-1560)가 지었다.

전남 담양에 위치한 소쇄원(瀟灑園)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별서로 조광조에게 수학했던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혼란한 세속을 떠나 호젓한 전원에서 생활하고자 조영한 것이다. 소쇄원에서는 건축물, 석물, 수경 요소 외에도 식물도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소쇄원에 심긴 다양한 식물들과 그 중요성은 <소쇄원사십팔영(瀟灑園四十八詠)>에서 다시금 드러난다.

<소쇄원사십팔영(瀟灑園四十八詠)>은 양산보와 절친했던 하서 김인후가 소쇄원에 부쳐 지은 48수의 오언절구이다. 이 48수중 24수가 식물과 연관된 내용이다. 여기 언급된 식물들이 당시 사대부의 별서며 원림에 심기던 대표적 조경 식물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소쇄원사십팔영>중 조경식물을 주제로 한 24수에는 대나무, 매화, 은행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국화, 조릿대, 창포, 사계화, 복숭아 나무, 오동나무, 벽오동, 버드나무, 연, 순채, 배롱나무, 파초, 단풍나무, 치자나무 등 총 19종의 조경식물이 등장한다. (이선, <우리와 함께 살아온 나무와 꽃>, 327쪽)

그 중 단풍을 노래한 시가 보인다.

44영, 映壑丹楓 (골짜기에 비치는 丹楓)

秋來巖壑冷 가을 드니 산골짝은 서늘도 하고
楓葉早驚霜 단풍잎은 서리에 하마 놀래라.
寂歷搖霞彩 역력히 채색노을 흔들어 대니
婆娑照鏡光 거울에 비치어라, 파사한 그 빛

그 시에 대하여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이 해설을 해 놓았다.

<자료 20>

< 시43) 적요
(寂寥)에 대해 시44)에서는 적력(寂歷)으로 짝을 맞추었다.
당나라 악양루(岳陽樓)를 중수한 장열(張說)의 시 “빈 산이 고요하니 도심(道心)이 절로 생긴다(空山寂歷道心生)“고 한 것을 바탕으로 한 시이다.
암학(巖壑)이란 은일(隱逸)하는 사람이 거처하는 곳으로 단풍잎이 절조의 상징 서리(霜)를 만나 깜짝 놀라고 있다. 그 단풍잎은 아름다운 노을에 다시 흔들리니 적막함은 절로 사라진다.
그리고 가지가 쇠하고 약한 곳은 다시 밝은 빛(鏡光)을 만나 도심이 생겨나는 모습으로 제4구를 장식하고 있다. 이러한 승지(勝地)에서 도심(道心)이 생기는 것은 분명하다
.>

위의 시 제 2연은 <楓葉早驚霜 >이다. 이 구절을 해설자는 ‘단풍잎은 서리에 하마 놀래라.’라고 번역하고, “단풍잎이 절조의 상징 서리(霜)를 만나 깜짝 놀라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해설자는 그렇게 해석하는 그 이유를 이어서 밝히고 있다.

<단풍은 가을빛을 맑게 비춘다고 하여 강희안도 4등의 품계를 매겼다. 주로 산골짜기에 자생하며 인근 백양산, 내장산, 대둔산의 단풍은 너무도 유명하다. 그러나 가벼운 서리에도 색깔이 금방 변하는 ‘변절의 나무‘라고 하여 일반 가정집에서는 식재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한편 소쇄원의 단풍은 남도지방 산간에서 자연스럽게 찾아볼 수 있는 청단풍(靑丹楓)이다.>

단풍잎은 변절의 상징이니까 그 단풍잎이 절조의 상징인 서리를 만나서 (부끄러워서?)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시인의 손을 떠나는 순간, 시의 해석은 독자의 영역에 속한다고 흔히 말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위의 해설자는 단풍을 변절의 상징으로, 서리는 절조의 상징이라는 전제하에 이 시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단풍나무가 변절의 상징이라는 주장이 이제 문학에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해석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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