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단풍나무 완상(玩賞) - 16

제 2 장. 인문학에 단풍나무를 묻다.

4. 단풍잎은 풍설에 흩날려도

아, 이런 깜박했다. 급하게 글을 쓰다 보니 깜박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소쇄원에 단풍나무가 있다는 사실, 단풍나무의 존재 말이다. 단풍나무가 변절의 상징이니 아니니 따지기 이전에, 단풍나무가 소쇄원에 있다는 사실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야 하는데, 단풍나무의 의미 운운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사실 하나를 그냥 지나칠 뻔 했다.

<자료 7>을 상기해 볼 일이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단풍나무는 봄 눈엽 나물, 여름 두터운 그늘, 가을 단풍, 겨울 질긴 목재 그리고 달콤한 수액으로 버릴 것 없으나 동양의 군자도사상은 지조를 중히 여겨서 가을 찬 바람에 물들어가는 단풍은 변절의 상징이 되어 절의를 숭상한 지사들 집 정원에는 찾아 볼 수 없을 때가 있었다.>

궁궐에 단풍나무 부재를 주장하는 자들에 의하면, 절의를 숭상한 사대부의 정원에 단풍나무를 찾아 볼 수 없었다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사대부의 정원임이 분명한 소쇄원에서도 단풍나무는 있어서는 안 되는 나무 아닌가? 소쇄원을 만든 양산보는 어느 시대를 살았길래, 변절의 상징인 단풍나무를 버젓이 자기의 정원에 심었단 말인가, 게다가 하서 김인후는 그런 단풍나무를 (변절의 의미이든 아니든) 노래하다니? 애초에 단풍나무는 노래의 대상이기 이전에 아예 그런 곳에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소쇄원에 단풍나무가 존재하고, 노래의 대상으로까지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일까?

소쇄원에 관련된 자료 중, 식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에 대하여 의미 있는 발언이 있으니, 살펴보자.

<자료 22>

<식물은 단지 완상(玩賞) 대상물일뿐 아니라, 생리와 형태에 따라 각각 상징성을 지니므로 조영자의 심상을 빗대어 표현하는 매체가 되기도 한다. 더구나 초야에 묻힌 은자에게 삶을 함께 하는 식물은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전달자가 된다. <소쇄원사십팔영> 또한 육안으로 보이는 경관이나 사물을 단순히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된 의미를 표출한 것이다. (중략) 김인후가 <소쇄원사십팔영>을 지은 참 뜻은 완물상지(玩物喪志)가 아닌 격물치지(格物致知)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양산보가 소쇄원을 조영한 뜻과도 통한다.> (이선, <우리와 함께 살아온 나무와 꽃>, 330-331쪽)

식물은 ‘생리와 형태에 따라 각각 상징성을 지니므로 조영자의 심상을 빗대어 표현하는 매체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만일 그 당시 단풍나무가 변절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식물이었다면, 과연 양산보가 단풍나무를 그곳에 심을 수 있었을까? 그러니 단풍나무의 존재 자체가 그들의 말이 잘못이라는 증거가 된다.

만일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맞는다면, 소쇄원에 단풍나무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 그 점에 착안해서, 상소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소쇄원을 조영한 양산보(梁山甫)는 조광조의 문하가 아니던가? 역적으로 몰려 죽은 조광조와 함께 한 양산보였으니, 단풍나무를 빙자한 상소가 빗발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전하!!! 조광조의 무리인 양산보는 단풍나무를 정원에 심어, 역심을 드러내고 있으며, 후일 반역을 도모하고 있음이 확연하오니, 국문하시어 삼족을 멸하심이…….’

다행이다. 그런 기록은 없다. 우리 역사에 그런 기록이 없다는 것은 정원에 단풍나무가 있어도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니, 그들은 자기들이 말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바람에 날려 오는 말들을 두서없이 옮기고 있는 것이다. 단풍나무는 정원에 없다. 가정에서는 심지 않았다. 궁궐에 없다 등등. 그래서 그들이 하고 듣는 말들이 바로 풍설에 불과하다는 말이 백번 맞는 말이다.

풍설? 그야말로 바람에 날려오는 말을 일컫는 말이다. 도청도설(道聽塗說)이라고도 한다. 그런 풍설을 여과없이 말하고 또 옮기는 일은 조선시대를 관통한 시대정신의 상징, 공자께서 금하고 금한 일이 아닌가?

子曰 道聽而塗說 德之棄也
(자왈 도청이도설이면 덕지기야니라)
(논어, 양화)
공자 말씀하시기를,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 것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고 하셨다.

누군가에게서 들은 말을 제대로 검토해보지 않고 옮기는 것은 덕스럽지 못하다고 공자는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누군가 – 아! 이 누군가, 가 대체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 에게서 들은 말을 여과 없이 또 다른 사람에게 옮긴 결과, 이런 주장이 버젓이 우리 눈 앞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사족이다. 그럼 그때 있었던 단풍나무는 혹시 그 후 조석으로 변하는 인심의 변화 때문에 변절의 상징으로 여겨져 그곳에서 사라지거나 베어지지는 않았을까? 지금도 그때의 단풍이 있을까? 소쇄원에 그 때 존재하고 있어, 하서 김인후의 눈에 띄여 시가 된 단풍나무, 지금도 있을까?

김훈은 소쇄원에 단풍나무가 있음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정원(瀟灑園) 입구의 대숲 오솔길 옆에는 대봉대(臺鳳臺)라는 초가 정자가 있다. 거기서 바라보며, 계곡수 건너편 내원 쪽으로 제월당(霽月堂), 광풍각(光風閣), 두 건물이 복사나무, 자미나무, 단풍나무의 숲 사이에 들어 앉아 있다.” ( <풍경과 상처>, 54쪽)

관찰력이 비상한 소설가의 눈으로 보고, 기록한 글이니 착오는 없을 것이다. 물론 하서의 눈에 띄였던 바로 그 단풍나무는 아닐지 모르겠으나, 소쇄원 안에 그때도, 지금도 단풍나무는 존재했고, 존재한다는 사실, 그 사실을 어찌 부인할 수 있단 말인가?

하여, 단풍나무는 그런 풍설에 흩날려도, 지금까지 굳건히 살아있으니 대견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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