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오병이어  -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6: 30-44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마리로 만명이 넘는 사람을 먹였다는 이야기, 다 아시지요?
어린 아이가 떡 다섯덩이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바쳤다, 그래서 그것이 만명을 먹이고 남는 기적을 일으켰다, 참 좋은 이야기입니다.
이런 성경의 말씀을 읽을 때에는 주먹을 불끈 쥐게되고 어떤 소망과 희망이 가슴속에서 솟아오릅니다.
나도, 나에게도 그런 기적은 일어날거야, 그러니 내가 가진 오병이어를 드려야지, 하면서.

그런데 그런 일은 현실에서 그리 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일이 우리 인생에서 수시로 일어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슨 어려운 일을 당하면 오병이어의 기적이니 해 가면서, 은근히 내 앞에 기적, 아니 더 정확한 말로 요행수를 기다리며 사는 것을 마치 믿음이 좋은 것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지나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실수를 저지르기 않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을 다른 각도로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을 살펴보십시다. 
지금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이제 마악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때입니다.
제자들도 생기고 그리고 여러가지 능력으로 병을 낫게도 하시며 기적을 보여주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을 듣고 그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렇게 몰려온 사람들을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치료하시고 이제 집으로 돌려보내면 될 일인데 예수님은 그냥 보내질 못하시는 것입니다. 저 불쌍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겠다고 찾아왔는데 그냥 보내려니 마음이 영 언짢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많은 사람을 먹여 보내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의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30절에서부터 34절까지, 그리고 35절에서 38절까지, 마지막으로 39절부터 44절까지입니다.
첫번째 부분은 사람이 모여들고 그리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고
두번째 부분은 오병이어가 예수님 손에 오기까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대화 내용.
세번째 부분은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가지고 기적을 베풀어 사람들을 먹이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어느 부분에 더 주안점을 두고 말씀을 묵상해 왔는가 하면
세번째 부분,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시고 만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신 다음에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열두 바구니에 남겼다는 부분에 신경을 더 많이 썼습니다.
저도 그 뒷부분을 가지고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비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뿐만 아니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던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이 기적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우리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또 다시 이루어질 반복적인 일로 생각했고,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혹시 우리들도 그런 사람들처럼, 그런 기적에만 혹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아닌지?
그러다 보니, 정작 앞부분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두번째 단락에세 예수님이 말씀을 시작하시는 것에 주의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신 후에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신 부분을 강조하기 보다는
그런 능력이 없는 우리는 어디에 관심을 두어야 하느냐?
바로 37절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에 오히려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37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자, 이게 무슨 뜻일까요? 그 뜻을 알기 위해선 그 앞뒤를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그 말이 나오게 되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한번 살펴보십시다.
6장 35절,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

제자들이 말합니다.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무리를 어디로 보낸다구요? 촌과 마을로,,,,,
그 다음에 그사람들로 무엇을 하게 한다구요? 무엇을 사먹게 한다는 것, 즉 식사를 해결하도록 한다는 것. 그렇다면, 이때 제자들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모여든 사람들을 해산시킨 다음에, 어디 어디로 가서 각자 음식들을 사 먹으시요, 라고 말한 다음 각자 가게 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문제는 누구의 소관사항입니까?
제자들의 소관입니까, 아니면 모여든 사람들 각자의 문제입니까?

제자들이 그렇게 말한 속뜻은 이것입니다.
‘지금 해가 저물어 끼니 때가 되었는데, 그 사람들을 먹고 마시게 하는 일은 우리 일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일입니다. 그러니 그사람들을 보내어 각자 사먹게 하자구요.’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바로 37절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그 말 뜻은, ‘그 문제는 저 사람들의 소관사항이 아니라 너희들이 책임질 문제다, 너희들이 그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은 이 말씀 한마디로 제자들의 말에 뚜렸하게 반대하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먹는 것은 그 사람들 각자의 문제가 아니라, 너희들의 문제다.

제자들은 모인 사람들을 보내자, 음식을 각자 사먹게 하자면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과 자기들 간에 선을 그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사람들이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그러니 그사람들이 먹던 말던 굶던 말던 우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
이런 제자들의 말에 예수님은 단연코 반대하는 것입니다.
‘아니다, 그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문제가 어찌 그들의 문제냐? 바로 우리들의 문제이니까 너희들이 책임을 져라.’

왜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실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 34절의 말씀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그 목자없는 양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시고>,
불쌍하게 여기셨는데, 목자없는 양같이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이 비유가 이해하기 힘듭니다.
물론,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은 이스라엘의 양에 대하여 배우기 때문에 그래도 조금은 이해가 되지만 속속들이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저 양이 목자가 없으면, 보살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조금 힘들겠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양과 목자와의 관계는 실제적으로 그런 차원을 넘어섭니다.
목자가 없는 양은 목숨이 붙어있느냐 죽느냐의 차원입니다. 목자가 없는 양은 늑대와 사자의 밥이 되는 것이 시간문제이기에, 잘 먹고 못먹고의 차원이 아니라 생과 사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모여든 사람들를 그 정도로 불쌓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 반면 제자들은 그들의 배고픔에 대하여 강건너 불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그저 우리와 다른 다른 사람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아니라 그들입니다 라고 생각하고, 그들로 하여금 각자 사먹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을 다른 타인으로만 보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게 아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그러니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바로 머리를 굴려 계산을 해봅니다. 그 사람들을 다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듭니다.
화폐 단위를 계산해 보자면 200 데나리온이라 함은 영어 성경의 번역에 의하면 성인 장정이 받는 급료로 8개월분이라고 해 놓았으니 얼마나 많은 금액인줄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제자들에게 그만한 돈이 있을리 없지요…

자, 여기까지가 이 사건의 전반부입니다.
그러니 연속극을 만든다면, 1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문 모를 명령을 내리시고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예수님의 명령을 제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이제 후반부, 제 2부입니다.
후반부로 극은 이어지지만,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그런  -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제자들이 모인 사람들을 모두 먹이려면 200데나리온이 든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말은 실행하기 불가능한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앞뒤 상황을 다 아시는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에게 불합리한 것처럼 보이는 명령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기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시각이 바꾸어지기를 소망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바꾸어지기를 소망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을 목자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너희들도 한번 그렇게 생각을 해 보아라,
그러면 그들이 바로 너희 자신으로 생각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을 보내 각자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라는 말이 나올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이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38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물어보십니다.
여기 이 말 <너희에게>에 밑줄을 그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떡이 얼마나 있느냐> 물어보신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떡이 얼마나 있느냐> 물어보셨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자들이 그때까지 모여든 사람들과 자기들을 철저하게 구분했던 것을 기억하십시요. 예수님이 묻기를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의 <너희>라는 대상은 분명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에게 묻기를 제자들 너희들이 떡이 몇 개나 있느냐, 물었는데 <알아본 다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자, 여기 제자들이 가져온 떡과 물고기는 누구의 것입니까?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에는 별 말이 없지만, 요한복음에는 그 떡과 물고기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요 6: 8-9)

모여든 사람 중에 한 어린아이가 가져온 물고기와 떡입니다.
저는 이 대목<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를 읽으면서 제자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 그 사람들은 그사람들이고 우리들은 우리들이다, 라는 생각이 허물어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이미 뻔히 알고 있었지요, 자기들 누구도 음식을 준비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또한 예수님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것을 뻔히 아시는 예수님이 묻기를,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하셨으니 제자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이 없으니까 음식이 있나 없나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사람들’에게로 가야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우리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 사람들에게로 가서 음식이 있나 없나 알아 보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로 가면서, 그리고, 그들에게 가서 먹을 것을 찾아 들고 오는 순간, 그 제자들은 그들이 바로 자기들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을 손에 들고 와서 예수님에게 드리면서 하는 말, 우리 개역성경은 이 부분을 아주 실감나게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있더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던데요. ,
 ‘우리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들’로부터 얻은 것이기에, 겸연쩍음의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이 대답을 하는 제자들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우리는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우리 앞에 있는 사람들을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생각해서 그 사람들을 보내버릴려고 했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셨기에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은 없고, 또 우리가 가지고 온 음식도 없으니 부득히 저사람들에게로 가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결국 이 물고기 두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것이 되었다. >

결국, 제자들은 여기 이 부분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의미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우리더러, 그사람들과 우리를 구분짓지 말라 하신다,
그 사람들의 문제가 곧 우리의 문제요, 따라서 그들이 배고프면 내가 배고프고…..’
따라서 그들이 지금 배고프니 무언가 해서 그들을 먹이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이다, 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 깨달음이 있고 나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예수님은 그 오병이어를 앞에 두고, 기도하고 나누어 준 결과,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제자들의 깨달음이 오병이어라는 기적을 만들었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본문인 오병이어의 기적사건에서
우리가 오병이어라는 기적에만 시선을 집중시킨 결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너무 기적사건에만 집착한 나머지 정작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소홀히 하지는 않는가, 아니, 아예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건에서 시선을 돌려 우리가 할 일을 찾자는 것이지요.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입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을 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예수님의 제자를 자처하는 우리들에게 역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 말씀은 결국 무엇입니까?
모여든 사람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라, 불쌍히 여겨라, 그리고 ‘너와 그들을 구분하는 담을 허물어 버리고 내가 그들을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족이지만, 그래서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복지 논쟁에서 복지를 마치 시혜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맞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자녀 삼으시고
이세상에서 살면서 예수님의 제자 된 삶을 살아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목자없는 양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도 절실히 느껴져야 하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팔려있던 우리의 눈길을 돌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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