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그래서 우린, 사랑을 할 수 있다 /고전 13:1 -7

 

 

(I)

 

고린도 전서 13장은 <사랑장>이라는 애칭으로 불려지는 구절로서, 많은 분들이 영감있는 해석을 해 놓았기에, 굳이 해석을 다시 해보는 일은 어찌 보면 쓸데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해석에 있어서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오해는 예컨대 4절 이하의 구절을 이렇게 읽어본 기억들로 인해서입니다. 사랑이란 말에 자기 이름을 대입하여 읽어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나, 오세용은 오래 참습니다.”

“오세용은 친절합니다.”

그렇게 읽으면서,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난, 오래 참겠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해야겠다.”

 

그런데 그렇게 읽어가면서, 인내심을 기르고 친절하게 대하자는 등 기독교인으로서의 덕목을 기르자는 다짐을 하는 것은 좋은데, 한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다짐하는 주체인 ‘나’와 오래 참는 것, 혹은 친절한 것, 그 사이에 들어가 있어야 할 것이 하나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사라져 버린 것이 무엇일까요? ‘나’로 하여금 오래 참도록 하는, ‘나’를 추동(推動)하는 기능을 하는 ‘사랑’이라는 존재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오래 참고, 친절하고 그렇다 해서, ‘사랑’이란 말 대신에 자기를 넣어버리면 사랑은 사라져 버리고, 그 대신에 자기가 자기의 노력으로 오래 참는 것처럼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결단을 하고 힘을 다하여 오래 참고 친절해 보자, 고 다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분명 그게 아닙니다.

내가 오래 참게 되고, 친절한 것이 무엇 때문이냐? 바로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오세용은 사랑하기 때문에 오래 참습니다> 라는 말이 되어야 본문의 뜻에 맞는 해석일 것인데, 그만 사랑이란 말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오래 참는 나>만 남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합니다. 본문은 사랑이란 것이 무엇이냐, 또는 사랑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 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 만드는가, 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13장 전체가 사랑을 말하고 있지만, 1절에서부터 3절까지에서 사랑을 설명하는 방법과 와 4절부터의 구절에서 사랑을 설명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1절로부터 3절까지 살펴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사랑이 없으면>이란 말이 1,2,3절 각 절에 모두다 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사랑이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사랑이 중요한 만큼, 결국 사랑이 없으면 우리가 그 무엇을 한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말을 이어가다가, 4절부터는 분위기가 확 달라집니다. 1절로부터 3절까지는 ‘나’라는 사람과 사랑과의 관계를 말했는데 4절로부터는 ‘나’라는 사람은 온데간데 없고 사랑이 주체가 되어 단독으로 등장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그래서 4절부터 7절의 구절을 다시 읽어보자면, 마치 사랑 그 자체의 성격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사랑의 성격이 어떻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 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바로 1절로부터 3절까지의 주인공인 ‘나’에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이 없으면 무엇을 한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거기에 꼭 필요한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오래 참고, 친절하고 하는 등등이란 말이지요.

 

따라서 이 구절을 아까 서두에 말씀 드린 것처럼, ‘오세용은 오래 참습니다’가 아니라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오래 참지 않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친절하지 않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는 식으로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이 어떻다고, 사랑에 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느냐, 우리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에 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나를 어떻게 만드느냐? 사랑이 나를 참게 만든다, 사랑이 나를 친절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비단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실생활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을 해 봐서(?) 아는데, 그래서 완벽히 경험한 바에 의하면 사랑을 할 때에, 내 마음속에 있는 불타는 사랑의 감정이 나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 끌고 가지 않습니까? 나를 몰라줘도 오래 참고,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친절하게 하고, 나보다는 상대방을 더 배려하고, 즉 나의 유익을 구치 않고. 원래 내가 그런 성격이 아니라, 불 같은 성격이고 나만 아는 이기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게 되면 사랑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가지 않습니까?

 

 본문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내가 친절하거나, 오래 참는 성격이어서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래 참고, 친절하게 되자고 다짐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사랑을 하게 되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의 그 무엇인가가 나를 움직여 나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의 힘이 그렇게 크다, 사랑을 하게 되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어떤 사랑을 말하고 있는가? 그런 사랑만을 말하려고 하는데 아닙니다. 그런 사랑은 아까 말씀드렸듯이 일반적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일반적인 사랑만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라는 사랑의 기술, 방법을 말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냐? 사람에게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8절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떨어진다’는 말이 이해가 어려우니, 다른 번역으로 살펴보자면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표준새번역)입니다.

 

없어지지 않는 사랑이니까, 그 사랑은 우리 인간에게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다른 데서 비롯되는 사랑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원천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사람의 가슴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그 기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강권’이라는 말은 강하게 권한다, 내키지 아니한 것을 억지로 권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 말은 마치 내가 싫은데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하고, 아니면 말고,라는 뉴앙스가 풍깁니다만, 실제 그 말은 그런 뜻은 아닙니다.

표준새번역은 이 말을 번역하기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휘어 잡혔으니, 딴 소리 못하는 것입니다. 딴 마음을 먹지 못하며 꼼짝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랑은 우리를 어느 쪽으로 마구 몰고 가는 것입니다 나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사랑이 나를 몰고 어떤 쪽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 구절을 해석해야 합니다.

 

(II)

 

본문 중에서 4절 이하, 사랑이 우리를 어떤 모습으로 움직여가는 것, 모두를 살펴보자면 시간이 많이 소요될 터이니까, 그 중 한가지만 살펴볼까요. 4절에서 한가지만, 사랑은 오래참고, 이것만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어릴 적에 이런 말놀이 많이 했었습니다. 반대말 말하기. ‘산토끼’의 반대말을 이어가기 하는 것, 다들 해보셨지요.. 여기서 한번 해볼까요?

산토끼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산토끼/ 죽은 토끼, 산토끼/집토끼, 산토끼/바다 토끼.. 또, . 산토끼/ 알칼리 토끼, 또 뭐가 있지요? 들 토끼, 등등

 

그럼 사랑에 대하여도 한번 같은 방법으로 해볼까요? 사랑의 반대말을 이어가기 해 봅시다. 무엇 무엇이 있을까요?

미움..사랑과 미움, 증오 드라마 제목인 ‘사랑과 전쟁’, 사랑과 이혼. 그러나, 사람들은 말하기를 사랑의 반대말로 가장 알맞은 말은 ‘무관심’이라고 합니다. 무관심이란 말, 관심이나 흥미가 없다. 강 건너 불구경, 남의 굿 보듯 하는 무관심….

사랑이라는 말의 진정한 반대말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무관심입니다.

“네가 무엇을 하든 나는 신경쓰지 않겠어, 관심없어!!”

 

그렇다면 사랑의 비슷한 말, 아니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은 당연히 ‘관심’이 되겠습니다. 사랑이란 것은 관심이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의 단계 중에서 관심의 단계, 바로 그게 사랑하기에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관심은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관심,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채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요..

 

먼저 이런 관심은 어떤지 살펴봅시다. 얼마 전 신문기사를 한꼭지 읽었습니다.

[서울신문] 2011년 05월 24일(화) 오전 03:40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시어머니가 저를 싫어해서 일부러 괴롭힌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15년이나 걸렸네요.”

행정안전부가 23일 ‘결혼이민자 생활 체험 수기 공모전’ 결과를 발표한 가운데 최우수상을 받은 왕숙혜(43)씨는 “엄하지만 정이 많은 시어머니 덕분에 모든 것이 낯선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중국 쓰촨성 출신인 왕씨는 1995년 한국인 남편과 결혼하면서 친정 가족들을 중국에 두고 홀로 한국 땅을 찾았고, 지금은 한국으로 귀화해 어엿한 ‘한국 아줌마’로 살아가고 있다. 외동딸로 태어나 집안일 한번 해 보지 않고 귀하게 자랐다는 왕씨는 생활 수기 ‘나의 한국 시어머니’를 통해 좌충우돌 한국 적응기와 시어머니를 통해 느낀 가족애 등을 소개했다.

왕씨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언어가 아닌 생활 문화였다.”면서 “중국에서는 집안일도 모두 남자들 몫인데 한국에 오니 시어머니께서 하루 세끼 식사며 빨래, 청소 등 모든 집안일을 나에게 시켜 정말 괴로웠다.”고 말했다.

왕씨는 시어머니가 자신을 미워해서 괴롭히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시어머니에 대한 미움도 커져 갔다. “한국이 싫다. 중국으로 돌아가겠다.”며 크게 대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왕씨는 “한국 생활 10년 차에 접어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시어머니의 잔소리와 간섭이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엄한 시어머니가 계셨기에 한국말과 한국 문화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면서 “고향의 부모님이 너무 그리웠지만 말도 못 하고 있었는데 시어머니께서 중국행 배표와 용돈 100만원을 쥐여 주시며 ‘중국에 가서 재미있게 놀고 친정댁에 안부 전해 드려라’라고 했을 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덧붙였다.

시어머니 덕분에 완전한 한국 사람이 돼 지금은 지역 다문화센터에서 중국어 통•번역 업무와 중국어 과외 활동까지 하고 있는 왕씨는 “15년 전 처음으로 잡았던 시어머니의 쪼글쪼글했지만 따뜻했던 손길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듯 사랑을 알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잔소리가 나왔다는 것, 사랑의 표현이 바로 잔소리, 관심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몇 년이 걸렸다구요? 중국사람은 만만디? 그래서, 15년이 걸렸을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말로는 사랑 사랑 하지만, 그래서 사랑이 오고 가고 하는 것들을 금방 알아차릴 것 같지만, 그것은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이지요. 드라마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 부딪혀도 두 남녀 사이에서 전기가 번쩍 통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혹시 배경음악이 있어서 그런가요?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는 사랑, 그것은 깨닫는 일조차 어렵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기도 어렵거니와 사랑을 받는 일조차 어렵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랑을 이야기함에 있어,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받는 것조차 서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 조차 잘 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경험을 살려 생각해 보십시다. 가장 쉬운 예로, 부모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가? 그렇다면 부모 입장에서 본다면, 자식에 대한 사랑은 바꿔 말하면 어떤 것입니까? 오래 참는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사랑의 본질은 다름이 아니라,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랑의 상대방인 자식이 내가 지금 잔소리 하는 이것이, 내가 그 애를 사랑해서 그런다는 것을 알기까지 시간이 걸리니, 결국 부모가 오래 참고 사랑하자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말은 무슨 뜻이 있는가?

나의 편에서 생각하면, 사랑을 지치지 않고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게 됩니다. 포기하지 말고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한 것보다 못한 것이지요…..

 

그 말이 맞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본문 1절에서 3절까지의 '사랑이 없으면'이란 말 대신에 <오래 참고>라는 말을 대입하여 읽어봅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오래 참지 않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오래 참지 않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오래 참지 않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을 하다가 그만 두면, 하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 오래 참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같은 의미이지요?

그러나 우리 사람의 힘으로는 그런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하다가 내 사랑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원망하며 그칩니다. 그런데 아까 뭐라 말씀드렸던가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았다, 고 하셨으니 다행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요, 그 사랑을 맛본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휘어잡힌 바 된 우리는 그래서 오래 참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랑을 못해, 하는 말은 그래서 우리 입에서 나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해야 하는 당위성도 있거니와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도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사랑, 오래 참고, 친절하고, 덮어주는 사랑...

그런 모두를 포괄하는 사랑을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는 것을 하라면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우리가 다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모두다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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