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산 아래로 내려가자 / 눅 9:37-4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눅 9:33)

 

베드로와 요한을 데리고 예수님은 기도하시려 산으로 올라가시는데, 거기에서 그들은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는데 그것을 본 제자들이 너무 좋은 나머지 거기 그 산에 계속해서 머물자고 간청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하는 것입니다. 밑에 내려가 보았자 누구 하나 반겨주는 사람은 없고, 모두다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니까 그런 걱정 근심있는 곳으로 내려가느니 차라리 여기 산에 계속 머무르자고 간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기자는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딱 잘라 표현합니다.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눅 9:33)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러한 간청- 여기 초막 셋을 짓자 - 에 대하여 뭐라 말씀하셨을까요? 성경의 기록에 예수님은 직접적으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오늘 본문 말씀 37절에 보면,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날밤을 지나면서 제자들에게 내려가야 할 필요성을 말해 주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 둘은 산을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산을 내려가야 할 필요성이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를 이곳에 보낸 이유와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땅의 것들은 잊어버리고 하늘만 바라보고 살라고 하지 않으시고 땅의 일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하늘에 있지 않고 땅에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만드신 이 땅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하나님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산 밑으로 내려가자고 하셨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들이 내려와 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입니까?

바로 38절부터 읽어보면, 그들이 맞닥뜨리는 세상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38절, "한 사람이 소리질러" 아픈 자들이 있습니다.

39절, "몹시 상하게 하고" 아픈 사람들은 어떤 상태인가? 몸이 상할 정도로 심하게 아픕니다.

40절,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이런 아픈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고치지 못합니다.

이게 바로 세상의 모습입니다. 고통과 어려움이 가득한 곳, 그러나 그런 고통의 장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 그런데 이런 모습은 그저 외양적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속의 모습은 더 심합니다. 바로 예수 없는 세상의 혼탁함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고통과 어려움이 가득 찬 세상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41절,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패역한 세대란 말은 사악하고 심술궂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 들어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라는 말씀은 심한 질책이며 꾸중입니다.

 

그럼 그 꾸중은 누구에게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이 하신 꾸중을 듣고 있는 대상은 네 종류로 구분이 됩니다. 마가복음 9장 14절에는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산 밑에는 네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냥 구경꾼들 또한 당사자인 아버지와 아이.

 

첫째 그 꾸중을 듣는 사람은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에게 해당되는 꾸중은 믿음이 없다는 꾸중입니다. 자기들에게 부여된 임무를 다 하지 못한 데 대한 꾸중입니다. 그 아픈 아이가 왔을 때에 돌보아 주지 못한 그 원인이 바로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에서는, 나중에 제자들이 묻습니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8-29)  믿음이 부족해서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등장인물들은 누구 입니까?

서기관들과 구경꾼들. 그러니 패역한 세대라고 꾸중을 받은 사람들은 한 아이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과 다른 입장의 사람들을 경멸하는 기회로 삼고 있는 서기관들과 한 아이의 고통에 대해 단순한 호기심을 발동시켜 이적 자체를 즐기려는 무리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아무런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패역한 무리들은 아이와 아버지의 고통을 더욱 극대화 시키는 역할 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산 밑에 있으면서 소리만 요란했지, 문제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과 또 그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큰 구경거리가 생긴 것처럼 모여 이말 저말 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것 같지 않습니까?

 

자, 그러면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모두 분명히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만만치 않은 세상입니다. 가까이 둘러보면 우리 주변에 몸이 아픈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시선을 조금만 더 다른 데로 돌려보면…비단 아픈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 다른 여러가지 이유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그로 인해 벌어지는 죽음,기아, 사고 또 자연재해, 지진, 홍수, 요새는 또 쓰나미라는 말도 자주 들려오지요? 그렇게 다양한 문제들이 존재하는 게 이 세상인데, 과연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를 여러가지로 말할 것이 아니라, 본문에 등장하는 아픈 아이 한사람의 문제로 축소하여 그 해결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여기 한 사람의 아픈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 아이(마 17: 18, 막 9:20) 귀신들려 고통을 당한다고 나와 있지만, 현대에서는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분도 계시니 그냥 심하게 앓고 있는 아이라고만 해 둡시다.

 

그 아픈 아이를 둘러 싸고 많은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할 때에, 그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앓고 있는 아이와 그 아버지 그리고 제자들 그리고 서기관들과 그리고 그것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 중에 우리는 어떤 사람에 해당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냥 생각할 게 아니라, 구체적인 기준을 드릴테니까…..

애타는 정도로 판단해 보자면, 어떤 사람에 해당하시는지요?

참고가 되도록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경우를 말씀드릴 터이니, 어떤 사람에 해당되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십시다.

 

그 중에 가장 많이 애가 타는 사람은 아이의 아버지일 것입니다. 지금도 어린 아이인데, 어릴 때부터 아팠다고 한 것을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아팠던 것이 분명하니 그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저도 아이를 키워보아서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데 아이가 아플 때에 얼마나 아버지의 마음이 절절하게 아프고 괴롭습니까?

 

그 다음으로 애탔을 사람은 바로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불쌍한 사람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배운 제자들은 그래서 나름대로 그 아이를 고치려고 애를 쓰고, 수고를 하였습니다. 그래도 고쳐지지 않자 얼마나 애를 탔겠습니까? 40절에 그 아이의 아버지가 말합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 그런 말을 예수님 앞에서 들은 제자들은 한편으로는 민망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워 했을 것입니다.

 

자, 그 다음으로 애가 탔을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거기 왔던, 우연히 그런 장면을 보게 되는 둘러선 사람들은 아무래도 애 타는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경꾼들은 그런대로 인지상정 정도로 애를 태웠을 것이지만, 예수님을 책 잡으러 했던 서기관들은 오히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이 재미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다니더니 고작 그런 병자도 못고치느냐, 하는 비웃음으로 그 장면을 바라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상 그 산밑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는데 우리 모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하나에 해당이 되지요. 아픈 아이 혹은 그 아버지, 또는 예수님의 제자.

 

다행스럽게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는 그냥 구경꾼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은 없는 줄 압니다. 자, 우리 모두 그런 아픈 아이를 바라보면서, 애타는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린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냥 계속해서 구경만 하고 있으면 될까요? 그런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이 모두 다 기다리는 분이 있습니다. 등장 인물들이 각기 입장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집니다. 산 밑에서 아픈 아이를 두고 몇가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 모두다 예수님의 등장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와 그 아버지는 물론 제자들도 예수님을 애타게 기다렸고, 구경꾼들도 또한 서기관들도 기다리는 속마음은 달랐지만 기다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나 아픈 아이나 아버지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오직 하나의 희망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산밑의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기만을 학수고대하는데 그 시간 산 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으며 그리고 제자들이 뭐라 말했습니까?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베드로는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말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기자가 베드로의 말을 평가하기를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고 한 그 말이 이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산밑으로 내려오셨고 예수님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셔서 그 아이를 만나게 되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눅9: 38)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그 아이의 아버지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우소서.’라고 간청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는 예수님의 역사로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팠던, 고생하던 그 병에서 놓임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에게 희망을 거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게 희망을 걸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위의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땅위의 일에 신경을 쓰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처리해 달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땅위의 일들이 안타깝게도,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래서 해결책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들은 그런 차원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한가지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오심을 바라며 예수님의 역사를 고대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위에 있는 고난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역사해 주기기를 마치 그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기다리듯이 예수께 매달려 내 아이를 돌보아 달라고 간청하는 심정을 우리는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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