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문, 그 두번째 - 네 앞의 문을 열어라 / 계시록 3:20

 

지난 번에는 베드로 사도가 옥에 갇혔을 때에 옥문이 열린 이야기를 주제로 묵상을 했는데, 우연한 일인지 모르겠으나 이번에도 문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문에 관한 이야기는 지난 주 그리고 이번에만 한 것이 아니라, 그전에 나사로의 무덤 문을 열었던 이야기도 했으니, 문에 관련된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성경에서 문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가 평소에 우리들 사람들이 문들을 많이 사용하니까 자연히 성경에도, 성경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니까, 그렇게 언급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디 우리들 문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지 한번 세어볼까요?

아침에 일어나서 안방 문을 열고 나오고 화장실 문을 열고 닫고 또 출근하면서 현관문을 열고 닫고 ….등등 하루에 수 십번을 문을 통과하면서 생활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이 문이란 곳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아무래도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곳도 문입니다.  환우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가끔씩 문을 여닫고 하다가 다치신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특히 아이들이 그러한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번에 한 아이가 그런 케이스로 입원했었는데, 제가 그 아이에게 조심해서 열고 닫지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이 그랬느냐고, 다음부터는 조심하라고 했더니, 예, 다음부터는 더욱더 조심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사람은 그 아이가 아니라, 옆에 있던 그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가 잘 못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 때문에 말썽이 생기는 것은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문을 열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비단 사람들 사는 곳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도 등장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지금 예수님은 문 밖에 서서 그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어야 하는데, 이 때 조심해서 열어야 하겠지요? 잘못 열어서 다치면 안되니까….말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문 밖에 서서 그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데 또한 두드리고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라는 말로 미루어 보아 무언가 말씀도 하고 계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면, 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예수님은 집주인이 문을 열어주어 집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심정을 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먼저 여기 본문에서 말하는 “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어떤 지리적인 공간이 있다면 반드시 그곳에는 들고 나는 곳, 즉 출입하는 곳이 있게 됩니다. 그 출입하는 자리에 고정적으로 장치해 놓은 물리적인 장비가 바로 문입니다. 그래서 그 문이 닫혀있거니 잠겨있으면 그 곳에 들어갈 수가 없고 또 반대로 안에 들어가 있다면 이번에는 거꾸로 그 문이 열리지 않으면 밖으로 나올 수 없게 하는 장치가 바로 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이 서 계신 곳에서 문을 통과하면 어떤 곳이 나타나는데, 문보다도 실상은 그 곳이 어떤 곳인가가 중요합니다. 문은 다만 그곳에 들어가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는 그곳이 어디인가 하면,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바로 앞 절에서 회개하고 열심을 내라고 권면하였기 때문에, 본문의 '문'은 현재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마음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우리들도 그런 말 많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통 마음을 받아 주지 않는다거나, 또는 그 사람 말을 영 받아들이지 않을 때, 얘야, 제발 마음의 문을 열고 내 말을, 내 마음을 받아 들여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일이 몇가지 있는데

 

첫 째로는 우리가 문을 잠가 놓고 방안에 있으면 밖에 누가 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밖에 누가 와서 불러도 듣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세계에 푸욱 빠져, 방안에 있으면 밖에 아무리 좋은 구경거리가 있다 할지라도 전혀 무관심한 것처럼, 방안에만 있다 보면 밖의 인기척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 있습니다.

 

또한 두 째로는 밖에 와서 부르는 그 음성을 잘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우리들 집 문을 두드리는 다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밖에 와서 두드리는 사람 중에 여호와의 증인들도 있지요..또한 몰몬교도 있지요..

 

우리가 이런 것들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분별하지 못해서 고생하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우리 옛날 이야기 중에 떡 팔러 간 어머니를 기다리던 오누이 이야기 아시지요?

호랑이가 고개를 지키고 있다가 떡을 팔고 돌아오는 어머니를 만나 말합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그런 호랑이에게 아이들 주려고 남겨오던 떡을 다 주고 나서 결국 어머니는 잡혀 먹힙니다. 그리고 그 호랑이가 이제 어머니의 옷을 입고 아이들 집으로 옵니다. 나다….문 열어라…. 어머니 같기도 한데 ..목소리가 이상해요.. 그 호랑이는 참기름을 먹고 어머니 목소리를 흉내 냅니다.

그래서 결국 나중에는 누이동생이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까? 뭐 그런 이야기, 다 아시는 것인데 밖에서 누가 부르는가 아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음성을 분명히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분별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면 차라리 누가 오더라도 문을 꽁꽁 잠그고 열어주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문을 연다는 말, 그래서 예수님이 들어와 함께 먹고 오셔서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신다는 말, 물론 기본적인 해석은 앞으로 말씀드리겠지만, 한걸음 더 나가 본다면 우리 안으로 안으로만 박혀 있어서 나 자신만 알고 있던 나에게, 내가 문을 열면 주님이 들어오셔서 주님으로 대표되는 주님의 생각, 주님의 세계관이 주님을 따라 같이 들어 오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문을 열 때에, 문 밖의 광활한 세상이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은 아닐까, 덧붙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즉, 문을 연다는 것은 나를 연다는 것입니다. 나만 알던, 나의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던 폭 좁은 나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을 열지 않으면 안되는 당위성의 문제라고 할까요? 문을 열어야 하는데, 문제는 어느 목소리에 문을 열어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내 음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열어야 하는데, 누구의 음성을 구분하고, 안심하고 열어 줄 수 있는가?

자, 그렇게 우리가 우리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더불어 먹는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분명 비유가 분명한데, 왜 하필이면, 먹는다는 말로 비유하였을까요?

더불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과 우리가 이제 영적인, 사랑의 교제를 하는 관계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더불어 그 어떤 것, 무엇을 한다, 그래서 영적 교제를 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더불어 무엇을 하는가?

먹고 마신다.

그럼 먹고 마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에 대해서는 예전에 다른 곳에서 정리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마음이 기쁜 경우에도 단계가 있다. 기쁘다는 감정을 느끼는 데도 모두 다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데, 예컨대 어떤 축하할 일이 생긴 사람에게 축하해 주러 간 사람이 말을 합니다.

“축하 드립니다. 기쁘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그 인사를 받는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봅시다. 약간 이상하지요.

아니, 이 사람이 나에게 뭐 기분 나뿐 일이라도 있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축하받는 경우에는 축하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기뻐하고 축하를 받는 기분이 납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냥 말로만 해서는 별로입니다. 말에 덧붙여 무언가를 더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덧붙여야 할 것인가? 그것은 기쁨의 단계별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본인 속으로만 기쁜 정도입니다. 콧노래가 나오고 즐겁기는 한데 그냥 혼자서도 견딜만한 정도, 물론 견딘다는 말이 조금 어색하지만, 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축하해주는데 별 다른 행동이 필요 없습니다. 본인이 혼자 즐거워하는 단계이니까요.

 

두 번째 단계는 그것이 겉으로 표현이 되는 단계입니다. 이 경우는 우리나라 말 ‘입이 귀에 걸린다’ 라는 표현이 적당한 단계로 그래서 다른 사람이 척 보면 그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면 족합니다.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면 그냥 줄줄줄 자기가 어때서 기분이 좋고 한 이야기를 해 버리는 단계입니다.

 

그 다음 기쁨의 가장 높은 단계는 그 기쁨을 자기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는 단계입니다. 그런 단계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친구를 불러 모아 밥을 같이 먹거나 잔치를 벌입니다. 그렇게 잔치를 벌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단계가 되면 자연스럽게 그 잔치자리에 참여한 다른 사람 모두가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그 단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그러한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그저 심드렁한 관계가 아니라, 기쁨에 겨워 잔치를 벌이는 그러한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단계에까지 이르도록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결론은 예수님이 우리 마음 밖에 오셔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데, 우리가 그 음성을 분별하여 듣고 문을 열어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모시면 우리 마음이 예수님과 기쁨의 영적 교제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모셔 들여야 하는 실제적인 이유인 것입니다. .

 

예수님이 우리 앞에 오셔서 우리들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이번 한해는 예수님에게 문을 열어 드리고, 그리하여 예수님이 우리 마음이 들어 오셔서 우리 같이 먹고 마시는 그러한 즐거움, 기쁨의 단계를 같이 경험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지난 번에 베드로 사도가 옥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게 된 사건을 통해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모든 어려움과 걱정 근심 등 그러한 곳에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로 벗어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 베드로의 사건에서도 문이 열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듯이, 이번에도 역시 문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문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 오실 수 있습니다. 그 문이 열려야 주님이 들어 오셔서 우리와 같이 거하시며 먹고 마시는 기쁨의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문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굳은 각오를 가지고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문을 열어 주시며, 또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시고 강조하시기 위해, 우리 도처에 문을 마련해 놓으시고 하루에도 몇번씩 그 문을 열고 닫게 하셨습니다.

 

서두에서 문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는지 한번 세어볼까, 말씀드렸는데, 그러한 문을 열고 닫고 할 때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주님의 음성에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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