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문, 그 네번째 - 두드리는 문을 열어주시는, 좋은 하나님 / 마 7:7- 11

 

오늘 주제 역시 문입니다. 문을 두드리라….

7절을 읽어보면, 구하라, 즉 구하다 또 찾아라, 즉 찾다는 두 낱말이 등장합니다. 두 낱말은 서로 관련이 있는 말일까요? 아닐까요? 두 낱말의 의미가 비슷한 말일까요?

 

우리나라 말에서 '구하다' 라는 말은 뜻이 두가지인데, 첫번째는 필요한 것을 찾다. 또는 그렇게 하여 얻다는 뜻이고, 두번째는 상대편이 어떻게 하여 주기를 청하다,라는 뜻이 있는데, 여기 첫번째에서  '필요한 것을 찾다'라는 의미가 등장하니, 7절 본문에 나오는 '찾다' 라는 말과 '구하다'라는 말은 비슷한 말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두 단어는 예컨대, 이렇게 쓰입니다.

“네가 쓸만한 마땅한 물건이 있는지 어디든지 가서 한번 구해봐라

“네가 쓸만한 마땅한 물건이 있는지 어디든지 가서 한번 찾아봐라

두 문장의 뜻이 같지요? 그러니 두 단어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 맞습니다.

 

그러면 '찾다', '구하다', 라는 두 낱말이 그 다음에 나오는 '두드리다' 라는 말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두드리다' 라는 말은 "소리가 나도록 잇따라 치거나 때리다"라는 의미이니까 앞에 말한 '구하다', '찾다'라는 두 낱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성경을 너무 열심히 읽어서, 이제 그 세가지 단어가 저절로 연결이 되고 이해가 되는데, 실상은 앞의 '구하다'와 '찾다'라는 두 단어와 뒤의 단어 ‘두드리다’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언어 습관을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우리 아이가 무엇을 잃어 버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래서 아빠가 말합니다.

“잘 찾아봐라, 어딘가에 있겠지” 보통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을지? “잘 두드려봐라, 어딘가 문이 열리겠지”

잘 두드려보라는 말을 잘 찾아보라는 말로 알아듣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지요, 따라서 구하다, 찾다와 문을 두드리다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예수님은 우리의 언어 습관과는 다르게, 뜻이 다른 단어를 조합하여 말씀함으로서 무언가 의미 있는 말씀을 건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가요?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십시다. 추상적이라는 말과 구체적이라는 말, 그 두 단어의 차이를 아시지요. 간단히 설명드리자면 추상적인 말은 어떤 사물이 직접 경험하거나 지각할 수 있는 일정한 형태와 성질을 갖추고 있지 않은. 또는 그런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보통 추상적이라 함은 우리 눈으로 보이지 않는 개념을 말합니다. 그 반면에 구체적이라 함은 눈으로 볼 수 있거나 만질 수 있는 것, 그래서 언어로도 표현하기 쉬운 것들입니다.

 

그런 것을 전제로 하고, 7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하라, 어떻습니까? 구한다는 말이 여러분 마음 속에 구체적인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떠오릅니까? 그 다음, 찾으라, 어떻습니까? 어떤 구체적인 장면으로 머리 속에 떠오릅니까?

설교자들이 애를 먹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추상적인 단어, 추상적인 문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데 저도 노력을 하긴 하는데 영 그게 잘 안됩니다. 아주 애를 먹고 있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 사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개념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하고.

 

그렇게 제가 애를 먹는데 비하여 예수님은 반대로 그런 면에서는 참으로 탁월한 바가 있습니다.

7절이 바로 그런 예인데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라, 찾으라,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을 연거푸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느닷없이 문을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해 보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장소가 어디일까,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장소를 불문하고 어디서나 말씀하셨으니까 어딘가 되겠지만 그래도 이 말씀을 하시는 장소를 굳이 한번 상상해 보자면 방안에, 그러니까 문이 있는 집안에 계실 것입니다. 설령 집 안에 계시지 않더라도 문이 보이는 곳, 대문 밖에, 아니면 어떤 문이 있는 그 곳에 계십니다.

 

구하라 주신다, 찾아라, 찾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문을 두드려봐라.

 자, 이때 예수님의 손은 어디를 향하고 있었을까요?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고 계셨을 것입니다. 구하라, 찾으라,는 말은 구체적이지 못합니다. 추상적인 개념들입니다. 그러니 청중들과 항상 소통하시는 예수님이 구하라, 찾아라 까지 말씀하시다가 청중들이 긴가민가 하는 표정들임을 알아 차리시고는 덧붙여 설명할 거리를 찾으시다가, 거기 문이 있는 것을 보시고 그러면 이번에는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을 예로 들어야 하겠다 생각하시고는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다는 말이 구체적이지 않아 이해가 덜 되거든 아, 저기 문이 있다, 문을 바라보아라, 우리가 다른 사람들 집에 가서 문을 열어 달라고 할 때 어떻게 하느냐? 그렇지, 바로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바로 그게 구하는 것이고, 찾는 것이다. 그러니 가까이 있는 문을 가리키면서 문을 두드려봐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7절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늘의 일을 이 땅에 보이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쉽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들은 훨씬 더 이해가 쉬웠을 것입니다. 아, 구하라 하신 말씀, 찾으라 하신 말씀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서 감이 오질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는 바로 그것이 찾는 것이고 구하는 것이구나, 라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생각해 보십시다. 문이, 우리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 언제나 열렸습니까? 우리 병원 옆쪽에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을 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두드리면 열릴까요? 아닙니다. 그 문은 두드리면 백번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습니다. 아니, 방금 문은 두드리면 열린다고 해 놓고서는 두드리면 안열린다니? 저쪽 문을 들어가려고 하면 두드리는 대신 어떻게 합니까? 눌러야 됩니다.

누르세요, 라고 써 있는 부분을 꼭 눌러야 열립니다. 그런데 지난번 어떤 어르신이 그 앞에 서서 어떻게 문을 열지? 하면서 당황해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한글을 모르시거나, 아니면 노안이라 글씨가 잘 안보이던지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문은 두드린다고 항상 열리는 것은 결코 아닌데, 어떤 경우에 문이 열리지 않을까요? 문을 두드렸을 때에 그 안에 아무도 없다면 문이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집주인이 방안에 있을 때에만 열리는 것입니다. 또 집주인이 방안에 있다고 해서 언제나 문이 열리는 것은 아니지요. 문 밖에 와서 두드리는 사람이 귀찮은 사람이면 아들에게 말해서 문 열어주지 마라, 나 없다고 해라, 그러면 아들은 문을 빼꼼하게 열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안계신다고 말하라는데요…

그러니, 방안에 있는 사람은 밖에 있는 사람이 열어줄 만한 사이가 되었을 때에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청중들로 하여금 그러한 문을 생각하게 하시면서, 문을 통해서 소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7절로 돌아갑시다. 7절을 보면 조금 이상한 부분이 보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한글 개역)

 

먼저, ‘찾으라’는 말부터 살펴 봅시다. 찾으라는 말 다음에 뭐라 되어 있습니까?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그렇지요, 우리가 무엇을 잃어 버렸다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그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찾을 수 있겠지요.

 

그렇게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라는 말은 그렇게 평범하게 받아들여지는데, ‘구하라’를 살펴봅시다. 구하라, 그 다음에 뭐라 되어 있습니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말이 조금 말이 이상합니다.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라니 누가 준다는 말입니까? 준다는 말이 동사이고, 동사의 간접 목적어는 ‘너희’, 따라서 ‘너희’는 준다라는 동사의 혜택을 받는 상대방이 되지요. 그럼 대체 누가 준다는 말입니까? ‘준다’라는 동사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바로 이 부분이 우리 한글 번역에서 부족한 부분입니다. 원어에 의하면 <신적 수통태>라 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하시는 일을 설명하고자 할 때,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다’ 라고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대신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수동태 형식의 문장을 사용하는데, 7절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 한글 번역은 한계가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문장에서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아서, 우리는 막연히 짐작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하면 누군가가 우리에게 주신다 한다,고 번역이 되었는데, 그 다음에 ‘찾으라’에 이르러서는 그만 그 누군가 마저도 나타나지 않는 애매모호한 문장이 되어 버렸고, ‘문을 두드리라’ 역시 애매하게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되어 있어 문을 열어주는 주체가 누구인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아까 생각을 해 본 바처럼 문이 열릴 것이니, 라는 말 속에 누군가 문을 열어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문을 두드렸을 때에 그 안에 아무도 없다면 열어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집주인이 방안에 있을 때에만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렇게 누군가가 있어 너희들이 문을 두드릴 때에 열어준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열어주는 자와 두드리는 자, 그렇게 두 상대방을 전제로 하고 그 사이에 문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누군가가 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열어준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데, 우리 번역은 한참을 들여다 보고 생각해야 그 문 뒤에 계시는 누군가를 알아 볼 수 있도록 번역을 해 놓았기에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러나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것을 명확하게 짚어내어 번역을 했습니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우리가 구하면 거기에 응답하여 주시는 분이 ‘하나님’으로 되어있고, 또한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문을 두드릴 때에 하나님이 우리가 두드린 문을 열어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7절에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까?

구하면 주시는 분이요, 찾으려 할 때 찾아 주시는 분이요 문을 두드리면 그 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7절을 통해서 바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어떻게? 구하라, 찾으라 하시고는 그 말이 구체적으로 피부로 와 닿지 않을까 봐서 다시 한번 강조하시는데 바로 사람들이 흔히 보는 문, 자주 드나들며 아주 익숙한 문을 보이시면서 그 문을 열어주는 누군가 있듯이 바로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이유가 바로 이어서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가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좋은 것으로 주시는 좋은 하나님.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지금 예수님은 문이란 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문을 보여주시면서, 거기 서 계시는 우리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문을 보도록 하시었고 따라서 이제 우리는 그러한 문을 보면서 거기에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드리는 문을 열어주시는, 참으로 좋은 하나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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