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단풍나무 완상(玩賞) - 1

웬 단풍나무? 뜬금없이 웬 단풍나무? 나 혼자 하는 말이다. 나 자신에게 나 혼자 해보는 말이다.
그만큼 어이없다. 내가 단풍나무에 관심을 가지고, 단풍나무에 관하여 글을 쓰다니?

나는 단풍나무를 모른다. 관심도 없었거니와 아예 모른다. 아니 모른다, 라고 하는 현재형 표현은 이제 맞지 않다. 이제는 조금 아니까, 과거형으로 쓰는 게 맞겠다. 나는 관심도 없었거니와 단풍나무를 몰랐다.

어느 정도?
아파트 현관을 나서면 주차장이다. 주차장을 향하여 가는 몇 걸음, 그 몇 초간의 걸음 동안 몇 그루의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이름 모를 나무, 또 다른 나무, 그리고 단풍이 한 그루 서있다.
그 나무는 홍단풍이다! 그 나무가 단풍나무인줄은 알았는데 홍단풍인줄을 모르고 있었다. 이 글을 시작할 즈음, 5월에 단풍이 가을도 아닌데 벌써 붉게 물들었네? 하는 의아심에 알아보니 그게 바로 홍단풍이었다. 가끔씩 창문을 통해 바라보던 단풍나무, 이상히 여기던 나무가 바로 홍단풍일줄이야. 5월에도 벌써 빨갛게 물든, 이름하여 홍단풍이다.

그렇게 홍단풍조차 구분하지 못했던 내가 단풍나무에 관한 글을 쓴다.
이유는 단 하나, 우리 조상들이 가을이 되면 색깔이 변한다 하여 변절의 상징이라 여겼다는 단풍나무, 그래서 싫어했다는 단 한 줄의 주장 때문이다. 설마 그럴 리가? 우리 조상들이 아무리 생각이 짧다 한들 가을이 되면 저절로 색깔이 변하는 단풍나무를, 단지 색깔이 변한다 하여 변절 운운하며 싫어했다니?

그 주장이 과연 사실일까? 어이없어 하면서 그런 의문에 답하기 위해 단풍나무를 공부했다. 공부했다는 말이 이상하지만, 산과 들로 다니며 나무를 살펴 보며 단풍나무가 어떤 존재였던가 알아보는 안목이 없기에 부득이 책 속으로 들어가 공부할 수 밖에 없었다. 책 속으로 들어가 결국 도착한 곳은 인문학, 문.사.철(文.史.哲)이다. 그래서 문학, 역사를 찾아 다니며 우리 나라 조상들에게 단풍나무가 어떤 존재인가, 어떤 대접을 받고 있었는지 살펴 보았다. 인문학은 나의 그런 의문에 훌륭한 해답을 건네주었다. 우리 조상들에게 단풍나무가 완상할만한 훌륭한 나무였다는 것을, 아니 이것은 현재형으로 쓰자. 단풍나무는 우리 민족에게 완상할만한 아름다운 나무라는 것, 맞다. 그래서 인문학은 똑똑하다는 것, 역시 맞다.

사족 하나, 그러나 인문학의 한 분야인 철학은 별도로 구분하지 않았다. 이는 절대적으로 철학적 소양이 부족한데 기인하지만, 문학과 역사에 스며있는 철학을 구분하여 드러내 보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철학은 나의 글, 문학과 역사에 관련한 항목에서 인식론, 논리학, 미학 등의 모습으로 스며 있음을 밝힌다. 독자들은 그러한 철학의 세부 과목들을 찾아보며 읽는 것도 글 읽는 재미로 여겨주기를 부탁 드린다.

이제 글을 다 마치고 나면, 무언가 손에 잡힐까? 단풍나무가 아름다움 자체로 다가올까?
하여 이번 가을에는 단풍나무 그리고 단풍을 제법 운치 있게 완상해 보고 싶은데. 완상? 너무 꿈이 크다. 내 딴에는 그저 나무 중에서 단풍나무나 구분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도 완상은 완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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