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리더십에 반하다.

 

<’반하다’는 말을 혹시 오해할지 몰라 한자를 덧붙입니다. 이 때의 ‘반’은 反, 또는 叛 입니다.>

 

 

1. 존 맥스웰, 노자를 뒤틀다.

 

먼저 시 한 수를 감상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사람들에게 가라

그들 가운데 살라

그들에게 배우라

그들을 사랑하라

그들이 알고 있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 위에 세우라

 

그러나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그들의 일이 성취되었을 때에 그들의 일이 다 완수 되었을 때에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힘으로 이 일을 해냈다”고 말하게 한다.> (<리더십의 법칙> 240-241 쪽)

 

리더십의 고전이라 불리는 존 맥스웰의 <리더십의 법칙>에 나오는 시인데, 맥스웰이 <인물계발의 원칙>이라는 항목에서 결론으로 소개한 것이다.

 

존 맥스웰은 이 시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래 된 중국 시 한 수를 소개한다. 당신은 훌륭한 지도자에 대해서 당신이 찾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충고를 발견할 수 있다.”(240쪽)

 

맥스웰이 인용했다는 ‘오래 된 중국 시 한 수’가 과연 훌륭한 지도자를 노래한 시일까? 인용된 시만 읽어본다면, 그렇다. 훌륭한 지도자를 노래한 시다. 맥스웰은 그래서 동서양을 넘나들며 리더십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그 인용된 시가 정말 그런가? 혹시 중국 시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뜻이 바뀌어진 것은 아닐까. 번역의 문제라든가, 아니면 견강부회식으로 시를 가져다 오용내지 남용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원전을 찾아 확인하는 수 밖에 없는데, 왜냐면 지난 글(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에서 두루 살펴본 바와 같이 리더십 주창자들의 글들은 잘 못 사용된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맥스웰이 인용한 중국의 시는 원전이 무엇일까, 살펴본 다음에, 맥스웰이 인용한 것처럼 그들의 일이 다 완수 되었을 때에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힘으로 이 일을 해냈다”고 말하게 한다,는 내용이 정확한 것인지를 확인해보기로 하자.

 

그런 의도를 가지고 중국의 시들을 살펴보았으나, 어디 그게 쉬운 일일까. 수많은 중국 시 중에서 해당하는 내용을 찾는다는 그야말로 한강에 빠진 바늘 하나 찾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아닌가? 결국 그 원전을 알아내지 못했다. 맥스웰이 친절하게 인용한 시의 원전이 무엇인지를 말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닌 채 지나던 중에 <한시로 읽는 우리 문학사>(김갑기 저)를 읽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단서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책에서 고구려의 장군 을지문덕의 시 한 수를 해설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명장 "乙支文德" 장군의 작품으로 전해오는 오언 절구로, 수(隋)나라의 최고 장수인 우중문(于仲文)에게 보낸 시다.

 

 神 策 究 天 文 (신책구천문)

妙 算 窮 地 理 (묘산궁지리)

戰 勝 功 旣 高 (전승공기고)

知 足 願 云 止 (지족원운지)

 

신묘한 계책은 천문에 깊이 통하였고, 뛰어난 계산은 지리에도 밝으십니다 그려. 전쟁에 승리하여 세운 공이 이미 높으니,

바라건대 이제 이만 싸움을 그만 두십시다.

 

을지문덕은 고구려 영양왕 때 인물로서, 수나라 대군을 맞아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물리친 명장이다. 위의 시는 적국인 수(隋)나라의 최고 장수인 우중문(于仲文)에게 보낸 시라고 한다. 적장을 추켜 세우는 공손한 표현의 속셈에는 적의 대군을 맞아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고구려인의 기개와 유연함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비록 짧은 시 한편이지만 이 유명한 시 한편을 통해, 한 시대의 시대상과 역사의 단면을 짚어 보게 한다.

 

<한시로 읽는 우리 문학사>(김갑기 저) 에서 위의 시를 해설하기를, 결구의 <知足願云止 (지족원운지)>는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곳에서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장구하리라(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는 도덕경을 용사했다. (30쪽)고 말하고 있다.

 

용사했다는 말은 用事 즉, “이미 존재하는 명문의 표현이나 관련 사실을 다시 끌어다 쓰는 창작방식”을 말하는 것이니 (<고전문학사의 라이벌>, 96쪽) 을지문덕이 도덕경의 한 구절을 가져다 시를 짓는데 사용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을지문덕이 용사(用事)했다는 도덕경의 구절은 어떤 것인가? 도덕경 44장이다.

 

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得與亡孰病,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명성과 내 몸, 어느 것이 더 귀합니까?

내 몸과 재산, 어느 쪽이 더 중합니까?

얻음과 잃음, 어느 것이 더 큰 관심거리입니까?

그러므로 [무엇이나] 지나치게 좋아하면 그만큼 낭비가 크고,

너무 많이 쌓아두면 그만큼 크게 잃게 됩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적당할 때] 그칠 줄 아는 사람은 위태로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 도덕경, 오강남, 191쪽)

 

그렇게 을지문덕으로 시작해서 도덕경을 읽어가는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띄었다.

 

太上 不知有之, 其次, 親而譽之. (태상 부지유지, 기차, 친이예지.)

其次., 畏之. 其次, 侮之. (기차 외지 기차 모지)

信不足焉, 有不信焉. (신불족언, 유불신언.)

悠兮, 其貴言, (유혜, 기귀언,)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공성사수, 백성개위아자연) <노자, 도덕경, 17장 전문>

 

무슨 의미인지, 오강남이 <도덕경>에서 해석한 것을 따라가 보자.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 하고 칭찬하는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 가장 좋지 못한 것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

 

[지도자에게] 신의가 모자라면

[사람들의] 불신이 따르게 되면

[훌륭한 지도자는] 말을 삼가고 아낍니다.

[지도자가] 할 일을 다하여 모든 일 잘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에게 저절로 된 것이라”고 >

 

지도자에 관한 노자의 혜안이 돋보이는 글이다. 그런데 노자의 글을 읽다 보면 무언가 걸리는게 있다. 바로 맥스웰이 인용한 중국 시의 일부와 비슷한 부분이 보인다는 점이다. 한글 번역으로 살펴 볼 때에, 맥스웰의 인용한 중국 시와 도덕경이 유사한 데가 있지 않은가? 특히 마지막 3연이 아주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부분만 따로 떼어 내어 살펴보자.

 

<[지도자가] 할 일을 다하여 모든 일 잘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에게 저절로 된 것이라”고> (도덕경 17장)

 

그 부분을 맥스웰의 인용한 시와 비교하며 살펴보자.

 

<그들의 일이 다 완수 되었을 때에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힘으로 이 일을 해냈다”고 말하게 한다.> ( 맥스웰이 인용한 중국 시 )

 

맥스웰이 인용한 중국시 전문은 도덕경 17장과 다를지라도, 발췌 비교한 부분만은 비슷하다. . 비슷하다, 아니 같다, 똑같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에서 무언가 아주 미묘한 차이가 보인다. 맥스웰은 “우리 힘으로 이 일을 해냈다”고 말하게 한다, 고 인용한 반면 오강남은 그 부분을 “이 모두가 우리에게 저절로 된 것이라”고 번역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 (사람들) 힘으로”와 “저절로”, 의 차이이다.

맥스웰은 지도자가 일을 성취하게끔 지도하고 그 일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우리 힘으로” 해 냈다고 말하게 한다고 번역하여 사람(즉, 지도자)의 능력을 강조한 반면, 오강남은 “이 모두가 우리에게 저절로 된 것이라”고 말하게 한다고 번역하여 사람 냄새가 나지 않도록 했다.

 

결국, 맥스웰은 그 것을 ‘우리 (사람들) 힘으로’라고 번역하여 인위(人爲)로 결론을 지었는데, 오강남은 ‘저절로’라고 번역하여 무위(無爲)로 결론지었다. 이것은 사소한 차이처럼 보이나, 큰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맥스웰이 굳이 그 시의 원전을 밝히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노자 사상의 기초가 무위 (無爲)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을 맥스웰이 왜 다른 의미(人爲)로 해석하여 중국 시라며 인용했을까? 맥스웰이 인용한 중국시가 도덕경의 일부를 차용하여 만들어진 시임은 분명한데 그 결론이 노자의 생각과 다른 것이니, 인용하는 과정에서, 또는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변형 또는 왜곡시켜 버린 것이 분명하다.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했을까? 단순히 도덕경의 해석 차이일까, 리더십을 주장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그렇게 번역을 다르게 했을까? 그 점이 궁금하다.

 

이상 살펴 본 바와 같이 맥스웰은 중국의 시를 인용하면서 원래의 뜻과는 다르게 (또는 왜곡하여)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책들을 읽을 때에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맥스웰 뿐만 아니라 다른 리더십 주창자들은 어떨까? 리더십의 근거로 사용하는 글들(노자 등)을 왜곡하고 있는 것은 없을까? 혹시 있다면? 그런 거짓 주장에 속지 않기 위하여서는, 그들의 주장을 하나 하나 살펴보는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리더십 주창자들이 주장하는 리더십의 근거들 - 특히 동양 사상들 - 을 살펴보며 그들의 주장이 그릇되고 뒤틀린 것임을 밝히고, 원래의 뜻을 세우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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