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엘 오스틴 비판적 읽기 - 1

들어가는 말 1 - 의심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믿을만한 것을 믿는 것이 신(信)이요, 의심할 만한 것을 의심하는 것도 역시 신이다.>
                  ( 信信信也 疑疑亦信也) – 순자(荀子), 비십이자편(非十二子篇)

영화 <방가 방가>를 보았다.
보는 동안 여러 장면이 눈에 담겨 마음을 아프게 하더니, 기어코 가슴에 남는다. 장면만이 아니라 가슴에 남는 말도 있다.

“ (이미그래이션 단속반) 떴다!!”

방금 전까지 화음이 멋들어지게 울려 퍼지던 노래 경연대회는 그 말 한마디에 박자, 음정이 질서를 잃고 아수라장이 된다. 그들 -외국인 근로자 - 이 처한 현실이 화음으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극적으로 묘사한 컷이다. 그들은 사방 팔방으로 도망치며 그들이 처한 현실이 아수라장이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다. 영화 화면에서는 필사도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지는데, 그렇다면 영화관 밖의 현실은? 또한 마찬가지, 그래서 영화의 장면 장면이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 맞다.
그런데 그 화면과 오버랩 되어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어느 회사 이미지 광고의 한 토막이다.

                             낯선 나라에도
                     가까운 이웃이 있었습니다.

                먼 나라에서 건너와 액세서리를 팔던 젊은 커플,
                 갑자기 비를 만났지만 말없이 차양을 내려준
                 꽃집 아저씨 덕분에 비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
                      그날, 세상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마음을 열면 따뜻한 세상이 시작됩니다.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굳이 어떤 장면인지 떠올려 보지 않더라도 훈훈한 기운이 넘친다. 그림으로 보면 더더욱 감동이다. 서양영화에나 나옴직한 거리를 배경으로 꽃집이 자리하고, 그 꽃집 앞에 세련된 외국인 남녀 커플이 좌판을 앞에 두고 있다. 그들과 더불어 꽃집주인 아저씨가 등장하고 또 한 명 누구인지 모르는 소녀 한 명, 더불어 사는 삶의 표본처럼 그들을 모두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이 정도면 훌륭한 화면 구성이다. 게다가 그 화면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까지 담겨 있으니,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어디인줄 모르겠으나 참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그렇다면 그 모습은 딴 나라 먼 나라 외국을 배경으로 한 것일까? 아니다. ‘먼 나라에서 건너와’ 라는 말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도착하여 “액세서리를 팔”고 있는 곳은 분명 우리나라다. 우리 나라 어디에선가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다. 그래서 그 사건의 배경인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비가 내려 어쩔 줄 모르는 외국인 부부에게 배려하는 마음, 그 한국인의 모습을 보고 들으며 마음이 훈훈해짐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열면 – 마음을 연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 따뜻한 세상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 꽃집 아저씨는 ‘한국’에 실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 그런 한국인은 존재한다 치자, ‘먼 나라에서 건너와’ 액세서리를 파는 외국인 부부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 나라에서 외국인 부부가 길가에서 노점을 열고 영업을 할 수 있을까? 외국인 신분으로 우리나라에서 자영업을 그런 식으로 할 수 있을까? 좌판을 벌이는 그런 소규모 영업도 자본 투자로 인정이 되어 우리 나라에 합법적으로 체류하며, 영업을 할 수 있을까? 이 광고가 말하고자 하는 “마음을 열면~ ”이라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과연 그런 모습이 실제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그 좌판 앞에서 영화 <방가방가>에 등장하는 한마디 “ (이미그레이션) 떴다!!”를 외치면 그 외국인 ‘젊은 커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함박웃음? 글쎄다.

그 이야기에 헛점은 없는 것일까? 그 외국인 부부의 신분은 어떨까? 과연 그런 상행위가 가능한지, 그 외국인이 외국인 신분으로 그런 상업행위를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우리 나라 법으로 그게 가능한지?

그런 것 따지지 말고 그냥 넘어가서,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고 훈훈한 감동을 받아야 되는데 그런 일화를 보면 너무 작위의 냄새가 나는 바람에 영 마음이 개운치 않다.

엄격히 따지고 보자면 그것은 호도에 불과하다. 우리 현실이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허용된다고 미화하는 것이 아닐까? 혹은 외국인들이 그런 광고를 보고 그들도 그런 영업을 하려고 나설지 모른다. 이왕이면 차양이 있는 꽃집 앞에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면? 그 이야기의 현실성은 없는 것 아닌가? 그저 그런 꾸며낸 이야기에 그저 감동을 받아 마음을 열어 이 세상이 극락정토로 바뀌기를 고대하라는 말인가?

그러나 의심을 버리고, 아니 애초에 아무런 의심 없이 그런 이야기에 감동하고 살고 싶다. 그래서 마음을 열고 싶다. 그래서 아름다운 세상만 될 수 있다면, 백 번 아니 천 번이라도 마음을 열어주고 싶다. 그래서 없는 차양이라도 만들어 두었다가, 비가 오기를 기다려 내려주고 싶다. 그런 좌판을 벌이고 살아가는 외국인이 내 앞에 온다면. 그러나 그런 일은 현실에서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니 그 회사에서 말하는 “마음을 열”라고 하는 외침이 공허하다. 메아리조차 없는 외침이다.

그럼 ‘우리나라에 없는 현실’ 말고 우리 주변을 한번 살펴볼까, 그런 ‘없는 현실’을 있다고 소리치는 외침은 없을까? 아름다운 말로 현실을 호도하고, 마치 그런 말과 글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눈을 홀리고 있는, 목소리는 없을까?

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어보자.
<냉동열차에 갇혀 얼어 죽은 사나이> 라는 제목으로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란 책에 소개된, 그래서 이제 제법 유명하게 된 일화이다. (긍정의 힘, 88-90)

<우리의 생각과 기대는 우리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센 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주 몸집이 크고 건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직업은 조차장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조차장이란 철도에서 화물차나 객차를 분리하고 연결하는 일을 하는 작업장입니다. 그는 아주 성실하고 인간관계가 좋은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단 한가지 단점은 항상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비관적으로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말하기 좋아했습니다.
어느 여름날 저녁, 한 직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퇴근 시간을 한 시간 앞당겼습니다. 시간이 되어 모든 승무원이 파티 준비를 위해 집으로 갔지만 닉은 보수를 위해 조차장으로 들어온 냉동 열차 안에 사고로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냉동 열차는 비어 있었고 다른 열차에 연결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냉동 열차 안에 갇혔다고 깨달은 순간 닉은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팔과 주먹에 피멍이 들 정도로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렀지만 동료들은 이미 모두 퇴근한 후였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닉은 목이 쉴 때까지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냉동 열차 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그렇다면 안의 온도는 영하 30ºC 정도, 아니면 그보다 더 낮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서 나가지 못하면 분명 얼어 죽고 말거야. 이 추운 곳에서 밤새 견딜 수는 없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추워졌습니다. 문이 꽉 막혀 숨쉬기가 곤란하고 빠져 나갈 방법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바닥에 주저 앉았습니다. 그리고 추위 아니면 질식으로 죽음이 찾아오기만 넋 놓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상황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셔츠 주머니를 뒤졌더니 펜이 한 자루 있었고 구석에 마분지 한 장이 보였습니다. 거의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떠는 와중에도 그는 긴박한 상황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너무 춥다. 몸이 마비된다. 빨리 나가지 않으면 아마도 이것이 내 마지막 글이 될 것이다.”
그의 말처럼 그 글은 닉의 마지막 자취가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한 승무원들이 냉동 열차의 문을 열었을 때 닉은 구석에 쪼그린 채 죽어 있었습니다. 부검 결과는 동사였습니다.
그런데 경찰 조사에 의하면 닉이 갇혀 있었던 냉동 열차는 전원이 켜있지 않았습니다. 그 냉동 열차는 오랫동안 고장이 나 있었고 바로 그 고장 때문에 수리를 위해 조차장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닉이 죽던 날 밤도 역시 그 냉동 열차는 고장난 채였습니다. 여름이었으므로 냉동 열차 안의 온도는 보통의 실내 온도보다 약간 낮을 뿐이었습니다. 닉은 냉동 열차가 가동하고 있다고 믿은 나머지 추위를 느끼고 몸이 얼어 붙었습니다. 스스로 죽음을 기대했습니다. 닉은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닉이 두려워했던 일은 현실에서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인생은 스스로 이루어지는 예언’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에도 닉처럼 늘 최악의 상황, 패배, 실패, 그저 그런 삶만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기대대로 거두며, 자신이 믿은대로 되어갑니다.>

우리들이 세상 살아가는데 믿은대로 성취할 수 있다며 우리 마음을 혹하게 만든 예화다. 그 예화를 읽는 순간, 아! 그렇구나, 세상 만사는 우리 마음 먹기에 달렸구나, 하는 깨달음이 뇌리에 꽉 들어와 박힌다. 그래, 그러니 우리는 마음을 잘 먹어야 해, 역시 오스틴이야! 이런 말로 우리를 가르쳐주고 계시니…

 

그러나, 과연 그 예화는 과학적 진실을 담고 있는가?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한 승무원들이 냉동열차의 문을 열었을 때 닉은 구석에 앉아 쪼그린 채 죽어있었다. 부검 결과 동사였다> (긍정의 힘, 90쪽) 

예화의 주인공인 닉의 사인이 동사(凍死)라는 것이 사실인가? 과학적으로 그게 가능한 일인가?
기가 막히게 좋은 감동을 주는 이런 예화에 대하여, 의심한다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일까?
여기에서 의심해 보는 일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누구인가? 조엘 오스틴이 아닌가? 미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대단한 목사가 아닌가? 그런 분이 말씀하신 내용이니 무조건 믿어야 하지만, 믿기에는 무언가, 무언가 망설이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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