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단풍나무 완상(玩賞) - 5

제 1장 ‘낯선 기억’과의 만남

1. 낯선 단풍나무를 만나다 (4)

잎의 색깔이 변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단풍나무를 지조 없다고 여기고, 그래서 궁궐에 심지 않았다는 ‘낯선 기억’이 인터넷은 물론이고, 숲해설사를 통하여 숲속에서 널리 전파되고 있음을 살펴 보았다. 그렇다면 정작 궁궐에서는 어떨까? 궁궐을 다녀가는 사람들은 어떠한 말들을 하고 있을까,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 글은 ‘오마이뉴스’에 올라와 있는 글이다. 어떤 분이 창덕궁 나들이를 마치고 기록한 것인데, 지금까지 제시한 자료들은 인터넷 또는 숲속에서 숲을 공부하면서 궁궐의 단풍나무를 언급하던 것들이었으나 이 글은 궁궐 안에서 단풍나무를 바라보며 느낀 소감을 기록한 것이니,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자료 6 >>

옥류천에서 '선정'과 '폭정'을 생각하다
연산군, 광해군의 도주로로 쓰인 북문을 보며
08.07.06 10:59 ㅣ최종 업데이트 08.07.06 11:42 손은영

지난 6월 29일 일요일 창덕궁으로 나들이를 갔다. 관람 예약을 하던 한 달 전만 해도 시원한 바람과 함께하는 '도시락 소풍'을 기대했건만, 6월의 마지막 일요일은 뜨거운 햇볕으로 손부채질 하기 바빴다.
언제 또 특별관람을 해 보겠냐며 비교적 입장이 자유로운 일반관람을 제치고, 정해진 시각의 옥류천 특별관람을 예약한 것이 화근이다. 오전 10시 시작인 관람을 위해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전력 질주,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닫힌 문을 기어이 다시 열고 들어간 시각이 오전 10시 3분.
정각에 입장해야 관람이 가능하다는 '관람객 협조사항'을 무시했으니 미리 도착한 관람객들의 눈총을 받아도 싸다.
"지금 오시는 분들도 일반관람을 하지 않으셨나요? 이 옥류천 코스는 일반관람이 필수예요. 학문 연마의 공간으로 쓰인 비밀화원을 '별다른 설명 없이' 마음으로 느끼는 코스거든요."
꼭 지각에 숙제까지 안 해 온 초등학생의 심정이었다. 별수 있나. 함께 온 남자친구와 "우리 다음엔 꼭 일반관람하자"라며 소근소근 다짐하는 수밖에.
그렇게 헐레벌떡 시작된 옥류천 관람에도 불구하고 오전의 숲 속 공기는 상쾌하기만 했다.

창덕궁의 정문격인 돈화문을 시작으로 관람은 시작되는데, 돈화(敦化)는 '(큰 덕은 백성들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궁 정문의 이름으로 이처럼 '덕'을 강조한 걸 보면, 통치자가 백성을 감화시킬 가장 정확한 방법이 '공권력'이 아닌 '덕'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듯하다.
동양의 전통적 우주관을 표현했다는 '부용지'에서 잠시 숨고르기를 했다. 정조가 규장각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는 곳인데, 개인적으론 은밀한 느낌의 옥류천보다 탁 트인 호수인 이곳이 더 아름다웠다.
부용정 옆의 주합루엔 임금이 지은 글이나 글씨, 임금의 초상화 등을 보관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신성시 되던 곳이 나중엔 일본 관인들의 접대소로 변질됐었다고 하니, 국가의 자주성 상실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실감했다.

부용정에서 존덕정과 폄우사를 지나면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우거진 숲으로 햇살 한 줌 들어설 공간 없이 이어진 길은 비밀화원이란 말을 실감케 한다.
"조금 힘드시죠? 예전의 왕과 선비들은 이 길을 산책하며 나라를 걱정하기도 하고 독서도 했을 겁니다. 관람이라는 생각보다 산책하는 마음으로 걸으세요."
아직 이마에 땀이 맺히진 않는다. 그래도 다리가 불편했다면 적잖이 힘들었을 길이다. 끊임없이 달라붙는 모기와 벌레에 손이 바빴지만, 서울 한복판에 이런 숲 속 산길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물론 궁의 모습은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그 모습이 서양식으로 많이 변해버렸다고 한다. 옛 성인들이 '변절을 상징한다'고 하여 심지 않았던 단풍나무도 이제는 창덕궁의 멋진 가을풍경에 한몫을 하고 있다. 지하의 고인들이 탄식할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 아닌가. 이마저도 없었다면 조선 고궁의 모습은 서양의 선교사가 찍은 사진, 혹은 한국과 일본의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궁내 유일하게 물이 흐르는 곳인 옥류천은 전날 비가 왔음에도 채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었다.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하여 많은 임금들에게서 특히 사랑받았던 곳'이라곤 하지만 맑게 쏟아지지 못한 채 갇힌 인공폭포는 쓸쓸해 보였다 옥류천을 내려오는 길목에 나무로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는 문이 올려다 보인다. 궁의 가장 은밀한 문인 북문이다.

"예부터 북쪽은 음기가 흐르는 쪽이라 해서 저 문은 거의 열지 않는 문입니다. 주로 궁궐에서 죽은 궁녀나 내시들의 주검이 나갈 때 몰래 열리는 문이죠. 궁 안에서는 왕 이외엔 누구도 죽을 수 없거든요. 그런 은밀한 장소라 전쟁 중의 도피로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반정에 의해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이 이 문으로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한 역사도 있습니다. 역사 속엔 선정을 펼쳐 후대에 '-대왕'으로 칭송 받는 왕이 있는 반면, 폭군으로 가려져 '-군'으로 기록된 왕이 있기도 하다.

업적이라는 개념은 현 세대에 평가해 바로 결론을 내기가 어려운 면이 있다. 전, 후 몇 년이 아닌 수 십년의 역사를 조심스럽게 따져봐야 그의 옳고 그름을 겨우 판단할 수 있다. ..(하략)



궁의 모습이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그 모습이 서양식으로 많이 변해버린 것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 뒤의 말이 걸린다.
<옛 성인들이 '변절을 상징한다'고 하여 심지 않았던 단풍나무도 이제는 창덕궁의 멋진 가을풍경에 한몫을 하고 있다. 지하의 고인들이 탄식할 일이다>

이 글은 우리 조상들에게 단풍나무는 변절의 상징이었다는 낯선 ‘기억’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변절의 상징인 단풍나무가 현재 시점에서 궁궐에 심겨져 있음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이 글을 기록한 사람은 그 말, 단풍나무에 대한 ‘낯선 기억’을 어디에서 들었을까? 어디에서 그런 사실을 전해 들었길래 궁궐의 단풍나무를 보면서, 완상 하는 대신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하고 있을까? 인터넷에서? 숲해설가에서? 아니면 요즈음은 궁궐에서도 문화재 해설사들이 있다는데 그들을 통해서 들은 것일까?

여하튼, <궁궐의 단풍나무 부재> 주장은 이미 제법 뿌리를 튼튼히 내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인터넷 공간에서, 또한 숲에서, 궁궐에서 어른은 물론이고 아이들까지, 이구동성으로 모두다 단풍나무가 그런 나무였노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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