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단풍나무 완상(玩賞) - 12

제 1장 ‘낯선 기억’과의 만남

2. ‘낯선 기억’의 정체를 찾아서 (6)

결과적으로 나는 실패했다. 근거를 찾지 못한 것이다. 단풍나무를 잎의 색깔이 변한다는 그 한가지 사실만으로 변절의 상징으로 여겨, 우리 조상들이 궁궐에 심지 않았다는 주장. <궁궐의 단풍나무 부재> 주장을 하는 근거를 찾아 보았으나, 찾지 못한 것이다. 여러 경로를 통해 그 근거를 찾아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그런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단풍나무가 그렇다는 주장만 할 뿐,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박병권 교수만 유일하게 <변절자로서의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있는, 오래된 나무가 없다는 뜻이>라며 궁궐에 오래된 단풍나무가 보이지 않는 것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확인된 사실은 있다. 학자, 숲해설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궁궐의 단풍나무 부재> 주장에 동조하고 있으며 또한 전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확인한 것이다. 책을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숲 속에서, 그리고 궁궐에서 그런 주장이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그렇게 확신에 찬 어조로 그런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을 보면, 내가 발견하지 못할 만큼 더 깊은 곳에 근거를 숨겨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단 <궁궐의 단풍나무 부재> 주장이 어떻게 발전, 확대생산 되고 있는지 지금까지 파악한 것을 정리해보자.

<가시가 있는 나무나 속이 빈 오동나무는 심을 수 없었어요. 또 색깔이 변하는 단풍나무도 '금지 수목'이었죠. 왕을 향한 마음이 변해선 안 되니까요. 그래서 궁궐에는 단풍나무처럼 생겼지만 색깔이 변하지 않는 신나무(단풍나무과)를 심었다고 하네요.> <자료 1>

<단풍나무들은 옛날 궁궐에 절대로 심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햇빛에 의해서 쉽게 색이 바뀌는 즉 지조 없다는 이유로 심지를 않았다고 한다.> <자료 3>

<“조선시대 궁궐의 정원에는 절대 단풍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해요. 단풍의 색깔이 변하는 것이 변절을 상징하기 때문이라더군요.”> <자료 4>

<옛날 조선 궁궐에는 없는 단풍나무, 오랜 시간이 지나야 꽃이 피는데 그 꽃이 지고 나면 죽는 대나무 등 정말 신기한 사실이 많았다. 특히 단풍나무 문제는 당연히 우리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어서 단풍나무는 궁궐에도 있을 줄 알았는데 단풍나무가 궁궐에 없었다니 이유도 궁금했다.> <자료 5>

<옛 성인들이 '변절을 상징한다'고 하여 심지 않았던 단풍나무도 이제는 창덕궁의 멋진 가을풍경에 한몫을 하고 있다. 지하의 고인들이 탄식할 일이다. ><자료 6>

<단풍나무는 봄 눈엽 나물, 여름 두터운 그늘, 가을 단풍, 겨울 질긴 목재 그리고 달콤한 수액으로 버릴 것 없으나 동양의 군자도사상은 지조를 중히 여겨서 가을 찬 바람에 물들어가는 단풍은 변절의 상징이 되어 절의를 숭상한 지사들 집 정원에는 찾아 볼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자료 7>

<우리 선조들이 잎의 색깔을 바꾸는 단풍나무를 지조가 없다 하여 꺼렸다는 말이 전해지기는 하지만 ……> <자료- 8>

<요즈음 단풍나무는 정원수로 인기 있는 나무들 가운데 하나이다. 단풍나무가 색이 변하므로 지조를 중히 여겼던 시대에는 반겨하는 나무가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 <자료- 9>

<단풍나무는 봄이면 붉은 색 또는 적갈색을 띄는 종이 많고 잎은 여름이 가까워지면 옅은 녹색(연두색)으로 바뀌며, 가을이면 갖은 색감을 드러내 그 화려한 자태(姿態)를 뽐내기 바쁘다. 그리고 추위가 시작되면 잎의 색깔은 가장 먼저 우중충한 회갈색으로 변한다. 계절에 따른 색깔 변화를 가리켜 옛 선조들은 변절자(變節者)에 비유, ‘지조 없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낙인찍어 버렸고 결국 궁궐, 도읍, 성 등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의미를 가진 단풍나무를 베어버리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 <자료 15>

<변절자로서의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있는, 오래된 나무가 없다는 뜻이지요.
실제 그리 오래된 나무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참고로 관가 주변에는 왕이 살고 있는 궁과 달리 대부분 단풍나무를 심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최근 전북과 전남 지역의 향교를 비롯한 많은 잔존림 지대를 다녀왔지만 수령이 짧은 탓인지 고령의 단풍나무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최소 200-300년은 되야 하는데 대개 90년을 상회하는 정도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자료 17>

어디 그뿐인가? 이런 주장도 있다.

<자료 18>

[단풍나무]
단풍나무과의 낙엽성 활엽 교목
우리나라 중부지방 이남의 산지에 자생합니다.
단풍은 처음 싹이 붉게 나옵니다.
그러다가 잎이 점차 푸르게 자라는데 가을로 들어서면서 다시 붉어집니다.
이 같이 변하는 현상을 이유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단풍나무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변절의 나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지요.
변절의 의미를 붙여 궁궐에 심지 않았으며, 가정의 입장에서는 중풍과 연관지어 집안에 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궁궐에는 단풍나무가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단풍나무를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에 의해 일제시대 때 심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http://club.paran.com/club/home.do?clubid=gumi48-bbsView.do?menuno=3497532-clubno=1112226-bbs_no=0xs8V

<자료 19>

<단풍은 주로 산골짜기에 자생하며 인근 백양산, 내장산, 대둔산의 단풍은 너무도 유명하다. 그러나 가벼운 서리에도 색깔이 금방 변하는 ‘변절의 나무‘라고 하여 일반 가정집에서는 식재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현재까지 파악한 <궁궐의 단풍나무 부재>주장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1) 단풍나무들은 옛날 궁궐에 절대로 심지 않았다.
2) 조선시대의 궁궐 정원에는 단풍나무가 없었다.
3) 조선시대의 궁궐에는 단풍나무가 없었다.
4) (조선시대의) 도읍, 성, 사대부의 집에 단풍나무는 없다.
5) 단풍의 색깔이 변하는 것이 변절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6) 바람직하지 못한 의미를 가진 단풍나무를 베어버리는 것은 당연했다
7) 일반 가정집에서도 식재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그런데 1)번 항목과 2)번 항목을 살펴보면, ‘옛날’에서 “조선시대’로 시대가 구체화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2)번 항목에서는 조선시대 궁궐의 ‘정원’에 단풍나무가 없다고 하는데 비하여 3)번 항목에서는 조선시대의 궁궐에는 단풍이 없다고 한다. 단풍나무가 없던 장소가 ‘궁궐의 정원’에서 ‘궁궐 전체’로 확장이 된 것이다. 거기에다가 4)번 항목에 이르면, 그 범위는 더욱 확장이 된다. 단순히 궁궐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궁궐에서 도읍으로, 또한 성으로 또한 7)번 항목에서처럼 일반인의 집으로, 단풍나무가 없는 곳이 더욱 늘어난 것이다.

결론으로, 위의 주장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ㅇ 조선시대 궁궐은 물론 성읍 심지어 성, 일반 가정집에 단풍나무는 없었다.
ㅇ 그 이유는
- 단풍나무가 변절의 상징이라 여겨 심지 않았을 뿐더러
- 심겨져 있는 것조차 다 베어냈기 때문이다.

묻고 싶다, 그런 일들이 과연 우리 역사의 한 켠에 남아있는 ‘기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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