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엘 오스틴 비판적 읽기 - 2

들어가는 말 2 – 조엘 오스틴 Vs 베르나르 베르베르


독자들은 틀림없이 이 책에서 저마다 다른 의미를 발견할 것이다. 사실 스스로의 기억을 개입시켜 이 책을 고쳐 나가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이 백과사전에 <상대적이며 절대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이 책에 담긴 정보는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할 것이고, 읽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일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서문 중


이제 오스틴이 사용한 예화 <얼어 죽은 사나이>를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혹시 그 예화를 아직 읽어보지 못한 분이 있다면, 전 회로 돌아가서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 예화는 오스틴의 생각을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아주 좋은 사례이니 수고스럽더라도 먼저 그 글을 다시 한번 읽어 주시기를 바란다. 읽어봐야 그 글이 어떤 내용인지 알고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다고 그 예화를 읽기 위하여 책 <긍정의 힘>을 굳이 살 필요는? 아예!! 없다.

그 안에 들어있는 ‘사건’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읽고 난 느낌은 어떤 것인가? 당신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내 앞에 죽음이 다가왔음을 느낄 때, 어떤 마음이 들까? 냉동실에 갇혔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주머니를 뒤져 펜을 찾아내어 죽어가는 당신의 모습을 기록할 생각이 들겠는가, 아니면 살아남기 위하여 무언가 할 일이 없을까 하는 다른 생각을 하겠는가? 몸이 얼어온다고 느끼는 순간 제자리 뜀뛰기라도 하여 체온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겠는가? 아니면 그것을 자세히 기록하기 위하여 애를 쓸 것인가? 우리의 생명이 단지 냉동실 안에 있다는 그 사실 하나 때문에 포기를 할 만큼 그렇게 간단한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심리변화를 5단계로 말하기도 한다. 물론 그 짧은 순간에 다섯 단계를 후다닥 해치우는 사람도 때로는 있겠지. 그렇지만 아무리 빠르다고 할지라도, 남들은 며칠, 몇 달에 걸쳐 겨우 겨우 마지 못해 하는 일을 순식간에 끝내버리고 이제는 오히려 차분이 죽어가는 상황을 기록하기 위하여 주변을 둘러 보며, 필기구를 찾을 여유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참 별일이다. 거의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떠는 와중에도 그는 긴박한 상황을 적어 내려갔다니, 주인공 닉은 과연 초인인가?

상황 따라 다르다고? 글쎄, 그런 경우를 당해 보지 않아서 자신있게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쉽게 우리 삶을 포기할 수 있을까, 무언가 지프라기라도 잡으려 애쓰지 않을까?
아직까지 죽어 본 경험이 없어서, 죽어가는 순간 어떤 생각이 들지 갈피를 못 잡겠다면, 다음 글을 한번 읽어보도록 하자. 우리 인생이 죽어가는 순간 드는 한가지 생각, 물론 생각은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그 중 가장 빠르게 찾아오는 생각이 무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김별아의 한겨레 신문 칼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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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의 대표적인 악산(惡山)으로 꼽히는 봉우리를 오르는 동안, 얼마 전 특강에서 하고픈 질문이 너무 많다며 연락처를 물어왔던 학생의 이메일 첫 문장이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편견으로 재단하지 않고 섣부른 동정 없이 타인의 상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고작 스무 살에 폐허를 말하는 젊은이에게, 언젠가의 나를 닮은 그의 질문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어 허영허영한 네발걸음이 무거웠다.
정상까지 오르는 데는 지도에 ‘절벽 100미터’라고 표기된 위험 구간이 있었다. 네 부분으로 나뉜 로프 구간 중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그야말로 젖 먹던 힘을 다해 기어올랐다. 등산 교본에서는 암벽등반을 ‘인간의 본능이라 할 오르기에서 즐거움을 찾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몸짓’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어쨌거나 순수하긴 순수할 수밖에 없다. 손은 바위 턱을 잡고 감싸고 당기고 밀기에 순수하게 더듬거리고, 발은 바윗면의 울퉁불퉁하고 거칠고 오목한 곳을 찾아 디디기 위해 순수하게 버둥거린다. 로프를 놓는 순간 안도의 한숨과 함께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런데 남아있던 막고비에 비하면 앞의 셋도 별것 아니었다. 경사가 수직에 가까운 바위를 기어오르노라니 “도저히 못 하겠어요!”란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안전벨트에 자일을 걸고 잡아끄는 대로 올라가야 마땅하건만 홈 하나 없는 매끄러운 바위를 디디려니 발은 거푸 허방다리를 짚고 밧줄을 잡은 팔은 힘이 빠져 흐늘흐늘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죽지 않겠다! 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위에서 뻗어 내민 손을 잡는 순간 죽음의 공포로 무겁게 늘어졌던 내 몸은 삶을 향해 솟구쳤다. 그랬다. 삶은 본능이었다. 치사하고 더럽고 구차하지만, 갸륵하고 애틋하고 미쁜 욕망 혹은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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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작가는 말한다, 오로지 한가지 생각뿐이었다고. “죽지 않겠다! 살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그게 보통사람들이리라. 그렇게 <머릿속에는 오로지 “죽지 않겠다! 살겠다!”는 생각뿐>일 텐데, 오스틴의 예화에서 주인공 닉은 너무 쉽게 체념했다. 마치 남의 일처럼…. 그러면서도 그는 철저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 그럴 정신이 있다면, 기록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게, 사람의 정상적인 모습이 아닐까? <삶은 본능이었다. 치사하고 더럽고 구차하지만> 살아가려고 갖은 수를 다 쓰는 게, 보통 사람인데, 그러지 않은 것을 보면, 닉은 특별한 사람이다, 정말….

그러니 그렇지 못한 우리 보통사람들은, 그런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이야기가 그른지 맞는지를 한번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을 담보하려면, 먼저 그것이 사실이어야 한다. 사실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진실에 한발자국도 접근할 수 없다.

참, 이쯤 해서 말해 둘 것이 있다. 오스틴의 이 예화를 읽다가 웃음이 터져 나왔다는 것을. 이유는? 베르나르 베르베르 때문이다. 베르베르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맨 처음 오스틴의 이 글을 읽었을 때, 데자뷰!!! 데자뷰? 어디선가 보았지? 하는 생각에 한참을 헤매었다. 어디에서 봤더라? 같은 이야기인데. 분명……

분명 그랬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서 본 이야기다. 글쎄, 두 책 중 어느 것을 먼저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예전에 <긍정의 힘>을 읽었을 때에는 베르베르가 기억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베르베르의 책을 읽을 때, 오스틴의 이 예화가 기억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긍정의 힘>을 분석하며 읽는 중에 이 예화를 발견하고는 베르베르가 떠올랐다.

여기에서 베르베르의 책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해 보자. 그 책은 <긍정의 힘>과는 달라서 독자들이 사서 읽어도 되는 책이지만, 사서 그 부분을 읽으라 한다면 너무나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부득불 여기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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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각은 무슨 일이든 이루어 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1950년대 있었던 일이다. 영국의 컨테이너운반선 한 척이 화물을 양륙하기 위하여 스코틀랜드의 한 항구에 닻을 내렸다. 포루투칼산 마디라 포도주를 운반하는 배였다.
한 선원이 모든 짐이 다 부려졌는지를 확인하려고 냉동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가 안에 있는 것을 모르는 다른 선원이 밖에서 냉동실 문을 닫아 버렸다.
안에 갇힌 선원은 있는 힘을 다해서 벽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고 배는 포르투칼을 향해 다시 떠났다..
냉동실 안에 식량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선원은 자기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힘을 내어 쇳조각 하나를 들고 냉동실 벽위에 자기가 겪은 고난의 이야기를 시간별로 날짜별로 새겨 나갔다.
그는 죽음의 고통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냉기가 코와 손가락과 발가락을 꽁꽁 얼리고 몸을 마비시키는 과정을 적었고,
찬 공기에 언 부위가 견딜 수 없이 따끔거리는 상처로 변해 가는 과정을 묘사했으며,자기의 온몸이 조금씩 굳어지면서 하나의 얼음덩어리로 변해가는 과정을 기록했다.
배가 리스본에 닻을 내렸을 때, 냉동 컨테이너의 문을 연 선장은 죽어있는 선원을 발견했다.
선장은 벽에 꼼꼼하게 새겨 놓은 고통의 일기를 읽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것은 그게 아니었다.
선장은 컨테이너안의 온도를 재보았다.
온도계는 섭씨 19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은 화물이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에서 돌아오는 항해동안 냉동장치가 내내 작동하고 있지 않았다.
그 선원은 단지 자기가 춥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었다.
그는 자기 혼자만의 상상 때문에 죽은 것이다.
> (위의 책, 1 02-103쪽)

어쩜!! 이렇게 같을 수가? 하나는 육지에서, 다른 하나는 해상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모든 것이 거의 같다. 그야말로 원조와 원원조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같다.

그런 엽기적(?)인 사건들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인류 역사상 그런 일이 해상에서 그리고 육상에서, 두 번씩이나 일어났으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러니 철저하게 규명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앞으로 누군가가 발생시킬(?) 항공기 냉동고 사건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과연 위의 두 사건이 같은 사건인지, 아니면 다른 두 개의 별개 사건인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그래서 원조, 원원조가 누구인지 구분해보자는 말이다.

오스틴은 베르베르가 그의 책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스스로의 기억을 개입시켜 이 책을 고쳐 나가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라는 생각에 공감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베르베르가 말한 바, <이 책에 담긴 정보는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할 것이고>에서 힌트를 얻어 그 예화에서 시간과 공간을 변형 배치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르베르가 분명히 말한 것처럼, 책 속의 글은 <읽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일 것>이라 했으니 오스틴의 책, <긍정의 힘>을 다르게 읽고 해석하는 것은 독자인 나의 몫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과연, 오스틴과 베르베르 중, 누가 그 이야기/ 예화의 원조인가? 아니면 그런 일들은 애당초 없었던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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