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 없이 성경읽기(17)  –  오병이어 기사에서 배우는  ‘기도’ / 막 6: 31-44

오병이어의 기적은 모든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나 행적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들을 여러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가르침, 기적, 등 이런 식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가르침도 또 여러가지로 분류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많은 사람을 먹이신 것은 어떻게 분류해야 하는 사건일까요?

이 기사는 기적에 관련된 것일까요? 그렇게도 보입니다. 기적을 일으킨 사건이라고 생각되는 요소가 존재합니다.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지고 남자만 세어서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을 배불리(42절) 먹이신 것은 분명 기적입니다.  따라서 이 기사를 ‘기적’이란 항목으로 분류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기사를 단순하게 기적을 다룬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언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41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마리를 들고 기도하실 때 무슨 기도를 드리셨을까요? ’하나님, 여기 음식이 조금 있습니다. 이 떡덩어리가 집채만큼 되게 하시어서 이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일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그런 기도를 드리셨을까요?

그게 아니라는 단서가 41절에 나와 있습니다.
41절,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예수님이 드린 기도가 무엇을 요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감사하는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음식을 들고 지금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감사기도라니, 참 희한하지요? 예수님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몇명입니까?  요한복음에는 오천명쯤 된다(요6:10)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마가복음에는 남자만 5천명(막6:44)이라고 했고 마태복음에서는 먹은 사람이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명(마14:21)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자와 아이를 모두 합하면 만명이 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음식은 몇명분입니까? 지금 예수님 손에 들고 있는 음식은 어른 장정 한명도 먹기에 부족한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마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들고서 감사기도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님이니까 당연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다. 예수님이 못하실 일이 어디 있느냐, 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철저히 인간으로 지내셨습니다.  주무시기도 하셨고 시장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불쌍한 것을 보시면 울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인간이신 예수님이 지금 먹을 입이 만개인데 겨우 한 사람분 음식을 손에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실 때의 상황은 인간이 보기에는 도저히 감사할 상황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내용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지금 한편에는 만여명의 배고픈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서로 비교가 되지 않는 관계입니다. 이 완전한 불균형 사이에 예수님의 감사기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배고픈 만명과 빵 다섯 개, 그리고 예수님의 감사기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배고픈 사람들을 대표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언뜻 봤을 때,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빵 다섯 개로는, 물로기 두마리로는 굶주린 만여명의 배를 채우지 못할 것이 불을 보듯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기도를 드린다면 무엇을 달라는, 청원하는 기도를 했어야 옳을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 지금 여기 굶주린 사람 만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가진 것은 빵 다섯 개밖에 없습니다. 저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기적을 베풀어주십시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하늘 양식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청원의 기도가 아니라,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비논리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여기에서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감사하는 기도입니다.

인간이 에덴에서 쫒겨난 후로는 모든 것이 부족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신을 무언가로 채워 나가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채워도 채워도 꽉 차지 않습니다. 항상 모자랍니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모자라다고 느낍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모범을 보이고 계십니다. 부족한 가운데 충만을 청원하는 기도가 아니라, 모자라는 가운데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자세. 부족함 속에서 충만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자세,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자세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드린 감사의 기도 내용이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감사 기도가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낳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거의 모두가 이야기입니다. 신약도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중에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로 전해주는 것이며 사도행전도 그렇고 요한계시록도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은 왜 그토록 많은 사건들,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목표를 가지고 일을 추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무언가 일을 하시고 계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어느 한단계에서 일을 하시고 그 다음 단계로 착 착 진행을 해 나가시는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이단계- 비록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지만 - 가 하나님의 일하시는 계획의 한부분이라고 우리가 즐겁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지금 몰려온 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또한 그들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이사람들을 먹여 보내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이며 계획이다.
그런데 현재 나에게 있는 것은 물고기 두마리와 떡 다섯덩어리.. 이것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이구나. 그 다음에는? 나는 모르지만 …또 다른 하나님의 계획이 있겠지, 그러므로 내가 현재의 이 모습을 감사해야 하겠다…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8절 말씀의 구체화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개역)
그런데 공동번역에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범사에 감사하는, 어떤 형편,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어떤 일이든 감사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렇게 감사하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만명을 앞에 두고 겨우 한사람분 양식을 손에 들고서도 감사했을 때의 모습을 우리는 그대로 따라해야 합니다. 전술한 것처럼, 예수님이니까 그렇게 기도했지, 라는 말은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그런 상황에서 감사기도를 하시면서 우리에게도 똑같이 감사기도를 하라고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사를 기적의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기사로 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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