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18) – 가나 혼인잔치에 나타난 ‘영광’ / 요 2:1-12

사람 눈은 불완전하기에 부득이 과학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습니다. 미생물, 박테리아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현미경을 사용해야 하고 멀리 있는 별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망원경을 사용해야 합니다. 박테리아를 관찰한다고 망원경을 사용한다거나, 별을 바라본다며 현미경을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러한 이치는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데에도 적용됩니다. 어떤 말씀은 마치 현미경으로 관찰하듯이 한절 한절을, 단어 하나 하나를 분석할 필요가 있지만, 어떤 본문은 그렇게 읽으면 안되고 멀리 있는 별을 바라보듯이 망원경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구태여 단어나 문장 하나 하나를 살펴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살펴보다가는 오히려 전체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나의 혼인잔치 기사를 읽으면서 현미경과 망원경을 구분하여 사용하듯이 성경을 읽을 때에도 반드시 그러한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먼저 이 기사를 현미경으로 관찰한다면 어떤 해석이 나올까요? 현미경을 보듯이 한절 한절을 분석하는 방법입니다.
<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 2장 5절,
<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 (2장 7- 8절)

이렇게 3개 절을 같이 읽어보면 공통되는 내용이 나오는데, 바로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마리아가 말하기를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라 하셨다, 그래서 그 집의 하인들이 예수님이 하라는 대로 항아리에 물을 가져다 부르라고 하시니, 그대로 하였고 또 이번에는 물을 떠다가 가져다 주라고 하시니 또 그대로 하였다. 그대로 하였더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라는 해석이 됩니다. 일꾼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순종함으로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과 같은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또 7절을 읽고 이런 해석도 가능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예수님은 일꾼들에게 그저 물을 채우라 하셨는데, 일꾼들은 거기에 더하여 물을 가득 채웠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이 하나를 하라면 둘을 하자, 더욱 넘치게 하자, 라는 훌륭한 교훈도 추출됩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시는 분 중, 어떤 분은 낱말을 하나 하나 분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참석하신 결혼식 잔치자리에 물 항아리가 여섯 개가 있었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나는 순종의 항아리이다, 그러니 우리가 순종을 넘치게 하여야 한다. 또 하나는, 감사의 항아리니 감사를 넘치게 하여야 한다. 또 하나는 찬양의 항아리니, 찬양을 넘치게 하여야 한다. 또 하나는 ……..뭐 …이런 식으로 가져다 붙이는 은혜로운(?)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방법인 미시적으로 이 본문을 보시는 분들은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예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처럼 우리도 변해야 한다.’
‘하인들이 예수님이 하라시는 대로 해서 물이 포도주로 변했으니 우리도 순종해야 한다.’
‘감사해야 한다.’ ‘찬양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어떻습니까? 이런 해석들이? 이런 해석에 기초한 설교를 지금까지 많이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마치 별을 관찰하는데 현미경을 사용한 듯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대체 뭐가 잘못이라는 말인가요? 이런 점을 생각해 봅시다.
왜 요한은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을 기록하였을까요?
이 사건을 통하여 요한은 어떤 점을 말하려 했을까요?
이 말씀을 가지고 독자들에게 순종을 가르치기 위한 것일까요? 감사와 찬송하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인가요? 요한복음 두 번째 장이며, 예수님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이 나오기도 전인데, 요한은 그러한 점을 알려주려고 이 기사를 기록했을까요?

요한 복음을 시작하면서, 요한은 말씀되신 예수님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요1:14)고 하면서 세례 요한의 고백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요1:34)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장인 요한 복음 2장에서는 무슨 내용이 나오는 게 합당한 것일까요?
전술한 바와 같이 첫 번째 해석방법을 사용하여 순종, 감사, 기도, 회개 등 세부적으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도가 지켜야 할 항목들을 가르치는 것은 무언가 어색하다고 봅니다. 그러한 사항들이 나오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이 기사 다음에는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사건(요2:13-22)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위에 사용한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본문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즉 거시적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문장이나 단어를 하나 하나 분석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문장이나 단어는 어떤 중심되는 사상을 형성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미련을 가지고 살펴볼게 아니라 중심되는 부분을 찾아내어 그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방법을 사용한다면 오늘 본문은 어떻게 해석이 될까요? 본문을 해석할 때에 세부적인 가르침보다는 그 근본 요지가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핵심은 바로 1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가나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그 영광을 목격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문에서 찾아야 할 키워드는 바로 예수님의 영광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1:14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은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이며,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본문은 1:14절에 기록된 ‘영광’과 연관되며, 포도주 사건이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근거로 나타납니다. 더 나아가서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영광을 이야기 합니다. 요한복음 12장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이것이 예수에 대하여 기록된 것이며, 또 기록된 그대로 사람들이 예수에게 그렇게 하였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23절)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때를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내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27 - 28절)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기를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나타난 것으로 보는 요한은, 이제 부활 이전의 사건들을 그런 시각을 가지고 새로운 차원으로 해석하며 기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은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첫 번째 이적이 바로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난 사건이다, 라고 외치고 싶었기에 바로 이 기사를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사에서 얻어야 할 것은 ‘순종하라’는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 땅에 드디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아하, 드디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구나, 우리가 지금까지는 그것을 몰랐는데 예수님을 보니 하나님이 이 땅에 나타나셨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이 바로 11절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이 한계가 있는 것을 압니다. 무언가 덜 떨어진 것 같은, 하다가 말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영광, 이란 말이 피부에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경우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2장입니다.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나타나 천사들이 부르는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갑자기 그 천사와 더불어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그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돌아갑니다.> (눅 2: 13-14)

그때 목자들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목자들은 듣고 본 것이 다 자기들에게 일러주신 것과 같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미하면서 돌아갔다.> (눅 2: 20)

따라서 가나의 혼인잔치 기사를 읽은 우리들도, 듣고 본 것이 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일러주신 것과 같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미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순종하자, 감사하자는 교훈 대신에 아하, 하나님이 드디어 우리에게 오셨구나, 예수님이 드디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셨구나, 하는 찬송이 넘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요한이 가나의 혼인잔치 기사를 기록한 참 뜻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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