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20)  예수님도 근심하셨다 / 막 14:34 -36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염려와 근심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마 6: 25 이하).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 하나님께서 먹을 것, 입을 것 등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기(마6:32) 때문입니다. 그러니 근심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이 세상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몸소 인생을 살아보신 예수님께서 이것 저것 다 겪어보신 다음에, 말 그대로 인생 살아가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시고 그러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생의 어려움을 몸으로 겪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아시는 분이시니까, 그러므로 염려와 걱정을 다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4장 34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이게 웬일입니까? 고민이 곧 근심하는 마음 아닙니까?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 하신 예수님께서 마음이 고민하여 어떻게 될 지경이라고요? 근심이 넘치고 넘쳐서 죽게 될 지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신 분이 분명 예수님이 맞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과는 다른 분인가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다른 것이 앞 뒤가 달라도 문제가 되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말씀이 앞이 다르고 뒤가 다르니, 참 문제지요? 그래서 몇 가지 경우를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첫째 생각해 본 것은 예수님이 앞 뒤 생각 없이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이 말 하고 또 뒤에서는 저 말한다, 는 경우이지요. 앞에서는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멋지게 말씀하신 다음에 정작 예수님 본인이 그런 어려움을 당하니 어찌 할 수 없이 근심하게 되었다는 추론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그런 분은 아닙니다. 그렇게 앞뒤가 다르게 말하는 것은, 어떤 다른 이유가 있지, 예수님이 무조건 그렇게 하실 분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런 답변은 아무래도 말이 되지 않지요.

두 번째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걱정 근심하지 말라 하신 일은 일반적인 사항을 의미하는 것이고 지금 예수님이 근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이유, 즉 당하고 있는 고난은 특별한 사항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는 추론입니다. 그 특별한 사항이라는 것은, 바로 목숨을 걸고 지금 조금 있으면 로마군인들에게 잡혀가 모진 고난을 겪고 죽게 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야말로, 말 그대로 근심하여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게 된 경우이기에 그 정도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된 상황이 결코 쇼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추론입니다. 예수님이 적당히 고통을 당하고 적당히 죽은 척 해서, 우리 죄를 속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것,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것, 그 무엇 하나 사실 아닌 것이 없고 모두 다 실제 상황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분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뭐 그런 것쯤은 식은 죽 먹기 아니냐, 하고 평가 절하 하는데, 그게 아니란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앞에서와 다르게 말씀하신 이유를 세가지로 생각해 보았는데 그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한 대답은 아니지요. 그러나 그 상황에서 예수님은 심히 고민하며 죽게 될 지경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자, 여기서 잠깐 시선을 예수님에게서 돌려 우리들 사람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죽을 지경으로 근심하는 일이 있을 때 우리들은 어떻게 해결합니까? 이럴 때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방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근심을 가지시고 그 근심을 해소하기 위하여 바로 기도를 하셨습니다. 36절입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게 바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기도의 모범을 바로 이 기도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신 예수님은 기도를 하신 다음에 순순히 로마 군사들의 손에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고통의 십자가를 받아 들이셨습니다.

기도하신 그대로 내 뜻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따라 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 내가 근심하여 죽게 되었다, 라고 말씀하실 때의 근심거리가 무엇이었던가요? 바로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근심거리였기에 기도 중에 말씀하시기를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청원 기도를 했건만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기도가 이루어 지지 않았다면 결국은 근심거리를 그대로 안고 갔다는 것인데 예수님이 끝까지, 죽을 때까지 그 근심을 지니고 가셨던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근심하여 내가 죽게 되었구나, 말씀하시고 땀이 핏방울처럼 흘러내리는 기도를 하신 다음에 그 근심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러길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일곱 마디, 곧 가상칠언 중에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것인가요? 바로 하나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기도 맨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말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가 그대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자기의 근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원, 뜻을 따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요점입니다. 예수님이 근심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정작 당신 자신은 고민하신 그 모습에서 우리는 이런 교훈을 얻습니다.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란다고 해서 우리 인간에게 근심 걱정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 인간은 모두 살아가노라면 근심 걱정할 일이 생깁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근심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근심하지 말라시던 예수님이 정작 당신 자신은 죽을 지경으로 근심하셨는데, 그 근심을 어떻게 해소하셨는가 하면 바로 기도입니다. 근심 걱정은 그래서 하나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방향으로 쓰여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예수님은 몸소 우리에게 실천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근심은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방향으로 쓰여져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근심과 염려를 빼버리면 더 행복할 것 같지만 그러한 인생은 오히려 무언가 2% 부족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런 때에 근심, 걱정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근심과 염려에 져서 그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되면 그 염려는 "사람으로 뼈를 마르게”(잠17:22) 하지만 우리가 염려하고 근심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예수님 경우처럼 우리가 기도의 자리로 들어가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바란다면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이 이루어지는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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