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21) - 사마리아인 처럼 하라 / 눅10: 25- 37

얼마 전에, 집사람이 서울에 볼일이 있어 가 있는 바람에 며칠간 혼자 있었습니다.
다른 것은 불편한 것이 없었는데, 한가지 밥을 먹는 일이 조금 그랬습니다.
점심 저녁은 병원에서 먹고 오면 되니까 아침 한 끼를 먹으면 되는데, 아침마저 병원에서 먹으면 사람이 추레해 보인다고 아침은 먹고 가라고 집사람이 지시를 내렸습니다.
거기에 대하여 내가 밥 정도는 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집사람이 며칠간 먹을 밥을 충분히 해 놓을테니
그냥 밥통의 밥을 꺼내 아침을 먹고 출근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바람에,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아내가 집을 비운 첫날, 아침에 밥을 먹으려고 밥통앞에 섰습니다.
식탁에 반찬도 다 차려 놓았는데, 밥통을 열려고 하니 이 밥통이 예전에 보던 밥통하고 달랐습니다.
예전에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기숙사에서 쓰던 밥통하고는 무언가 많이 달라지고 뭐 그리 많은 버튼들이 있는지…
그때 새삼스럽게 우리나라의 주부들이 전자 기기 다루는 솜씨들이 보통이 아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밥통 뚜껑이 열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분명 뚜껑에 있는 꼭지가 밥통을 열리게 하는 중요한 것이겠다 싶어, 이리 저리 돌려도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왼쪽으로 돌려도 오른쪽으로 돌려도 뚜껑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 이분 동안 이것 저것 만지다가 결국은 뚜껑에 있는 손잡이를 돌려놓고 다시 그밑의 삐져 나온 부분을 눌러야 한다는 위대한(?) 발견을 했습니다.
그때 들었던 생각. 제가 혹시 밥통 아닌가, 하는 생각을 밥통앞에서 잠시 했습니다.

제가 밥통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적이 들었던 것은 비단 밥통 앞에서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을 앞에 두고도, 그런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본문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겨우 그뜻을 알아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오는 대목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란 말은 지금은 익숙한 말이 되었지만, 당시 유대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사람에게 경멸이요, 멸시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은 상대하기 조차 하기 싫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착할 리가 없는 것이지요. 아무리 착하다 하더라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생각이 바로 그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사마리아 사람 중 한 사람이 유대민족인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발을 멈춘 것입니다.
발걸음을 멈추고 ‘그것 셈통이다’, 생각하고 길을 간 것이 아니라, 다친 그 사람을 치료해주고 그 다음에 그를 여관으로 데려가 쉬게 한 다음에 그 여관에서의 숙박비를 미리 치루고는 여관 주인에게 비용이 더 들게 되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모두 치루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이게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둘러싸고, 이게 무슨 뜻일가 하는 논의가 성경이 쓰여진 후부터 지금까지 죽 이어져 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성경 해석의 역사를 보면 이 비유를 둘러 싸고 다양한 해석들이 나왔습니다.

예를 들면, 오리겐과 어거스틴의 해석이 바로 그 경우입니다.
오리겐은 해석하기를 이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다름아닌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성처입은 사람을 맡겨놓은 주막은 교회이고, 사마리아인이 다시 오겠다고 한 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다시 오겠다, 곧 재림을 의미한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은혜스러운 해석입니다. 그리고 남이 미처 보지 못한, 이야기속에 숨어있는 속뜻을 찾아낸 것 같은 해석입니다.
어거스틴도 비슷한 해석을 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그는 예수님의 부활로 해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해석대로 본문을 설교하자면 불가피하게 예수님의 재림이야기를 그리고 주막으로 비유된 교회의 이야기, 그리고 사마리아인인 예수님의 이야기를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견해를 따라 해석을 하면, 굉장히 은혜로운 말씀이 나올 것 같은데 여기서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다름 아니라, 37절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을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라서 부활할 수도 없고, 재림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37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예수님은 앞에 있는 사람에게, 이제 나의 이야기를 다 들었으면 이제 가서, 즉 너의 생활에서 예수님이 이야기한 사마리아인처럼 그대로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자기가 앞으로 부활하고 더하여 재림할 것을 예언하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면 그대로 가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정확한 의미를 알려면, 오늘 본문에서 조금 앞으로 가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25절,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거기에 대한 예수님은 오히려 다시 묻는 것으로 답하십니다.
26절,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는가 물어보신 것은 율법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지를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네가 어떻게 읽느냐, 라는 것은 율법에 기록된 내용을 알고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그 내용 즉 글자로 쓰여진 내용들을 어떻게 해석하며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교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은 이말씀을 들으시고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고 말하십니다.
여기까지로 하나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이 나나 싶었는데, 율법교사가 두번째 질문을 해옵니다.
29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웃이 누구인가를 알려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의도로 이야기를 하셨으니까 그 비유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질문하시는 것 아닙니까?
“네 의견에는 이 세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러니까, 이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야기를 듣고 나면 얼른 그중에서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과연 누구인가가 얼른 떠올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고 주막은 교회고 …하는 식의 생각이 떠오르면 뭔가 잘 못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여기 ‘네 의견에는” 이라는 말에 주의해야 합니다.
“네 의견에는”라는 말은 곧 우리의 판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판단력이 올바른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올바른 판단력으로 사실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를 예수님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비유중에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인지를 잘 분간해 내라는 말씀입니다.

네 생각에는, 네 의견에는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
이 이야기에서 강도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 누구입니까?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더러 사마리아인 처럼,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결론도 단순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주변에 강도만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을 싸매주고 고쳐주어야만 참다운 이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묵상의 결론을 맺으면 너무 단순한 결론이 됩니다. 정작 문제는 다른데 있습니다.
문제는,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는 일이 과연 쉬운 일인가, 하는 점입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말씀하신 사마리아 사람 자체도 그렇게 하는 것, 즉 강도 만난 사람을 보살펴 주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유대민족으로부터 멸시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강도만난 자를 구하려 할 때 먼저 민족적인 갈등이 그를 잠시 주저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디 그뿐만인가요?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강도만난 사람을 구해주기 위하여는 시간, 돈, 정성을 그를 위해 쏟아 부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 마음속에 먼저 어떤 확고한 신념이 있었을 것입니다.
민족 갈등을 넘어선 어떤 확고한 신념, 그리고 시간과 돈 그리고 정성을 바칠만한 어떤 열정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쯤은 내가 감수하겠다, 라는 확고한 신념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만한 열정이 있었기에 그는 강도만난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념과 열정이 있다 하더라도, 그대로 행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 사마리아 사람보다 먼저 지나갔지만 못 본척 하고 갔던 사람들을 살펴보면 확실해집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간 사람 곧 제사장과 레위인이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성경을 읽을 적에는 그들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 사람들은 굳이 생각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라면, 레위인이라면 마땅히 한 생명의 귀중함을 알아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강도에게 가진 돈을 다 빼앗기고 맞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을 보았으면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만사를 제쳐두고 그 사람을 돌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무엇이 그 사람들을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모두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 만사를 제쳐두고 구해야 한다는 어떤 신념은 분명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의 해야하는 궁국적인 임무가 또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다.
만일 제사장이 강도 만난 사람을 구했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그로 인해 그는 예루살렘에 늦게 도착했을지도 모릅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구하다가 옷에 피가 묻었을지도 모릅니다.
또 주머니에 가진 돈이 공금이라, 여관주인에게 돈을 지불한 것이 뜻밖에 다른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늦게 도착하여 제사 시간에 늦게 도착했다면, 그는 백성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을 것입니다.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이 시간 하나도 못 지키느냐?
또 피묻은 옷을 입고 지나가는 제사장을 본 사람들은, 제사장이 어떻게 피묻은 옷을 입고 다니냐고 비난할지도 모르며 어디서 싸운 것 아니야, 싸우다 옷에 피가 묻은 것 아닌가, 라는 오해를 할지도 모릅니다.
허락 없이 공금을 사용했다고 비난을 받을지도 오릅니다.
그런 타인의 불필요한 오해를 사기 싫어서 혹시 그 제사장이 강도 만난 그 사람을 그냥 못본 척 하고 지나가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목사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생각에 제가 잠간 그 사마리아 인의 비유에서 나오는, 비난 받는 제사장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강도만난 사람을 못본척 하고 지나가 무사히 아무 일도 없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 제사장은 사람으로부터 왜 옷에 피를 묻히고 다니느냐는 불필요한 오해, 왜 예배 시간에 늦었느냐는 오해를 전혀 받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제사장으로서 존경받으며 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위와 같은 상황을 만나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예배 시간에 늦게 도착한다거나 혹은 옷에 피를 잔뜩 묻히고 교회에 나타난다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요.
그러한 따가운 시선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구차한 이야기를 길게 해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상황과 경우만 다를뿐이지, 이런 어려움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에게 똑 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들 중에 누군가가 강도만난 사람을 구하려다 돈을 많이 썼다고 가정해 봅시다.
물론 여기에서 강도만난 사람이란 비유적 표현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강도만난 사람만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 고통속에 있는 사람을 통들어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도와주고,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했다, 는 뿌뜻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며칠후에 카드 대금 명세표가 날아 옵니다. 부인이 카드명세표를 보더니 깜짝 놀랍니다.
아니, 이 이가 지금 정신이 있어요 없어요? 200만원이면 우리 아이들 과외비가 몇달친데…
당신은 전혀 현실 감각이 없어, 내가 못 살아, 라는 이야기를 단 한번만 듣는다 하더라도 아마 다음 번에 강도만난 사람을 만나면 먼 발치로 보면서 못 본척 하고 돌아 갈 것입니다.
마음 속 한편에서 양심이 자꾸 다시 돌아가자 하지만, 카드 결제일에 듣게 될 소프라노 소리를 생각한다면
발걸음은 자꾸만 그 현장에서 멀리 멀리로 우리를 몰아갈 것입니다.

그래도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강도만난 사람을 만날 때마다 가서 도와주고 산다면 아마 그는 다름 사람들로부터 밥통 같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 모두가 밥통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가 그런 것을 이해하고, 그런 일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강도만난 사람의 참된 이웃이 되리라는 굳은 신념이 있다 하더라도 주변에서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의 시각으로 보고 비난한다면 그 신념은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한 사람을 이해해 주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욱 북돋아 주고 격려해주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어떤 조직에서도 또한 교회에서도 그런 공감대가 형성이 되어야만 그런 일을 만났을 때에 우리가 서슴없이 뛰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밥통, 밥을 짓는 그런 밥통 말고, 밥통의 의미 다 아실 것입니다.
이런 밥통 같은 사람같으니, 라는 말을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영악하고, 세상에서 성공을 하려고 갖은 애를 쓰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우리 모두 밥통이 된다면, 우리는 모두 착한 사마리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네 의견에는 이 세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고 물어보시는 그 질문에
서슴없이, 거리낌 없이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질문에 이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는 말씀도 우리가 기꺼이 듣고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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